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약속의 무게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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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의 밤은 길었다.
어차피 토요일은 경기가 없었다.
하루 쉬고 대구로 가는 만큼 우승의 여운을 즐길 시간은 충분했다.
우선 땀과 물로 홀딱 젖은 유니폼 대신 정규시즌 우승을 축하하기 위한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팬들이 보는 앞에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시작부터 끝까지 1위를 유지한 우승)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당당히 섰다.
“맨날 죄송하다고 적힌 현수막만 들었는데···.”
강주호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감격에 찬 듯 보였다.
심지어 구단주까지 직접 방문해 선수들 한 명 한 명 전부 악수하며 얘기를 나눴다.
나랑 악수할 때는 구단주님이 계속 웃고 있어서 따로 얘기는 못 했다.
이후 사진도 찍고 모자도 던지고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한 것 같다.
두 번 다신 없을 순간이기도 했고 특히 강주호가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 눈물이 쏟아진 팬들도 많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팬들을 향해 큰절까지 하고 나자 그라운드에서 하는 행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 늦은 시간까지 우리에게 환호하는 팬들 곁으로 갈 차례가 됐다.
“와아아아아!”
드래프트에 지명받고 루키 헤이징 데이 때 응원단상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처음 밟은 응원단상이었다.
그땐 팀 성적이 워낙 안 좋았기에 팬들도 별로 없었고 나에 관한 관심보다는 이호민이나 이주학에 관한 관심이 더 컸다.
근데 지금은 뭐.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다른 선수들이 입장하는 와중에 손을 한 번 흔드니 반응이 장난 아니다.
이거 재밌는데.
아무튼 선수들 전부 다 올라올 순 없어서 반씩 나눠서 진행했고 응원단장님이 차례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우승한 소감, 앞으로의 각오 같은 것들.
그리고 나한테 마이크가 도착했다.
“아아. 반갑습니다. 부산 마린스 포수 김수호입니다.”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그냥 자기소개했을 뿐인데 누가 보면 홈런 친 줄 알겠다.
이 열기, 환호가 너무 좋다.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가 정규시즌에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건 팬 여러분이 평일이나 주말에나 항상 많이 와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큰 힘이 됐다.
수치로 나타낼 순 없지만, KBO에서 홈 혜택을 가장 많이 본 팀이자 원정의 불리함을 가장 적게 본 팀이 우리 팀일 것이다.
그만큼 평일, 주말, 홈, 원정 가릴 것 없이 언제나 구장을 가득 채우고 응원해주는 목소리에 항상 많은 응원을 받았다.
하지만 감사만 하기엔 뭔가 심심하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주신 팬들에게 선물 아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이미 끝난 방송으로는 들을 수 없는 공약 같은 거.
“저희가 오늘 이겨서 지금 94승인 걸로 알고 있는데 시즌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꼭 100승을 채우겠습니다.”
형들이랑 합의한 공약은 아니지만 못 이룰 목표는 아니었다.
17경기 중 6승만 하면 된다.
“그리고 만약 100승을 채울 때까지 여러분이 지금처럼 와주신다면 반드시 저희가 통합우승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까보다 더 큰 환호가 덮쳐왔다.
통합우승.
이번 시즌 우리의 목표였고, 이제 딱 절반 왔다.
남은 건 한국시리즈에서 누가 올라오든 4승을 거두면 된다.
그렇게 환호하는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 때.
-툭.
팔찌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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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이 좋은 날, 당연히 회식이 빠질 수 없다.
항상 단장님께 카드만 주고 사라졌던 구단주도 오늘은 직접 참여하셨다.
뭐 어차피 공간은 분리된 터라 같이 오신 사장, 단장님만 불편하지, 우리는 다른 세상이었다.
“우승 축하한다!”
“크, 마지막에 주호 선배 끝내기로 우승! 완전 드라마 아닙니까?”
“하준이 완봉승은 어떻고. 20승 진짜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말 그대로 겹경사였다.
좋은 일이 하나 터지면 연달아 일어난다고 하는데 마지막 경기에 의미 있는 기록들이 쏟아졌다.
정규시즌 우승은 이미 언제,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였지 못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극적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 저번에 먹었던 한우가 아직 소화가 안 됐는데 오늘 이렇게 또 먹어도 되는 거냐?”
“그 정도면 병원부터 가.”
이주학의 호들갑은 오늘도 여전했다.
“어, 근데 너 팔찌 어디 갔냐?”
“끊어졌어.”
“진짜? 괜찮아?”
“원래 끊어지라고 차는 건데 뭐.”
