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야구에 100%는 없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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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우승 직후 마린스 직원들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특히 마케팅팀이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이번 시즌 들어서 새롭게 기획한 것이 있었다.
바로 야구팬들이 항상 궁금해하는 더그아웃에 카메라를 설치해 선수들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과거 팬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던 콘텐츠였지만, 성적 하락과 동시에 폐지된 비운의 콘텐츠이기도 했다.
올해 부활한 마린스 TV의 야심작은 시즌 초반부터 좋은 반응을 보였다.
개막 직후 연전연승을 달리는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만 원정 경기에선 현실적인 이유로 촬영하지 못했던 만큼 약간의 아쉬움이 따랐다.
하지만 이번 창원 경기는 촬영을 진행했는데 바로 개막 10연승, 혹은 그 이상을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촬영은 대박이 터졌다.
무려 원정 10연승과 동시에 퍼펙트게임을 한 경기의 더그아웃을 촬영한 것.
거기에 쓸만한 소스도 많았다.
이호민이 이닝이 끝나자마자 화장실에 들락날락하는 모습, 선수들이 조용히 있다 이호민이 화장실만 가면 겨우 대화를 나누는 모습, 거기에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해외 더그아웃에선 볼 수 없는 엉뚱한 장면들까지.
이 영상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9회 초였다.
8회 말에 아웃카운트를 다 잡고 그제야 퍼펙트 중이란 걸 깨달은 이호민이 화면에 잡혔다.
[이호민 선수가 전광판을 봤다는 건 역시 그것 때문이겠죠?]
당시 경기를 보고 있던 팬들은 물론 캐스터까지 이호민이 그제야 퍼펙트게임을 알았다는 건 전혀 몰랐다.
하지만 영상과 인터뷰를 보니 이호민이 왜 전광판을 뚫어져라 봤으며, 굳이 김수호가 와서 데려간 것인지 그제야 이해했다.
ㄴ 아니 퍼펙트 중인 걸 모를 수가 있냐?
ㄴ 기사 못 봤냐? 배탈이었다잖나.
ㄴ 돌핀스 연전연패 ㄷㄷ. 배탈 난 선수한테 출루 한 번도 못 한 타자들 어쩌냐.
ㄴ 그 와중에 이호민 표정 개웃기넼ㅋㅋㅋ 내가? 진짜? 아니지? 이런 표정인데?
ㄴ 나라도 못 믿을 거 같긴 한데?
ㄴ 와 그때 어떤 기분일까? 존나 얼떨떨할 거 같은데.
그리고 등장한 하이라이트 장면.
바로 김수호가 미트를 이호민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간 장면이었다.
ㄴ 저 때 뭐라 한 거냐?
ㄴ 이호민 인터뷰 떴는데 갓수호가 넌 신경 쓰지 말고 미트만 보고 던지라 했대. 그럼 자기가 알아서 해준다고.
ㄴ 역시 경력자 ㄷㄷㄷㄷ. 이래서 경력자, 경력자 합니다.
ㄴ 근데 김수호도 존나 떨렸을 텐데 개멋있네. 걍 퍼펙트 깨져도 본인이 책임진다는 말이잖아.
ㄴ 진짜 퍼펙트나 노히트에서 포수가 왜 중요하다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ㄴ 그나저나 이호민 연봉으로 롤렉스 사주면 파산 아님? ㅋㅋㅋㅋㅋㅋ 김수호는 벌써 양 손목에 롤렉스 끼고 다니네.
ㄴ ㅋㅋㅋㅋㅋㅋ 구단에서 바로 유니폼 내줄 거라 ㄱㅊ. 그거로 충당할 듯?
ㄴ 캬. 둘이 합쳐 만 40세 안되는 퍼펙트 배터리. 진짜 지린다.
ㄴ 아 ㅅㅂ 허하준 이제 미국 쳐 가는 줄 알았더니 비슷한 새끼가 또 왔네? 아 진짜 개같다.
물론 이번 경기로 마냥 행복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고, 기록을 달성한 사람이 있으면 기록을 내준 팀도 있는 법.
작년 허하준의 노히트노런에 이어 이호민의 퍼펙트게임까지 만들어준 돌핀스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2연패를 당하며 팀 순위는 8위로 쳐졌고 스윕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마린스에 10연승과 퍼펙트게임을 만들어줬다.
심지어 5선발을 상대로 1선발을 냈는데 생긴 결과였다.
최악, 아니 최악이라는 말도 지금 현 상황을 표현하지 못했다.
결국 참고 참았던 마산 아재들이 폭발했다.
