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196화 (196/203)

196화 영원히 기억에 남을 시즌 - 6

#

마린스를 상대해본 투수들이 하는 의외의 말이 있다.

이주학을 내보내선 안 된다.

이주학이 발 빠른 주자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마린스는 전통적으로 거포의 팀이었다.

좋게 말하면 거포고, 속되게 말하면 똥차라는 뜻이다.

1루에 주자가 나가도 병살이 쉽게 나왔고, 장타가 될만한 타구에도 1루에서 멈추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홈런 한 방이 무섭긴 하지만, 그렇다고 특출나게 홈런을 많이 친 팀은 아니었다.

그런 마린스에서 그나마 주력이 괜찮은 선수가 박은성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턴 양상이 달라졌다.

KBO의 도루왕, 이규영이 합류했고 발이 빠른 좌타자 이주학도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박은성 혼자 달리던 예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거기에 그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김수호의 존재는 투수들에게 악몽과 같았다.

만약 김수호를 거른다고 해도 투수들의 원조 악몽 강주호가 버티고 있었다.

실제로 무사에 이주학이 출루할 경우, 득점 확률이 40%가 넘었다.

이규영, 박은성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병살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둘이 2루에 이주학을 보내놓기만 하면 김수호나 강주호가 알아서 홈으로 불러들였다,

즉, 1점을 만들어내기 가장 좋은 상황이 바로 무사에 이주학이 출루하는 경우였다.

그리고 7회 말,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온 이주학은 제 역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초구부터 기습 번트 모션을 취했다 존에서 빠지는 공에 다시 방망이를 거둬들였다.

“볼!”

그리고 그 모션을 보고 순간 홈을 향해 달려 나오다 멈춘 일그러진 투수의 얼굴을 보고 씨익 웃었다.

‘어때? 내보내기 싫지?’

투수의 심리를 읽어라.

김수호한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작년엔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지만, 일타강사 이규영의 경험이 섞인 보충 설명과 경기를 보는 눈과 경험이 생기자 슬슬 무슨 말인지 깨닫게 됐다.

이규영, 박은성, 김수호, 강주호.

저 4명과 자신을 비교하면 투수는 당연히 자신을 선택한다.

예전이었다면 기분이 나빴겠지만, 이젠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히려 좋다.

‘나 내보내면 뒤에 규영이 형인데? 그 뒤는? 괜찮겠어?’

저 생각을 말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행동으로 옮겼다.

적극적인 타격.

공이 존에 들어오는 것 같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방망이가 나갔다.

빗맞은 타구라도 빠른 발과 좌타자라는 이점을 활용해 내야안타 비율이 높았다.

그리고 저번 홈런처럼 잘 맞은 타구의 비율도 높아졌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초구부터 번트 모션을 취하면서 피닉스 내야진에 번트라는 생각을 심어뒀다.

이제 그걸 수확할 차례가 됐다.

‘볼은 아예 배제하자.’

투수의 무릎이 들리자 다시 번트 모션을 취하는 척하면서 다시 방망이를 곧게 잡았다.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

하지만 주자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번트 모션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그 동작을 다 하면서 정확한 타격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주학은 정확한 타격을 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무조건 존에 공이 온다는 확신을 하고 번트에 흔들린 수비를 뚫어낼 만한 타구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시도한 것이었다.

이미 기습번트를 대비해 앞쪽으로 내려와 있던 황인재와 오기택은 이주학이 방망이를 다시 들자 움찔거리며 제 위치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타구의 운명을 바꿨다.

-따악!

밀어 친 타구가 그대로 황인재 머리 위로 낮게 날아갔다.

[3루수 점프! 잡지 못했습니다! 3루수 키를 넘기는 안타! 타구가 그대로 외야로 흐릅니다! 이주학, 그대로 속도를 살려 2루까지 뜁니다!]

평소였다면 황인재가 뒤로 물러나면서 여유롭게 잡을 수 있는 타구였지만, 그것도 단 한 발 앞으로 이동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잘 맞은 타구도 아니라 느린 속도로 외야로 흘렀다.

그 동안 이주학이 가속을 살려 2루까지 노렸다.

