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189화 (189/203)

189화 약속의 무게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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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호는 자신의 방망이를 들고 나가는 김수호를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까 김수호에게 했던 장난은 진심 반, 농담 반이었다.

불과 작년까지, 아니 얼마 전까지 은퇴에 관한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냥 이제 진짜 끝이구나, 그래도 떠나기 전에 우승해서 다행이다, 그래도 한 번 더 우승하고 싶다 정도.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은 때때로 강주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오늘, 저도 모르게 김수호에게 장난을 쳤을 때 강주호는 깨달았다.

‘잊히고 싶지 않다.’

평생을 야구만 해왔고, 분에 넘치는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언제가 은퇴할 때 팬들이 보내준 사랑 덕분에 미련 없이 은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순전히 그의 멍청한 착각이었다.

은퇴하지 말라고, 네가 떠나면 마린스는 망한다고 우스갯소리로 팬들이 하던 말이 오히려 강주호의 은퇴를 더욱더 확고히 했음은 그만 아는 비밀이었다.

적어도 은퇴 후에 나를 바로 잊지 않겠구나, 나를 그리워하면서, 빈자리를 느끼며 서서히 잊히겠다고 느끼며 은퇴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건 강주호의 착각에 불과했다.

6년 전, 강주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은퇴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도 빠짐없이 마린스 팬들의 입에 오르락거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강기호의 이름이 마린스 팬들의 입에서 사라졌다.

정확히 갑자기 찾아온 20살의 어린 선수가 마린스의 포수로 자리 잡은 그 순간부터.

그걸 인지했을 때 강주호는 정확히는 몰랐지만 묘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많은 것이, 아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만년 꼴찌였던 마린스는 어느새 패배보다 승리가 익숙한 팀이 됐고, 투수와 타자 가릴 것 없이 김수호를 중심으로 뭉쳤다.

지난 20년 동안, 심지어 그가 마린스를 잠시 떠나있던 순간에도 강주호를 찾으며 강주호를 중심으로 뭉쳤던 마린스는 이제 없다.

그리고 강주호가 남겼던 기록들도 한둘씩 김수호의 이름으로 덧칠되어갔다.

심지어 영원할 거로 생각했던 대기록도 이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야구를 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했던 1년이었다.

하지만 이건 행복과 다른 개념이었다.

잊히기 싫다는 인간의 본능 같은 것.

하지만 이런 멍청한 생각을 비웃듯 김수호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자신을 생각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잊히지 않겠구나.

내가 마린스에 그었던 한 획 보다 더 굵고, 진한 획을 그은 김수호가 있는 한 절대 잊히지 않겠구나.

언제고 사람들이 이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따라다닐 자신의 이름을 보며 추억하겠구나.

대기타석에 선 강주호가 멍하니 김수호의 뒤를 쳐다봤다.

모든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 순간, 그 부담감이 얼마나 심한지 강주호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김수호는 그런 부담감 따위는 하나도 없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자세로 타격을 준비했다.

-따아아악!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청아한 타구음이 구장에 울렸다.

그 타구를 보며 강주호는 생각했다.

자신이 은퇴하는 날도 오늘처럼 하늘이 맑았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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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린스 4 : 2 인천 스타즈]

[세계 신기록! 김수호, 강주호의 기록을 넘기며 이민수 상대로 10경기 연속 홈런 달성! 시즌 53호!]

[우연찮은 포수 데뷔부터 세계 신기록까지. 김수호의 1년을 돌아본다.]

[바뀐 방망이를 쥐고 나온 김수호, ‘강주호 선배님의 방망이로 기록을 달성하고 싶었다. 그걸 이룰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홈런을 허용한 이민수, ‘수호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다음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땐 절대 홈런을 맞지 않겠다.’]

[11연승 마린스! 김수호의 대기록을 등에 업고 매직넘버 6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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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을 치고 홈을 밟았을 때 강주호에게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지만, 눈을 마주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냥, 뭐랄까,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지금은 강주호의 은퇴 투어가 진행 중이다.

이걸로 9번째.

이제 마지막 은퇴 투어만 남았다.

그리고 다음은 은퇴식.

정말 끝이 다가왔다.

“자. 다들 알지? 오늘도 이기자.”

강주호의 은퇴 투어 8전 8승.

그리고 오늘 그 기록을 9전 9승으로 늘렸다.

비록 내 연속 홈런 기록은 10번째에서 끊겼지만, 팀은 12연승을 기록했고 매직넘버도 4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작된 돌핀스와의 창원 2연전.

1승 1패를 주고받은 뒤 다시 사직으로 돌아왔다.

이제 매직넘버는 2.

비록 연승은 끊겼지만 프렌즈도 1승 1패를 거두면서 매직넘버가 줄었다.

이제 자력 우승까지 단 2승.

“다들 왔냐?”