타이밍도 절묘했다.
통합우승을 하겠다고 팬들 앞에서 말한 뒤 끊어진 거라 정말 그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끊긴 기분이 든다.
그렇게 슬슬 배가 부를 무렵, 최치호가 말했다.
“수호야, 주학아. 잔 채워라. 대장님이 한 말씀 하신단다.”
모든 시선이 강주호를 향했다.
강주호는 본인이 하겠다고 한 건 아닌지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잔을 들고 있었다.
“크흠. 다들 너무 고생 많았다.”
그러면서 우리를 한 번씩 훑어봤다.
“아직 시즌이 끝난 것도 아니고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또 오늘 누가 팬들 앞에서 마음대로 공약을 거는 바람에 그거 이루려면 아직 축배를 들긴 이른 것 같다.”
“우우우우. 김수호.”
옆에서 이주학이 추임새를 넣었다.
좀 억울한데.
“왜 다들 절 그렇게 보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마린스 최다 승리 이런 기록도 세우고 그래야죠.”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래도 오늘은 그거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재밌게 놀고, 즐겁게 보내자. 모두 정말 고생 많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잔을 부딪치고 있을 때 우리 얘기를 들었는지 구단주님이 있는 방문이 열렸다.
“구단주님이 한국시리즈 MVP한테 신차를 부상으로 주겠다고 하십니다! 모두 박수!”
단장님의 말에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역시 돈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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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가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으면서 마린스 팬들의 시선은 자연히 아래를 향했다.
프렌즈는 확고한 2위 자리를 지켰고 3위 나이츠까진 거의 순위가 확정됐다.
이제 가을야구까지 남은 자리는 단 두 자리.
그 두 자리를 노리는 구단은 돌핀스, 챌린저스, 피닉스, 스타즈, 에이스였다.
4위 돌핀스부터 8위 에이스까지 단 3경기 차이.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 4, 5, 6위였던 챌린저스와 피닉스, 스타즈가 나란히 마린스에 스윕패를 당하면서 순위표가 개벽이 일어났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돌핀스는 마린스의 연승을 끊으며 1승 1패로 마무리하는 등 갑자기 치고 나가게 됐다.
사실 마린스의 정규시즌 우승 확정은 다른 팀들에겐, 특히 마린스와 경기가 많이 남아 있는 팀들에겐 희소식이었다.
우승하면 주전들에게 휴식을 보장할 거고, 스윕을 당한 세 팀처럼 그런 꼴은 안 당할 테니까.
하지만 김수호의 발언이 인터넷에 떠돌자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다.
[5강 경쟁 초비상!!! 김수호 ‘100승 찍겠다고 선언.’]
ㄴ 아니 쟤는 우승했으면 됐지 뭔 100승이야 ㅡㅡ 고생했으니까 좀 쉬어라.
ㄴ ㅋㅋㅋ 근데 6승만 하면 되는 거라 살살할 거 같긴 한데.
ㄴ 내 생각엔 김수호 풀타임 뛸 거 같은데? 어차피 코시 전까지 쉴 시간 충분하고 지금 홈런 기록 걸려 있지 않냐?
ㄴ 한국 신기록, 아시아 신기록까지 다 깨야지.
17경기를 남겨둔 상황에 53개의 홈런.
4개만 더 치면 한국 신기록이었고 60개를 넘어 61개를 친다면 아시아 신기록이다.
17경기에 8개의 홈런.
어림잡아 2경기에 1개꼴로 쳐야 가능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김수호의 몰아치기 능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됐다.
그리고 마린스가 우승한 직후 대구 에이스와의 원정 경기.
-따아아악!
체력 안배를 위해 지명타자 겸 5번으로 나와 곧바로 홈런포를 가동하며 기록 달성이 꿈이 아니라는 듯 위력을 과시했다.
그 모습을 본 갈 길이 바쁜 대구 에이스 팬들은 베이스를 도는 김수호를 향해 외쳤다.
“우리도 양줌마가 마지막으로 가을야구 하는 것 좀 보자!”
그 외침에 힘이 담겨 있었던 걸까.
최정윤이 그 홈런을 제외하고 마린스 타선을 틀어막으며 승리를 거뒀다.
비록 마린스 주전이 아닌 1.5군에 가까운 라인업이었지만 에이스로서는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에이스와 경쟁 중인 다른 네 팀의 팬들이 왜 에이스는 봐주냐면서 앓는 소리를 냈지만, 절대적인 갑은 마린스였다.