예전부터 진행됐던 트럭 시위는 물론, 구단에 직접 찾아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다음 경기가 원정이라 선수들은 당장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얼마나 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마린스 선수단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사직으로 돌아왔다.
[부산 마린스 vs 대전 피닉스 금, 토, 일 전부 매진! 야구만 잘하면 된다!]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 부산 팬이나 창원 팬이나 같았다.
단지 그 행동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대한 값은 달랐지만.
아무튼 그렇게 사직 구장은 선수들과 관중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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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으로 돌아온 첫날, 이호민은 눈이 퀭한 상태로 경기장에 나왔다.
누가 봐도 밤새 본인 기사를 읽다 잔 게 분명했다.
어차피 일정상 이번 주 추가 등판은 없었고, 퍼펙트게임까지 기록한 마당에 축하해줬으면 했지, 뭐라 할 선수는 없었다.
이번 퍼펙트게임 공은 구단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허하준의 1호 공은 KBO에서 사정사정해서 지금 야구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알고 있다.
그건 50년 야구 역사상 한 번 나온 기록이니까 그럴 만하다.
이번 이호민의 공 같은 경우는 구단에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고 들었다.
그러자 이호민은 아무 고민 없이 수락했고.
“왜 그랬냐?”
“뭐가?”
“공, 그거 진짜 안 갖고 있어도 괜찮아?”
“뭐 어때. 나보단 구단이 보관 더 잘해주겠지.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나?”
“퍼펙트게임은 오늘만 있는 일이 아닐 거라며. 아니야?”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한 기록인데 너무 쉽게 정한 거 아니냐.
얘도 제정신이 아니다.
“아, 맞다. 엄마가 다음에 시간 될 때 집으로 한번 오래.”
이호민의 부모님이 나를 찾은 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정황상 지금 부르시는 건 하나밖에 없다.
“한우?”
“투쁠. 이번에 진짜 제대로야.”
“콜.”
그렇게 오늘 등판할 일이 없는 이호민은 쉬러 가고 나는 경기를 준비하러 불펜으로 향했다.
어제 승리로 오늘 구장을 찾은 팬들이 뭘 원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선발도 허하준이니 그 니즈에 맞춰주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오늘 상대는 피닉스.
현재 7위에 있지만 최근 상승세가 꽤 무서운 팀이다.
그 중심에는 황인재가 있었고.
아,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다.
박우주의 뒤를 이어 2032 드래프트에 전체 2번으로 지명된 홍민우.
원래 알고 지낸 선수다.
학교는 달랐지만, 같이 U-18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보기엔 황인재 다음으로 야구를 잘하는 타자였고, 내 눈이 틀리진 않았는지 프로에 와서도 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뭐, 정말 어떤지는 이따 경기에서 보면 알겠지만.
“저 왔어요.”
“어. 빨리 왔네?”
내 앞에서 땀을 닦고 있는 이 사람의 공을 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벌써 이렇게 던지면 이따 어떡하려고요?”
“알잖아. 이 정도는 던져야 몸이 풀리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좀 놀랄 만도 했다.
그런데도 매번 7이닝 이상씩 꼬박 던지는 걸 보면 애초에 타고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 온 목적을 말해줬다.
“오늘 피닉스 타선에서 홍민우 좀 조심해볼까 해서요.”
“홍민우? 아, 그 우주 동기?”
“예. 좀 잘하더라고요?”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야?”
“옛날부터 알던 앤데 그냥 좀 익숙한 장면을 봐서요.”
“그게 뭔데?”
“음, 고등학교의 저?”
허하준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 의견에 동의해줬다.
뭐 딱히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오늘 피닉스 선발은 5선발 김태민.
허하준이 실점한다고 해도 타선이 그 이상으로 점수를 뽑아낼 테니까.
그래도 뭐, 어제 이호민이 퍼펙트를 한 것처럼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야구에 100%는 없으니까.
그래도 이길 확률이 99% 정도는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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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초는 순식간에 끝났다.
깔끔한 허하준의 삼자범퇴.
피닉스도 비시즌 동안 영입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전부 투수 쪽이었다.
프렌즈에 잔류한 이신영이 엄청난 액수에 놀랐다는 썰도 돌아다닐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오상엽도 제안이 왔었다고 말했고.
다만 이번 FA 시장이 소수의 대형 선수들보다 나머지 선수들은 애매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의욕만큼 만족스러운 영입은 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다.
오늘 상대 선발 투수는 김태민.
