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내가 해결할게
(20/84)
20화. 내가 해결할게
(20/84)
20화. 내가 해결할게
2022.12.09.
태혁은 나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와서 단톡방에 링크된 게시판 글을 확인했다.
배우 은별이 병실에서 도망 나와 화단 뒤에 숨어서 흡연했다는 내용이었다.
은별이 흡연하는 걸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내용이었다.
“네가 본 거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 있어?”
그날 은별을 찾자마자 연락한 사람은 승희였지만, 그녀한테도 은별의 흡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태혁은 눈빛이 무거워졌다.
익명 게시판 글이지만 나영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아! 그런데 은별을 찾기 전에 윤이나 교수님을 만났어요.”
“뭐?”
나영의 입에서 윤이나가 나오자 태혁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윤이나가 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필 윤이나라는 게 영 석연치가 않았다.
“윤 교수님은 응급콜 받아서 가야 한다며 저한테 연구동 쪽으로 가서 은별을 찾아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영은 윤이나가 가리킨 방향으로 갔다가 은별을 찾았다.
태혁은 나영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당부했다.
“넌 무조건 모르는 일이라고 해. 내가 해결할게.”
“네? 하지만!”
“우선 익명 게시판 글부터 삭제해야 해.”
태혁이 먼저 뛰어가 버려서 나영은 혼자 남겨졌다.
그녀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상황은 그녀가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빠르게 나빠졌다.
인터넷에 은별 흡연에 관련된 글이 최초로 올라온 지 1시간 만에 글은 빠르게 퍼지면서 실시간 검색어에도 ‘은별 흡연’이 등장했다.
은별의 소속사가 발 빠르게 대처하며 누군가 악의적으로 올린 글이라고 은별 흡연은 사실 무근이란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해결법이 거짓말이라는 게 나영을 더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런데 레지던트 단톡방에 그녀가 절대 모른 척할 수 없는 내용이 올라왔다.
<익명 게시판에 글 올린 사람이 오승희래.>
<평소에 그렇게 가십에 관심이 많더니 이렇게 일을 치네.>
<헐. 은별이 오승희 고소하는 거 아냐?>
은별 측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강력하게 병원에 물었고, 병원은 은별을 담당하고 있는 위장관 외과에 책임을 물었고, 위장관 외과에서는 은별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승희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승희는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거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한테 무조건 모른 척하고 있으라고 했지만, 나영은 더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바로 위장관 외과로 달려갔다.
“은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저입니다.”
먼저 찾아와서 이 일의 원흉이 자신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나영을 윤이나 교수는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았다.
“승희는 아무 잘못 없어요.”
나영은 이 일에서 승희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할 수 없다는 마음이 앞서서 다른 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은별이 이 일 때문에 굉장히 흥분한 상태야.”
엉망진창인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나긋한 윤이나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거슬리게 청각을 긁었다.
“그 글 올린 사람 당장 자기 앞에 데려다 놓으라고 난리 치고 있어. 문 선생이 직접 가서 사과할 수 있겠어?”
나영은 억눌린 목소리로 반박했다.
“저는 인터넷에 글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문 선생이 처음 은별을 발견했다며.”
나영은 억울함을 참아내느라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윤이나 교수를 쳐다보았다.
“은별이 담배 피우는 걸 보긴 했지만, 남한테 말한 적도, 글을 쓴 적도 없습니다.”
그녀의 반박에 윤이나 교수의 입가에 그린 듯한 반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야 문 선생 믿지.”
아니다.
윤이나의 얼굴은 그녀를 믿어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통쾌해하는 거 같았다.
그녀가 빌어야만 하는 이 상황을.
그래서 나영은 더이상 윤이나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은별한테 직접 가서 해명하겠습니다.”
차라리 은별이라는 폭탄을 끌어안고 같이 자폭하더라도 그쪽이 나을 거 같아서 나영은 바로 몸을 돌려 은별이 있는 VIP 병실로 향했다.
***
VIP 병실은 이미 폭탄이 터진 듯이 물건들이 전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망가지고 흐트러져 있었다.
소속사 사람들도 말리다가 지쳤는지 병실 안에는 은별 혼자뿐이었다.
“너!”
은별은 그녀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내가 너 고소할 거야! 네 인생도 내 인생처럼 망해 봐!”
암에 걸려서도 씩씩했던 스무 살 오은지와 비교하면 은별은 정말 철부지였다.
고작 담배 때문에 인생이 망했다니.
은별이 그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분한 걸 참을 수 없어서 한 대 때려야 직성이 풀리려나 보다.
은별이 그녀를 향해 치켜든 손을 보았지만, 나영은 피하지 않고 눈만 질끈 감았다.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후려치는 매서운 손길은 없었다. 대신,
“넌 뭐야!”
은별이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해 화를 냈다.
나영은 눈을 떠서 확인했다.
은별이 그녀를 때리려고 들어 올린 팔을 최태혁 교수가 붙잡고 있었다.
나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은별도 최태혁 교수가 데려온 사람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 차현 감독님 맞으세요?”