급하게 내려온 좌익수가 강하게 2루로 송구했지만.

“세이프!”

결과는 세이프.

“와, 쟤 뭐냐?”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규영이가 알려줬나?”

“주학이 나이스!”

5회 이후 계속된 동점 상황에서 무사 2루의 찬스, 그리고 이어지는 상위 타선.

이규영이 재치 있는 플레이를 선보인 이주학을 보며 웃었다.

‘쟤도 컨택 재능 하나는 넘친단 말이야?’

말이 쉽지, 방금 저 플레이는 발만 빠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야를 흔들고, 그 흔들린 내야를 향해 공을 보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이주학은 자신만의 답안지를 내밀었다.

이제 스승으로서 그 답안지를 칭찬할 차례였는데.

“볼!”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스읍. 아쉽네. 10개는 빼려고 했는데.’

투수가 부담 때문인지, 아니면 이주학에게 2루타를 내주며 흔들린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규영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며 걸어 나갔다.

이제 무사 1, 2루의 상황.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박은성이 작전을 확인하고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딱!

“아웃!”

작전은 번트였다.

발이 빠른 두 주자가 순식간에 다음 루에 들어가면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

워낙 발이 빠른 두 주자였고 박은성도 빠른 타자라 굳이 번트를 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이정훈 감독이 노리는 바가 있었다.

“타자, 고의사구.”

“넵.”

이어진 김수호의 타석은 고의사구였다.

상황은 이정훈 감독의 노림수대로 흘러갔다.

1사 2, 3루,

오늘 3점 홈런이 있던 김수호를 거르고 득점권에서 안 좋았던 강주호를 선택했다.

한 점도 내주면 안 되는 피닉스로서는 병살이나 홈 포스 아웃 상황을 노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김수호도 불만 없이 곧장 1루로 걸어 나갔다.

이제 상황은 완벽했다.

1사 만루, 타석에 강주호.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찾아온 득점권 찬스였다.

승부에 앞서 피닉스도 승부수를 던졌다.

[피닉스의 수호신, 황보근 선수가 이 위기를 막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7회 말에 마무리 등판.

오늘 경기에서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하는 피닉스로선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양 팀의 감독이 선택한 선수들이 자리에 들어섰다.

마운드엔 황보근, 타석엔 강주호.

강주호가 작전을 확인하고 집중했다.

작전은 당연히 강공.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있다.

‘감독님도 낭만이 있으시네.’

이 타석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혹은 이후 다시 타석에 설 기회가 있든 이번 타석이 강주호의 은퇴 경기를 대표할 것이다.

이정훈 감독은 강주호에게 묻고 있었다.

마지막을 자신의 손으로 매듭지을 자신이 있느냐고.

강주호의 대답은 간단했다.

초구, 강주호 특유의 부드러운 스윙이 공을 때렸다.

-따아악!

[쳤습니다! 우중간을 완전히 가를 듯! 3루 주자 이미 홈으로! 2루 주자 3루 돌아 홈까지! 1루 주자 마저 3루를 돕니다! 공도 백홈 됩니다! 태그! 세이프! 세이픕니다! 강주호, 3타점 2루타!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입니다!]

강주호.

캐스터가 목 놓아 부른 그 세 글자만으로 그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

5대8, 3점 차.

피닉스에게 두 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있지만, 따라잡기엔 버거운 점수였다.

차라리 7회에 올라왔던 이용기가 8회에도 올라왔다면 희망을 품을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8회 초, 마린스의 네 번째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이번 시즌, 1.18의 평균자책점과 45개의 세이브를 기록한 마무리 오상엽.

하지만 피닉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아직 경기 안 끝났다. 어떻게든 출루해. 인재 앞에 기회를 만들어!”

피닉스 최근수 감독이 주문한 건 단 하나.

황인재, 주자를 쌓고 황인재 타석까지 끌고 가면 모른다.

하지만 리그 평균보다 못하는 하위타선이 오상엽을 공략하길 바라는 건 요행에 가까웠다.

“스트라이크 아웃!”

최근수 감독의 바람을 단 13개로 끝낸 오상엽이 당당하게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제 피닉스의 남은 기회는 단 한 번.