강주호가 선수들이 전부 모인 걸 확인하고 중앙으로 나왔다.

부산에서 대전, 대전에서 서울, 그리고 서울에서 창원, 그리고 다시 부산.

힘든 원정길에도 고작 하루 휴식한 것 치곤 선수들의 눈빛은 매서웠다.

심지어 평소보다 한 시간 더 빠른 집합이었지만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쯧. 잠 좀 자고 오라니까 얼굴들이 왜 그러냐.”

“잠이 와야 자죠.”

정규시즌 우승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현재 정확히 18경기가 남은 시점에 우승을 못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치호, 이규영, 오상엽을 제외하고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우승을 앞두고 제대로 잘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맞지. 나도 잠이 잘 안 오더라.”

“행님은 늙어서 그런 거 아닙니꺼?”

“뒤질래?”

채지훈의 농담에 분위기가 한층 풀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가지다. 솔직히 정규시즌 우승인데 남이 이겨서 우승하는 건 멋 없지 않냐?”

“그렇죠.”

“맞습니다!”

“프렌즈랑 상관없이 깔끔하게 2연승. 그리고 팬들에게 인사드리자. 할 수 있지?”

“넵!”

“오케이 좋아. 그럼 가자.”

짝!

강주호가 박수를 한 번 쳤다.

“우승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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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3년 9월 15일 목요일.

당연한 말이지만 사직은 매진됐다.

평생을 기다린 순간, 그 순간을 두 눈에 담을 기회를 포기할 마린스 팬은 없었다.

상대는 정규시즌 최하위의 서울 호올스.

프렌즈와의 트레이드 이후 완전히 리빌딩으로 돌아선 호올스는 현저히 벌어진 전력 차에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마린스의 기세를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선취점을 뽑은 건 호올스였다.

마린스의 선발 이호민을 프렌즈와의 트레이드로 데려온 황정현이 1회부터 공략해내면서 소수로 응원을 온 팬들에게 혹시나 하는 생각을 심어줬다.

하지만 그 생각은 1회 말에 증발해버렸다.

주전 라인업이 출전한 마린스.

“볼!”

선두타자로 나선 이규영이 공 13개를 골라내면서 볼넷으로 출루했다.

투수로서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경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규영과 박은성이 호흡을 맞춘 지 벌써 1년이 다 돼간다.

이제 어느 정도 호흡이 잘 맞는 둘이었고 벤치에서 작전이 나오자 이규영이 박은성을 믿고 곧장 뛰었다.

-따악!

2루수가 커버하러 들어간 사이 박은성이 가볍게 밀어 치면서 원래 2루수가 있던 곳을 꿰뚫었다.

“쓰리! 쓰리! 나이스!”

미리 출발한 이규영은 순식간에 3루까지.

무사 주자 1, 3루에 들어선 김수호.

이제 덥다기보단 날이 선선해진 9월이었지만 투수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됐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시즌 타/출/장이 0.389/0.496/0.889이다.

홈런은 무려 53개, 9월이 이제 막 반이 지났는데 벌써 홈런 9개를 친 김수호가 완벽한 찬스에 들어왔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포수가 바깥쪽으로 가는 승부를 요구했다.

하지만 명백한 볼을 한쪽 손을 놓으면서 가볍게 밀어 쳤다.

라인 선상에 붙어있던 1루수가 몸을 날렸지만 빠른 타구는 아슬아슬하게 미트를 뚫고 외야로 빠져나갔다.

이규영이 여유롭게 홈으로 들어왔고 박은성도 3루까지 내달렸다.

순식간에 1대1 동점.

그리고 다시 무사 1, 3루가 만들어졌다.

-따악!

이어서 강주호가 높고 멀리 가는 타구를 만들어냈다.

[우익수! 잡았습니다! 환상적인 수비!]

우익수가 좋은 수비를 보여줬지만, 그 사이 박은성이 태그업하면서 홈으로 들어왔다.

2대1 역전.

그 이후 마린스 타선은 김수호마저 홈으로 불러들였고 1회 3점을 내면서 경기를 끌고 갔다.

타선은 3점을 내는 데 그쳤지만, 이호민이 6이닝 2실점, 필승조가 남은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3대2 신승을 거뒀다.

그리고 팬들과 선수들 모두 아직 끝나지 않은 프렌즈의 경기를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와. 저걸 잡네!”

관중석 중 누군가의 탄식을 시작으로 곳곳에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프렌즈와 경기중인 돌핀스가 9회 초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서도하의 호수비로 경기가 끝났다.

비록 3점 차였지만 방금 그 공이 빠졌다면 점수는 1점 차, 끝까지 모를뻔한 경기였다.

“오히려 좋다. 내일 우리 힘으로 우승하자.”