방금 그녀에게 히스테릭을 부린 목소리와는 천지 차이가 나는 수줍은 목소리에 나영은 잠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짧은 시간에 정신없이 터지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녀의 뒤에서 걸어 나온 차현이 나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인사하기 적당한 분위기는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만나서 반가워요.”
나영은 차현 감독이 왜 병원에 온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최태혁 교수를 보았다.
태혁은 은별의 팔을 놓아주며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담배 때문에 시끄러운 여론을 잠재울 방법은 은별 씨 이미지 변신밖에 없는 거 같아서 차현을 불렀어요.”
은별과 나영은 똑같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모두 오늘 정신적 충격은 세게 받아서 뇌가 빠르게 돌아가지 못했다.
차현이 최 교수의 말을 이어서 설명했다.
“은별 씨 소속사가 이미 흡연한 적 없다고 거짓 해명을 하는 바람에 이젠 담배 피운 게 맞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여론은 왜 거짓말했냐고 비난하겠지만.”
“잠깐만요! 저보고 담배 피웠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요?”
은별은 존경하는 차현 감독의 말이라도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표정이 굳었다.
차현은 팔짱을 끼고 은별을 쳐다보았다.
“내 영화에 웃기만 잘하는 청춘스타는 필요 없어요. 담배 피우고 반항하는 스무 살 은별이라면 관심이 생길 수도 있지만.”
차현의 영화는 연기력으로 카메라를 씹어먹는 진짜 배우만이 출연할 수 있다고 평이 자자했다.
그래서 은별은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자신이 차현 영화에 출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 저한테 감독님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생기는 건가요?”
그리 묻는 은별은 정말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려면 연기력을 키워야겠지. 그리고 연기력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때부터 성장하는 거예요. 피하고 외면하는 게 아니라.”
차현의 말은 나영이 듣기에도 진지한 충고로 들렸다. 스타 은별이 아니라 배우 은별을 위한.
“고작 담배 따위에 세상 다 잃은 듯이 겁먹지 마요. 제대로 연기하게 되면 이까짓 일 아무것도 아니니까.”
은별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번 일은 오디션이라고 생각해요. 은별 씨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고 내 영화에 출연할 수 있을지 아닐지 결정할 테니까.”
은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이제 막 처음 오디션을 보러 온 신인 배우처럼 말했다.
“저 꼭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고 싶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어떻게 담배 스캔들이 마지막은 이렇게 희망찬 마무리가 된 건지 나영은 직접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들었다.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독님.”
VIP 병실을 나와서 나영이 차현한테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하자 태혁이 중간에 끼어들며 확실하게 짚었다.
“감사는 나한테 해야지.”
나영은 그를 짧게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교수님은 차 감독님 데리고 온 것밖에 없잖아요.”
은별의 마음을 움직인 건 차현 감독이었다.
“난 무조건 은별 출연시켜서 영화 찍으라고 했어. 그런데 이 자식은 그냥 오디션으로 퉁쳤잖아. 널 도운 게 아니라 하마터면 일을 망칠 뻔했다니까.”
태혁이 이젠 친구 차현을 인정사정없이 깎아내리자 나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차현도 헛웃음을 지었다.
“네 말대로 네 돈으로 은별 나오는 영화 찍었으면, 너 파산이야.”
나영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최태혁 교수를 쳐다보았다.
“영화에 투자한다고요? 미치셨어요?”
그가 다 퍼주면 감격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태혁은 억울해 죽기 직전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오승준이 등장했다.
동생 승희가 곤란해진 일이라 직접 은별을 만나러 왔던 승준은 태혁이 어떤 남자와 친밀하게 서 있는 걸 보고 눈을 치켜올렸다.
성격이 지랄 맞은 최태혁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자신했었는데, 뜻밖에도 적수가 나타난 느낌이랄까.
“최 교수. 이분은 누구시지?”
차현은 남이 자신을 경계하는 건 귀신처럼 알아채기에 일부러 태혁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친분을 과시했다.
“최태혁 친구입니다. 그쪽은 누구신지?”
“저는 최 교수와 가장 친한 의대 동기 오승준입니다.”
“아! 그냥 직장 동료네요.”
“그냥이라니, 친구는 가끔 보겠지만, 우린 매일 만나는 사이입니다.”
최태혁 교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남자의 기 싸움을 보고 나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별꼴이라고.
***
윤이나는 인터넷 창에 뜬 실시간 검색어를 빤히 쳐다보았다.
<차현 은별.>
은별 담배로 떠들썩했던 것이 어느새 차현 감독과 은별의 조합으로 바뀌어 있었다.
윤이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차현 감독을 직접 병원에 데려온 게 최태혁이라고 들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윤이나는 바로 인터넷 창을 닫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윤이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먼저 날 찾아온 건 처음이네.”
그리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있었다.
태혁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같이 저녁 먹을래?”
나영이 과거의 소문 때문에 그한테 화를 냈을 때는 그저 억울하기만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그한테도 잘못이 있었다.
만약 그때 그가 소문을 바로잡았다면 윤이나는 변할 수 있었을 거다.
그가 방치했기에, 윤이나는 더더욱 음흉해졌고, 나영까지 피해를 보았다.
그러니 이번엔 방치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