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영원히 기억에 남을 시즌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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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호의 야구 인생을 영화로 치환한다면 지금 이 순간은 아마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영화의 엔딩은 강주호가 3타점 2루타를 치는 그 장면이고, 한국시리즈는 쿠키 영상쯤 될 것이다.
그러니까 강주호는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도록 해준 고마웠던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감사를 표해야 했다.
자신이 써온 글을 읽어야 할 차례지만 눈앞에 계속 노이즈가 껴 시작조차 못 했다.
결국, 수차례 눈물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글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준비해온 글을 읽는 대신 곱게 접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부산 마린스 4번 타자 강주호입니다.”
시대가 변해 4번 타자가 타선의 중심이 아닐지라도 그는 영원한 4번 타자였다.
“그리고 곧 여러분과 함께 관중석에서 마린스를 응원하고, 욕하며 보게 될 마린스 팬 강주호라고 합니다.”
마린스에서 프로를 시작하고 마무리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그는 뼛속부터 마린스 팬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강주호가 후하고 숨을 내뱉고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은퇴하는 게 무서웠습니다. 야구선수 강주호가 아니라 평범한 야구팬 강주호로 돌아가면 잊히는 게 아닐까, 팬들이 더는 나를 떠올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20살 때부터 프로에 데뷔해 항상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온 강주호에게 그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한심하게도 이게 야구선수 강주호라는 사람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강주호는 그런 자신을 인정했다.
“하지만 야구선수 강주호 대신 야구팬 강주호가 주변을 살폈을 때,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1993년생인 그는 마린스의 마지막 우승을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
“마린스는 우승도 못 하는 팀, 가을도 못 가는 팀, 꼴찌가 어울리는 팀. 제가 10대 시절 숱하게 들었던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기호와 함께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그걸 바꿔보겠다, 반드시 우승해서 저런 말을 했던 사람들의 콧대를 꺾어놓겠다.”
하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실패했다.
아니, 실패한 줄 알았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은퇴 직전이 돼서야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팬 여러분의 응원, 감독, 코치님, 그리고 선수단이 하나가 됐기 때문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주호가 모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인제야 깨달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지금 마린스에는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이 많구나. 그리고 그 친구들이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겠구나.”
강주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마린스라면, 멀리서 응원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김수호와 눈이 마주친 강주호가 시원한 미소를 보이더니 말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입니다. 한국시리즈를 우승하고 당당하게 여러분 곁으로 가겠습니다. 팬 여러분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사직구장 2만 개의 자리 중 제 자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예매를 잘 못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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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린스 8 : 5 대전 피닉스]
[담백하고 솔직했던 작별 인사, 마린스의 4번 타자 강주호의 은퇴식.]
[강주호 결승 3타점 2루타! 김수호 선제 쓰리런! 허하준 첫 세이브까지! 볼거리가 쏟아진 강주호의 은퇴 경기.]
[김수호, 63번째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화려한 마무리.]
[마린스, 피닉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정규시즌 103승 41패로 마무리. 승률 71.5% 기록!]
[정규시즌은 끝났지만···. KBO 최초 5위 결정전 개최! 대전 피닉스 VS 창원 돌핀스.]
[100승+ 시즌,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 마린스의 2033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통합 우승 정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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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담기엔 너무나도 짧았던 강주호의 은퇴식이 끝났다.
강주호의 얘기가 끝났을 때 계속 웃던 채지훈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결국 미소로 감춰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채지훈만 그런 게 아니고 많은 선수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 이후로 영구결번 행사와 선수단 한 명 한 명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차례가 됐을 때 강주호가 말했다.
“한국시리즈에선 양보 좀 해라.”
“오늘 선배님 타점 드리려고 미친 듯이 뛴 건 벌써 잊으셨나요?”
“오케이. 그럼 천천히 뛰게 해줄게. 어때?”
“생각 좀 해 볼게요.”
“빈말로라도 알겠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냐?”
은퇴식에서 나눈 대화라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서로 진심이었다.
은퇴식이 끝나고 나서 당연하게도 회식이 있었다.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은 건 조금 되긴 했지만 이제 정말 끝나기도 했고 축하할 일도 많았다.
“우리가 KBO 역대 최고라고?”
“예. 그렇던데요?”