선수들도 서도하의 캐치에 같이 탄식을 내뱉었지만, 강주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응원단장 역시 경기가 끝났음에도 끝까지 기다려준 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내일 경기, 좋은 소식을 기대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2033년 9월 16일 금요일.

[오늘 이기면 마린스는 자력으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플레이 볼!”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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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만약 오늘 이기지 못하면 하루 쉬고 대구 원정을 가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홈에서 자력으로 우승할 기회는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져도 프렌즈도 진다면 우리가 1위 확정이지만.

“후. 무조건 이기자!”

선수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50년 만의 정규시즌 우승을 제 손으로 이뤄내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리고 그 역할에 아주 잘 맞는 투수가 대기 중이었다.

“오늘 이기면 20승이죠?”

“어. 맞지.”

허하준의 성적에 아직 승리가 19승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의외긴 했다.

시즌 25경기 등판 19승 1패, ERA 1.03, 211k.

허하준이 나올 때마다 은근히 득점이 적은 날이 여러 번 있었다.

나온 경기 대부분은 이겼지만, 체력 관리 때문에 7회를 마치고 내려간 경기가 대부분이다 보니 생각보다 승이 적었다.

딱히 허하준도 승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근데 아무래도 오늘은 다른가 보다.

“오늘 승리 따기 전엔 안 내려갈 거야.”

표정을 보니 단단히 마음먹고 나왔다.

뭐 그냥 호올스 타자들만 불쌍하게 됐다.

어제 이호민의 초구를 공략하는 작전을 들고나와 선취점을 뽑은 호올스 타자들이 오늘도 비슷한 작전인지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맞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

“스트라이크 아웃!”

맞지 않으면 의미 없는 작전이었다.

변화구 연속 3개.

선두타자가 허무하게 삼진으로 물러났다.

반대로 2번 타자에겐 포심과 투심을 적절히 섞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역시나 공 3개로 삼진.

그리고 어제 선취점의 주인공, 황정현.

“스트라이크!”

느린 커브로 카운트를 잡았다.

-딱!

“파울!”

투심으로 파울을 유도해내고.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은 알고 있어도 치기 힘든 허하준의 스플리터로 삼진.

공 9개로 3개의 삼진.

그 이후에도 별만 다르지 않았다.

허하준은 6회까지 단 공 53개로 끝냈다.

한 타자가 안타를 치긴 했지만, 곧바로 병살을 잡으면서 18타자만을 상대하면서 6회를 마무리했다.

문제는 우리도 상대 외국인 투수, 벤 엘리스를 공략해내지 못했다.

나도 그렇고 다른 타자들도 그렇고 약간 흥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1점만 내면 이긴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뭔가 그 1점에 붙잡혀 점수를 못 낸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별다른 소득 없이 9회 말이 됐다.

허하준은 정확히 공 99개로 9이닝을 끝냈다.

벤 엘리스 역시 8회까지 단 두 타자만 내보내면서 호투 중이었다.

그리고 100개가 넘은 투구수에도 9회 말에 올라왔다.

내가 투수는 아니지만, 상대 투수가 9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본인도 8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상황에서 교체를 원하는 투수는 단 한 명도 못 봤다.

“볼!”

“볼!”

하지만 그게 곧 좋은 결과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연속된 볼.

욕심은 없다.

홈런도 좋지만 오늘 가장 중요한 건 승리.

“볼!”

상대 투수가 공짜로 내보내 주겠다는 데 거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볼!”

결국 스트레이트 볼넷.

보호구를 풀고 1루로 걸어 나갔다.

다행히 나도, 투수도 교체는 없었다.

솔직히 내 발로 홈을 밟고 싶었다.

그리고 타석엔 강주호.

아마 강주호는 제 손으로 이 경기를 끝내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리고 때마침 관중석에서 소리가 들렸다.

“프렌즈가 이겼다!”

그 말은 즉 오늘 우리가 이겨야 우승이라는 뜻.

저 말이 어떤 타자에겐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강주호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초구부터 호쾌하게 방망이가 나왔다.

-따아아악!

2루까지 가서 잠시 타구를 바라보다 그대로 천천히 3루를 향했다.

“와아아아아아!”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

그리고 홈을 밟았다.

“들어와! 들어와!”

“행님! 퍼뜩 오이소!”

“수호야! 이거 받아라!”

이미 선수들은 나를, 그리고 강주호를 반겨주기 위해 나와 있었다.

평소였다면 나를 향해 무언가 쏟아졌겠지만, 오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이주학이 친절하게 챙겨준 물을 들고 강주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강주호는 홈을 밟기 전 잠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홈을 밟는 순간.

“행님! 행님!”

“우승이다! 와아아아악!”

“야! 들어! 하나 둘 셋 하면 던지는 거다. 자, 하나 둘 셋!”

하늘의 떠 있는 강주호의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강주호는 마린스의 역사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건 꽤 멋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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