그마저도 황인재가 타석에 서려면 두 명의 타자가 출루에 성공해야 했다.

그나마 8회 말을 실점 없이 막았다.

이제 운명의 9회 초.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오상엽이 아니었다.

순간 다른 투수가 올라오는 모습에 피닉스 선수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누구야? 정태석? 박상훈? 박우주?”

피닉스 더그아웃에 혹시 상대할만한 투수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이 가득 찼다.

하지만 곧 그 얼굴을 보자 아까보다 더욱 짙은 절망이 그들을 덮쳤다.

“시발. 지금 허하준이 왜 나와···.”

우승 직전, 팀의 에이스가 나와 세이브를 기록하는 건 흔한 일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지난 시즌 마린스의 우승 마지막에도 허하준이 완봉승을 기록하며 마운드를 지켰으니까.

하지만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 굳이 에이스를 내보내는 팀은 없었다.

전혀 상상도 못 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고, 절망이 피닉스 더그아웃을 덮쳤다.

허하준이 등판한 이유는 간단했다.

첫 정규시즌 우승을 마무리하는 자리.

그리고 강주호의 정규시즌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자리.

그 자리의 주인공은 허하준 일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래도 네가 끝내는 게 그림이 좋긴 하지. 얼른 갔다 와.”

오상엽도 마린스의 첫 정규시즌 우승 세이브 타이틀을 흔쾌히 양보했다.

그렇게 허하준이 마운드에 서자 사직구장은 들끓기 시작했다.

오늘은 강주호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기도 했지만, 허하준 역시 오늘이 끝나면 언제 마린스로 돌아올지 기약하기 어려웠다.

작년에도 느꼈지만, 한국시리즈 예매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운 만큼 허하준이 공을 던지는 모습을 직접 보는 건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될 터.

그렇게 마린스의 환호와 피닉스의 절망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낀 허하준이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는 김수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사인을 보고 웃었다.

‘역시.’

가끔 느끼지만, 김수호와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맞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고, 그런 날 성적은 완벽했다.

포심.

“스트라이크!”

포심.

“스트라이크!”

스플리터.

“스트라이크 아웃!”

순식간에 올라간 아웃카운트 하나.

대타가 나오긴 했지만, 채 풀리지 않은 몸으로 허하준의 공을 쳐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아직 피닉스 팬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출루만 해! 출루만!”

“허하준이라고 못 치는 건 아니잖아!”

주력이 괜찮은 1, 2번 타자 중 한 명이라도 출루에 성공한다면 오기택까지 연결이 된다.

출루에 굉장한 강점이 있는 오기택이라면 황인재에게 타석을 건네주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물론, 오기택의 타석이 온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너무 허무하게 돌아간 방망이에 희망이 꺾여버렸다.

그리고 오늘 경기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타자.

-딱!

그의 선택은 기습 번트였다.

“수호야! 바로 앞!”

하지만 끝에 와서 휘어진 투심에 제대로 대지 못했고 김수호 앞에 공이 떨어졌다.

김수호가 여유롭게 잡고 그라운드 안쪽에서 그대로 강주호에게 공을 던졌다.

-퍼억!

“아웃!”

그걸로 경기 끝.

“와아아아아-!”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마지막 공을 받은 강주호가 한참이나 공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

환호를 지르던 팬들도 그 모습을 보며 점점 소리를 줄여갔다.

마린스 선수들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주변으로 모였다.

강주호가 이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그리고 기억 속에 새길 수 있게.

잠시 후.

강주호가 미트를 번쩍 들자 그제야 사직구장이 다시 움직였다.

“와아아아아!”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

2033시즌 부산 마린스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그리고 선수 강주호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는 부산 마린스의 8 대 5 승리로 끝을 맺었다.

#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 암흑이 찾아왔지만, 사직을 가득 채운 팬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곧 관중석에서 하나둘 씩 핸드폰 라이트가 켜지더니 이내 사직구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가 한 곳을 비췄다.

“안녕하십니까. 마린스 4번 타자 강주호입니다.”

-와아아아아아!

강주호의 은퇴식이 시작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