일단 KBO 한 시즌 최다승과 최고 승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성적에 맞게 다른 것도 따라왔다.
“수호의 6관왕을 위하여!”
“크, 축하한다! 6관왕은 미쳤는데 진짜?”
“감사합니다.”
우선 내가 타율(0.392), 홈런(63개), 출루율(0.502), 장타율(0.893), 타점(151), 안타(211)을 기록하며 6관왕.
“규영이도 2관왕이지? 크, 돈값 제대로 하네?”
“받은 게 얼만데 이 정도는 해야죠.”
이규영 역시 득점(141)과 도루(61)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애초에 도루왕 타이틀을 내가 따는 건 불가능했고, 그나마 득점왕이 가능성이 있었는데.
‘저 득점 대부분이 내 타점이니까 뭐.’
그냥 서로서로 좋았다로 마무리됐다.
투수 쪽도 우리 줄 세우기였다.
허하준이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왕을 차지하면서 4관왕.
세이브왕은 오상엽이, 홀드왕은 이용기가 차지했다.
시상식은 나중에 있겠지만 축하는 미리 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이용기였다.
“수호야. 다 네 덕이다. 진짜 고맙다.”
회식 내내 계속 저렇게 말하길래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무튼, 이제 진짜 시즌이 끝났다.
자연스럽게 관심사는 금방 있을 경기로 돌아갔다.
“피닉스가 지고 돌핀스가 이겼으니까 5위 결정전 하는 거지? 누가 이길 거 같냐?”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정해지지 않은 순위는 시즌 종료를 해서도 정해지지 않았다.
KBO에 순위결정전은 두 가지 경우에만 일어난다.
하나는 1위 결정전, 그리고 또 하나는 5위 결정전.
바로 대전 피닉스와 창원 돌핀스의 5위 결정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돌핀스가 이기지 않을까요? 단기전 짬이 얼만데.”
“원래 단기전은 한 방으로 정해지는 거 모르냐? 피닉스 타선 봐. 황인재가 한 건 낼걸?”
“스읍. 그래도 돌핀스가....”
“피닉스가 올라간다니까?”
여러 의견이 나오는 와중 이규영은 조용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나? 나야 뭐, 돌핀스가 올라오겠지.”
하긴 이규영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어느 팀이 올라오면 좋겠어요?”
와일드카드 팀이, 그것도 5위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마냥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게 우리도 작년 4위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서 우승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질문을 바꾸자 이번엔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대답은 대다수 돌핀스였다.
“뭐냐. 아무리 상엽이 형이랑 내가 없다곤 하지만 돌핀스가 그리 만만한 팀은 아니지.”
이규영이 펄쩍 뛰었다.
올라왔으면 좋겠는 팀은 다르게 말하면 만만한 팀을 의미했다.
변수가 있는 피닉스보단 상대해본 적 있는 돌핀스가 낫긴 했다.
뭐 경기는 까봐야 하는 거니까.
“너희 모레 시간 다 빼놔라. 우리 집으로 모여. 거기서 딱 봐. 아무리 그래도 돌핀스가 6위는 아니지.”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모레 일정이 정해졌다.
이후 감독님이 3일간 휴식 및 이후 합숙을 선언하셨고 배불리 고기를 먹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집에 들어간 순간 뻗었고, 다음 날 부모님의 축하를 받고 허하율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지만.
[미안 ㅠㅠ 웬수한테 붙잡혀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허하준한테 붙잡혔다는 답장만 돌아왔다.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다음 주 중에 한 번 보기로 하고 남은 시간은 쉬면서 프렌즈 선수들의 리포트를 봤다.
아무래도 한국시리즈에 올라올 가장 유력한 팀이 프렌즈였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저희 왔어요.”
이주학, 이호민과 같이 이규영의 집에 도착했다.
“왔냐? 형 왔어요?”
집에 도착하니 꽤 많은 음식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별로 음식이 달랐는데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다.
한쪽엔 치킨, 백숙이.
다른 한쪽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회가 놓여 있었다.
“여기 너네 꺼.”
그리고 이주학, 이호민은 닭이 있는 곳으로 쫓겨났다.
이주학이 곧장 항의했다.
“예? 저도 회 먹고 싶은데.”
“피닉스 응원하면 닭이나 먹어.”
“아니, 진짜 쪼잔하게 이러기에요? 애초에 회랑 돌핀스는 무슨 상관인데요?”