비시즌에 김동준과 함께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 땐 포스 때문에 쉽게 말 걸기 어려운 선수였는데 매일 강주호를 봐서 그런지 그때만큼의 포스는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 전적에서 유의미하게 좋은 것도 한몫하고 있다.
오늘도 제 역할을 해낸 이규영이 어느새 2루에 가 있는 상황.
-따악!
시원한 소리와 함께 이규영이 홈으로 들어왔다.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깔끔한 선취점에 이어 강주호가 장타를 치면서 한 점을 더 뽑았다.
이제 2회 초, 선두 타자는 황인재였다.
시즌 초반이긴 하지만 타격 지표 대부분이 상위권에 올라와 있다.
특히 홈런은 나와 같은 4개로 1위.
언제나 쉽지 않은 상대다.
그래도 첫 타석은 우익수 뜬공으로 잡아냈다.
슬쩍 1루로 들어가는 황인재를 보자 홍민우에게 무언가 계속 말하는 황인재가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홍민우가 타석으로 걸어왔다.
“형.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냥 정신없이 지냈죠. 프로 와서 벽이라고 해야 하나, 확실히 다들 잘하시더라고요. 우주도 잘하는 것 같고.”
“너도 잘하던데? 인재 말 들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근데.... 음, 아니에요.”
머뭇거리는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뭐 타석에 세워놓고 캐물을 순 없는 노릇이다.
이제 다시 경기에 집중할 때.
허하준한테 말해놓은 것도 있으니 초구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딱!
“파울!”
초구부터 나온 방망이였지만 완전히 빗맞으면서 파울.
허하준을 상대하는 타자 중 둘 중 한 명은 포심에 타이밍을 잡는다.
그래서 요즘 초구에 투심을 자주 요구하고 있다.
이후 타이밍을 완전히 뺏긴 홍민우가 연달아 던진 스플리터에 그대로 삼진.
허하준한테 미리 말한 것 치곤 쉽게 잡아냈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후 6번 타자까지 깔끔하게 잡아낸 허하준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네가 말한 것 치곤 별론데?”
“음. 그럼 저희한테 좋은 거죠. 애초에 선배 공을 한 번 보고 치는 선수가 어딨어요.”
“너?”
“네네.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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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내용은 간단했다.
내 안타를 시작으로 선취점을 올린 타선은 김태민을 두드렸고, 김태민은 4이닝 5실점 하면서 다소 애매한 성적을 가지고 내려갔다.
반면 허하준은 7회까지 3안타만 허용하며 무실점.
이번 시즌 무실점 기록을 24이닝까지 이어갔다.
본인은 더 던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아직 시즌 초였고 이미 승기를 가진 경기에서 허하준이 더 던지는 건 무리였다.
허하준 이후 박우주가 2이닝을 던지면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중간에 1실점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거기에 김태민이 내려가고 불펜을 두드린 타선은 대거 8점을 뽑아내며 8대1 승리.
개막 11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당연히 이런 날엔 축하가 빠질 수 없는 법.
이호민, 이주학이랑 간단하게 늦은 저녁을 먹기로 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진동이 울려서 핸드폰을 봤는데 모르는 번호가 있었다.
“여보세요?”
-아, 형. 저 민운데요.
“어. 민우야.”
번호의 주인은 오늘 상대했던 홍민우였다.
-그,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 저 밥 한 번만 사주시면 안 될까요? 묻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당연히 밥이 메인이 아닐 거다.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 호민이랑 주학이. 너도 알지?”
-아, 네네. 급한 건 아니라서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니야. 내가 한번 물어볼게. 같이 먹어도 되지?”
-...네. 그럼 한 번 물어봐 주시고 연락해주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뒤늦게 약속 장소에 온 이주학과 이호민한테 얘기했다.
다 같이 U-18 대표팀에 갔기 때문에 둘도 홍민우를 알고 있었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마련한 자리.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지만, 홍민우는 별다른 기색 없이 밥을 잘 먹었다.
그렇게 시킨 음식을 다 비울 무렵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왜 밥 사달라고 한 거야?”
잠시 고민하던 홍민우가 결국 실토했다.
“그, 인재 선배 있잖아요.”
홍민우의 입에서 나온 황인재의 이름.
그 이름을 듣자 이호민과 이주학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고맙게도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어떻게 쳐야 한다, 뭘 노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해 주시거든요?”
듣다 보니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었다.
“근데 이게 말이 쉽지 갑자기 타격 포인트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포심 타이밍을 잡다가 변화구가 오면 어떻게 하는지 도저히 몰라서요. 형이 고등학교 때 인재 선배랑 4, 5번 했잖아요. 그땐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하면 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