22화. 교수님은 상어예요
(22/84)
22화. 교수님은 상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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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교수님은 상어예요
2022.12.16.
반성문을 쓰고 있던 PK 남용은 앞자리에 앉는 최태혁 교수를 보고 움찔했다.
“저 교수님 말씀대로 게시판에 글도 올렸고, 이렇게 벌로 반성문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또 나타난 거냐는 억울한 눈빛으로 남용이 그를 쳐다보자 태혁은 다리를 꼬며 위압적으로 쳐다보았다.
남용은 엄청난 부담감 때문에 반성문 쓰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윤이나 교수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 충성심은 높이 사지만 그래서 태혁은 PK 남용을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
윤이나는 이 어리숙한 의대생을 이용해서 완벽한 알리바이까지 만들었다.
이건 거의 범죄 수준이다.
태혁은 늦은 점심으로 가져온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경찰이었거든.”
경찰이라는 말에 서남용은 바짝 긴장했다.
“저, 절 경찰에 넘기실 거예요?”
병원에서도 단순히 반성문으로 끝냈는데, 태혁이 경찰에 연락하면 오히려 그만 박 과장에게 혼날 게 뻔했다. 일을 키운다고.
“범죄 용어로 따지면 넌 종범이야. 주범은 따로 있지.”
서남용은 그의 시선을 피해 반성문으로 고개를 박으며 모르는 척했다.
“그래, 네가 언제까지 입을 다무나 두고 보자.”
최태혁 교수가 먹잇감을 보는 눈으로 쳐다보며 사과를 먹으니 더 무섭게 느껴져서 서남용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삑삑.
핸드폰 알람이 울리자 태혁은 병원 콜일 거라 생각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나영이었다.
메시지를 읽은 태혁의 두 눈이 커졌다.
<저 이번 주 일요일 쉬어요. 두 번째 기회 쓰실 거면 그때 쓰세요.>
그가 먼저 말하기도 전에 나영이 먼저 말했다는 건 굉장히 좋은 징조였다.
태혁은 기분이 좋아져서 큰 소리로 웃으며 서남용이 쓰고 있던 반성문을 빼앗아서 찢어버렸다.
찍 찍.
서남용은 깜짝 놀랐다.
기껏 쓴 반성문을 다 찢어버리다니.
최태혁 교수는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서남용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써.”
그 순간 서남용은 최태혁 교수한테서 악마를 보았다.
***
나영은 최태혁 교수한테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은별 사건에서 그녀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애써준 덕이었으니까.
보답하는 의미로 선물을 사려고 하는데, 도저히 최태혁 교수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를 자신이 없었다.
뭘 좋아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그렇다고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기도 애매했기에, 차라리 밖에서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그가 직접 고르게 하는 것도 방법인 거 같았다.
그래서 두 번째 기회를 먼저 넌지시 꺼내놓았다.
분명 그녀가 만나달라고 조른 게 아니라 그가 그녀한테 간절히 요청했던 기회였다.
첫 번째 기회를 그가 병원 옥상에서 써버린 걸 생각하면 별로 그렇게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병원 밖에서 만나게 되면 선물을 같이 살 기회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나영의 목적은 단지 그에게 좋은 선물로 보답하는 거였다.
그게 도리였으니까.
그녀는 은혜를 모른 척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영은 자신의 생활비 통장 잔액을 미리 확인해 보았다.
100만 원 정도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설마 명품만 좋아하려나?
사실 최태혁 교수가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들이 전부 비싼 명품이라 살짝 불안해졌다.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돈을 부탁하려다가 관두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 진짜 오바였다.
삑삑.
그때 최태혁 교수한테서 답변이 도착했다.
<그럼 일요일에 아쿠아리움 가자.>
아쿠아리움?
상상도 못 했다. 그가 그런 곳에 가자고 할 줄은.
그러고 보니 그때 오승준 교수도 말했다. 그가 키우는 개한테만 먹을 걸 챙겨 주었다고.
개와 물고기를 좋아하는 남자라.
반려동물과 관련 있는 선물이라면 충분히 100만 원 안에서 살 수 있었기에 나영은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바로 답변을 보냈다.
<좋아요.>
선물을 잘 고를 수 있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단지 선물 때문이 아니라 최태혁 교수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아직 그걸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다.
아! 다른 이유가 또 한 가지 더 있었다.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사준 원피스를 입을 기회가 드디어 생겼다.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한테 효도하는 거니까.
***
태혁은 차현에게 전화해서 데이트에 가기 좋은 식당을 물어보았다.
차현은 영화를 위한 장소 헌팅을 다니면서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고, 안 가본 맛집이 없었다.
그런데 차현은 근본적인 질문을 먼저 그에게 던졌다.
[그런데 왜 아쿠아리움이야?]
“그게 왜?”
[네가 좋아하는 장소잖아.]
한국 와서 아직 한 번도 안 가봤으니 이번에 가면 좋을 거 같아서 나영에게 거기서 만나자고 했다.
[너 설마 문나영한테 어디 가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은 거야?]
“…….”
[문나영이 아쿠아리움을 좋아하긴 해?]
“좋아하겠지.”
[…….]
“좋아할걸.”
마치 그가 크게 잘못했다는 듯이 차현이 계속 침묵하니 태혁도 욱해서 우겼다.
“아쿠아리움이 어때서?”
[그래, 왜 여기 데려온 거냐고 욕먹을 정도는 아니야.]
그 말이 꼭 욕먹은 기분이라서 태혁은 미간이 모였다.
[대신 식사는 꼭 문나영한테 먼저 물어봐서 문나영이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알았어.”