“돌고래 주식이 물고기야. 자, 먹자.”
황당한 논리에 어이없는 것도 잠시, 곧 경기가 시작되자 그냥 다 같이 앉아서 먹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다른 팀 경기를 본 건 꽤 오랜만이었다.
다른 팀 경기를 볼 땐 대부분이 분석하기 위해서였으니.
오늘도 분석할 수는 있었지만 편하게 보는 분위기라 딱히 생각은 안 했다.
“나이스! 오늘 (돌핀스 선발) 컨디션 좋은데?”
오늘 경기는 뭐랄까, 가을 야구의 전초전이라고 해야 할까.
단판에 승부가 결정 나는 만큼 긴장감이 상당했다.
거기에 두 팀 다 스토리가 있다.
피닉스는 정말 오랜만에 맡는 가을의 향기였고 돌핀스는 불과 작년까지 정규시즌 1위를 했던 팀이었다.
양 팀 모두 가을을 향한 의욕이 대단했다.
초반 흐름을 가져간 건 돌핀스였다.
“와아아! 상욱이 형! 스윙 죽였다 방금. 봤냐? 이게 돌핀스야.”
한상욱이 선제 투런포를 치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규영이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친정팀과 안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
반면 경기에서 돌핀스를 상대할 때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가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튼, 단기전은 투수놀음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피닉스의 선발 에릭 니콜라스와 돌핀스 선발 투수는 각각 홈런 한 개씩을 허용한 것만 빼면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다.
오늘 경기의 대미는 에릭 니콜라스가 홈런을 쳤던 한상욱을 상대로 삼진을 잡고 포효하는 장면이었다.
이 경기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수비에서 집중력도 상당했다.
연신 좋은 수비를 펼친 우오준은 왜 유격수가 내야의 사령관이라고 불리는지 증명했다.
피닉스도 황인재와 오기택의 사이드 내야수가 깔끔한 수비를 보여줬다.
이후 경기는 중반부로 접어들었다.
양 팀의 오늘 경기 컨셉은 확실했다.
돌핀스는 황인재는 반드시 거른다.
피닉스는 황인재 앞에 어떻게든 주자를 쌓는다.
“와씨. 나 PTSD 올 거 같은데?”
“갑자기? 왜?”
그걸 보던 이호민이 갑자기 찾아온 오한에 몸을 떨었다.
“우리 고등학교 때 기억 안 나냐? 저거 경고가 맨날 쓰던 작전이잖아.”
“아, 저거?”
이호민의 말에 이주학이 생각이 난 듯 유심히 상황을 들여다 봤다.
“그때 진짜 경고 애들 미친 줄 알았잖아. 아니 몸쪽으로 공이 가면 피해야 하는 거 아냐? 맞으니까 웃으면서 1루로 가던데?”
그러면서 이호민이 날 노려보는데.
“난 모르는 일인데.”
내 타선은 황인재 뒤였다.
“너도 한 역겨움 했거든? 황인재 다음 김수호. 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네.”
음, 우리는 저 작전을 ‘황인재를 위하여’라고 불렀다.
저걸 프로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1사 만루.
피닉스는 결국 황인재 앞에 주자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황인재는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해낼 수 있는 타자였다.
[쳤습니다! 왼쪽!!!!! 넘어갑니다! 황인재의 결정적인 만루홈런이 터졌습니다!]
“와, 저걸 넘기냐? 선 넘네.”
투수에 감정 이입한 이호민이 고개를 저었다.
이규영은 말이 없었다.
1대2로 뒤지던 상황, 단번에 점수를 뒤집어버리는 만루 홈런으로 5대2.
그 이후 변수는 없었다.
[잘 맞은 타구, 황인재! 나이스 캐치! 잡아서 1루로! 아웃입니다! 경기 종료! 대전 피닉스가 2018년 이후 무려 15년 만에 가을 야구 진출에 성공합니다! 이제 대전 피닉스는 인천으로 향합니다!]
아직 대전 피닉스가 거쳐야 할 단계는 많았다.
특히 와일드카드에선 2경기 중 한 경기라도 패배하면 탈락이다.
하지만 어쩐지 저 기세가 꺾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기세를 탄 상태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온다면 그 어느 팀보다 위협적인 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