취소 경기가 리그에서 가장 많은 마린스는 일찌감치 우승했음에도 빠듯한 일정을 보냈다.
감독·코치진은 강주호의 마지막 시즌과 김수호의 기록을 위해 지명타자 자리에 두 명을 번갈아 가면서 기용하며 부담을 줄여줬다.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강주호가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자 김수호가 단박에 알아챘다.
“그럼 제가 계속 지명타자로 들어갈까요?”
“쯧, 네 맘대로 하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주호에겐 한 경기, 한 타석이 정말 소중했다.
욕심 같아선 두 타석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1번, 6번 이렇게 들어가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우스운 생각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원래 애틋하고, 소중한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법.
한 경기, 한 경기가 지날 때마다 경기장에 남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은퇴 투어가 시작됐다.
9월 23일 금요일.
돌핀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
최지용이 대표로 건네주는 선물을 받으며 그렇게 마지막 은퇴 투어가 끝이 났다.
마치 은퇴를 축하한다는 듯 양 팀 선수들은 쉴새 없이 홈런포를 가동하며 화끈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가장 빛난 선수는 3번 타자 겸 포수로 출전한 김수호였다.
에이스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추가한 뒤 세 경기 동안 홈런을 추가하지 못한 김수호였다.
하지만 오늘 첫 타석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따아악!
공이 방망이에 맞은 순간 한명훈은 체념했다.
‘저걸 넘긴다고?’
하지만 심판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구원해줬다.
“파울!”
뒤늦게 공의 위치를 확인해보니 몸쪽에 너무 붙은 타구라 왼쪽으로 더 휘었다.
공이 조금만 더 가운데로 왔다면 무조건 담장을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홈런 대신 파울 홈런이 됐다.
파울이나 파울 홈런이나 똑같긴 하지만, 파울 홈런에 관한 야구계의 명언이 있다.
파울 홈런 뒤 삼진.
큰 타구를 날린 뒤 타자가 다시 그런 타구를 날리기 위해 큰 스윙을 하고, 그게 삼진으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특히 파울 홈런 이후 떨어지는 공에 삼진들 당하는 건 야구 좀 봤다는 사람이라면 연상하기 쉬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한명훈은 그 이론을 철석같이 믿는 투수다.
카운트는 2스트라이크.
유리한 카운트를 살리기 위해 최필주가 스플리터 사인을 낼 때까지 고개를 저었다.
결국 원하는 사인을 얻어낸 한명훈이 공을 던졌다.
‘됐다!’
스플리터는 잘 들어갔고 방망이도 끌려 나왔다.
-따아악!
‘어?’
하지만 한명훈의 귀에 들린 건 심판의 삼진콜이 아닌 조금 전보다 더 우렁찬 타구음이었다.
그리고 타구의 방향도 좌측이나 우측이 아닌 정중앙.
‘아직 몰라. 제일 깊숙한 곳인데 설마.’
공이 날아가는 걸 보면서도 합리화를 한 한명훈이었지만 멈춰선 중견수의 모습을 보고 결국 고개를 떨궜다.
“와아아아아!”
55호 홈런.
드디어 KBO 한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한 발자국만 남겨둔 순간이었다.
그리고 김수호의 다음 타석.
돌핀스 배터리가 이전 타석을 교훈 삼아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하지만 너무 조심했던 걸까.
“볼!”
“볼!”
“볼!”
공 세 개가 연달아 볼이 되면서 최악의 카운트.
볼넷은 안 된다.
그나마 1회는 솔로 홈런이었지, 지금은 주자가 둘이나 있다.
거기에 원 아웃.
1점 차로 뒤지는 상황에 안타 하나에 2점을 내줘야 하는 만루는 부담스러웠다.
‘안 치겠지?’
그리고 김수호는 3볼 상황에 공을 안 치기로 유명했다.
특히 주자가 득점권에 있을 땐 더더욱.
하지만 배터리는 몰랐다.
그건 어디까지나 승리를 위한 선택이었고, 우승을 달성한 지금.
-따아아악!
김수호는 언제고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는 선수였다.
[쭉쭉 날아갑니다! 계속 뻗습니다! 김수호! 김수호가 KBO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는 순간입니다!]
시즌 56호 홈런.
한국 프로야구 최다 홈런에 드디어 동등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명훈 또한 김수호 옆에 자신의 이름을 같이 새겼다.
한명훈의 소감은 꽤 담백했다.
“하.”
그날 마린스는 김수호의 연타석 홈런을 포함 총 5개의 홈런을 쳤고 강주호의 은퇴 투어 10경기의 총 전적은 10전 10승으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