그가 미리 알아볼 필요 없으면 그도 편하긴 했다.
[너 파스타 싫어하잖아. 그래도 문나영이 먹고 싶다고 하면 가.]
움찔.
태혁은 잠시 안면 근육이 굳었다.
한 번 차현이 파스타 맛집이라고 그를 데려갔었는데 왜 이런 걸 먹냐면서 쌍욕을 날렸었다.
“설마 파스타겠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요리가 있는데.
하필 나영과의 첫 데이트에서 그걸 먹게 되겠나.
[여자들은 파스타 좋아해. 안 좋아해도 무난한 걸 선택하면 파스타야. 그리고 네가 아니라고 확신하니 더 파스타 같다. 보통 네 운은 안 좋은 편이잖아.]
결국 파스타 먹게 될 운명이라는 소리처럼 들려서 태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때 그 식당 말고 다른 파스타 집 알려줘.”
[왜? 거기 분위기 좋았잖아.]
“거기 주인이 날 기억할까 봐 그런다!”
그날 하루는 반드시 훌륭해야만 했다.
중요한 두 번째 기회였으니까.
그리고 문나영은 그를 거절할 핑계만 열심히 찾고 있었으니까.
[네가 이렇게 먼저 도움까지 구하면서 열심히 하는 건 고3 의대 준비할 때 이후에 처음 본다.]
차현은 그게 웃긴다는 듯이 목소리에 웃음이 배 있었다.
차라리 수능 공부가 쉬웠다.
문나영은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영과의 관계에서 비극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신감보다는 믿음이었다.
그녀도 결국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함께하게 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
이건 차현한테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운명을 믿는다고 놀릴 게 뻔했으니까.
***
일요일.
쉬는 날의 서울은 놀러 나온 사람들로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쿠아리움 앞을 지나가던 여자 행인들은 아쿠아리움 정문 앞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보고 서로 속닥였다.
“저 남자 1시간 전에도 있던데 아직도 있네. 여자한테 바람맞았나 봐.”
“세상에. 저런 남자도 바람맞는구나.”
“엄청 잘생겼는데 가서 말 걸어볼까?”
“됐어. 지금 여자한테 바람맞아서 엄청 기분 안 좋을 텐데 봉변당할 일 있어.”
그가 바람맞은 거라는 여자들의 말이 다 들렸지만 태혁은 못 들은 척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는 바람맞은 게 아니라 단지 좀 일찍 나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엄청 좋은 상태였다.
태혁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나영이 올 때가 되었다.
클럽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나 병원에서 그녀를 만날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그를 휘감았다.
이렇게 정식으로 약속 잡고 만나는 일은 그한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한테는 익숙한 일상적인 관계에 약한 편이라 태혁은 오늘 자신이 실수할까 봐 좀 걱정이 되었다.
차현한테 전화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핸드폰을 꺼내 움켜잡았다.
또각또각.
그때 그한테 다가오는 경쾌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그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태혁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보드라운 꽃잎 같은 실크 치마 아래 쭉 뻗은 하얀 다리가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는 우아했고, 정성스럽게 화장한 얼굴은 미모가 더욱 빛이 났다.
그녀가 미인이라는 건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만남을 위해 꾸민 모습이 더 특별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이 순간이 올 때까지 미처 몰랐다.
그건 사람 기분을 굉장히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나영이 의아하게 여기며 다시 그를 불렀다.
“교수님?”
태혁은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치마 입은 거 처음 보네.”
“아! 엄마가 사준 옷이에요. 우리 엄마는 항상 이런 옷만 사주세요.”
예쁘다고.
그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태혁은 다른 말을 했다.
“아쿠아리움 온 적 있어?”
“아뇨. 전 처음이에요.”
“설마 물고기 안 좋아해?”
“회 좋아해요.”
“…….”
길을 잃은 거 같은 그의 표정을 보고 나영은 웃음을 깨물었다.
병원에서 오만하고 만능인 교수님의 모습만 보아오다가,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서인지 신선하고 재미있긴 했다.
“들어가요.”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서 아쿠아리움 안으로 입장했다.
태혁은 아쿠아리움에 올 때 언제나 혼자였다. 그때마다 그는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였다.
어찌 말하면 이곳은 그의 도피처인 셈이었다.
그런데 나영과 함께 오게 된 아쿠아리움은 이전에 왔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그는 항상 이곳에서 세상에 그 혼자인 거 같은 완벽한 고독을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와! 물고기들이…….”
“맛있어 보인다고?”
“예쁘다고요!”
그녀가 째려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수족관 속 물고기를 바라보는 최태혁 교수의 눈빛이 병원에서 볼 때와 달리 편안해 보였기에 나영은 물었다.
“사람 아닌 건 다 좋아하시나 봐요?”
태혁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다가 질문의 이면을 깨닫고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내가 성격이 나빠서 사람들이랑 안 친하다는 뜻이잖아.”
본인이 성격이 착하지 않은 건 알고 있는 거 같아서 나영은 쿡 웃었다.
나영은 수족관 속 상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떼지어 다니는 물고기 떼 중 한 마리라면 교수님은 상어예요.”
태혁은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내가 널 잡아먹을 거 같아서 경계한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 역시 나영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영원히 무리 지어 다니는 물고기 떼 중 한 마리로 살 수는 없었다.
그는 살면서 언제나 아웃사이더였으니까.
“처음엔 그랬는데요. 지금은…….”
그녀가 말을 제대로 끝맺지 않고 쉼표를 찍자 태혁은 진짜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