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야구에 100%는 없다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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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황인재의 조언은 그다지 친절한 편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수학 문제를 물어봤더니 답만 알려준 꼴이라고 할까.
답을 내기 위해 수많은 단계와 공식이 있는데 그걸 전부 생략하고 말해주니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뭔가 싶었다.
그래도 당시엔 시키는 대로 했고, 결과가 좋으니 황인재도 나도 어느 순간부터 타석마다 당연한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황인재가 매번 정확한 것도, 내가 매번 쳐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이후부터 성적이 유의미하게 올랐고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황인재가 일부로 그렇게 알려줬느냐.
그건 아니라고 본다.
내가 아는 황인재는 그 누구보다 승리와 우승에 집착하는 선수다.
팀이 이길 수만 있다면 자신의 밑천까지 털어서라도 다른 선수들에게 알려줬을 거다.
그렇다면 왜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답지만 알려주는 방식을 하느냐인데.
이런 말이 있다.
천재는 좋은 코치가 되지 못한다.
천재에게 당연한 건 다른 사람들에겐 당연한 게 아니고, 그걸 알지 못하는 천재는 좋은 가르침을 알려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황인재가 바로 그 천재라는 거다.
본인에게 중간 과정이 필요 없으니 굳이 알 필요가 없고 그게 남들에게 알려주는 방법까지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피해자가 고등학교 때 여러 선배와 지금 내 앞에 신세 한탄을 하는 홍민우고.
황인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들은 이주학과 이호민의 표정이 볼만했다.
“와. 그걸 조언이라고 해준 거야? 진짜? 그거 따라 했다가 그대로 타격감 나락 가겠는데?”
“돌았네? 수호야 너한테도 그렇게 설명했냐? 걘 진짜 세상 혼자 사네.”
홍민우 이전에 당사자로서 말을 해보자면.
‘그 정도면 다 알려준 거 아니냐?’
라고 말하고 싶다.
황인재도 깨달은 게 있는지 나한테 말하는 것보다 좀 더 디테일하게 얘기해주고 있었다.
그래봤자 타이밍을 앞에 두고 쳐라에서 변화구가 생각보다 좋으니 변화구를 노릴 거면 타이밍을 앞에 두고 쳐라로 바뀐 거지만.
문제는 저런 걸 말해준다고 타격 직전에 바로 바꿀 수 있는 선수는 얼마 없다.
내 얼굴에 금칠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더 말해보라고 해봤자 강주호 말곤 생각 안 난다.
홍민우도 이번 신인 중 한 손가락에 꼽히는 선수지만 황인재의 조언을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었나 보다.
아무튼 내 진심을 얘기하면 저 세 명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뻔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나도 비슷했지.”
그러자 홍민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무슨 방법 없을까요?”
겨우 넘어가나 싶었지만 산 넘어 산이다.
그래도 작년 한 해 동안 깨달은 게 상당히 많았다.
“일단 나도 경험자니까 말을 하자면 인재가 해주는 말은 대부분 틀린 말은 아니야.”
“아, 그쵸.”
“당장 네가 그 주문에 못 따라가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그랬거든.”
물론 그 기간은 좀 짧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지금 무리해서 따라가는 것보단 경기가 끝나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렇게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게 쌓이면 미래의 너한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건 분명하거든.”
방금 한 말은 황인재 경험자로서 100% 진심이었다.
확실히 황인재가 경기를 보는 눈은 동년배 중에 따라갈 선수가 없다.
당장 홍민우가 그런 조언에 부담스러워하는 건 이해한다.
거기에 홍민우가 느끼는 부담감은 황인재의 조언뿐만은 아닐 거다.
기사만 봐도 홍민우를 언급하며 쏟아지는 기사가 한둘이 아니다.
오늘 홍민우가 타석에 들어서자 들린 함성을 생각하면 작년 황인재를 생각나게 한다.
그만큼 팬들이 갖는 기대감이 크다는 거고, 그 부담감에 쫓기면 지금 이 상황보다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 없다.
이것 역시 겪어본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길게 봐. 시즌도 길고, 우리가 야구할 시간도 많이 남았어. 한 경기 못 한다고 시즌 끝나는 것도 아니고 올해 못한다고 야구 접는 거 아니잖아. 너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이 말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홍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온 홍민우는.
“스트라이크 아웃!”
웰링턴의 공에 헛스윙하면서 그대로 삼진당하면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대놓고 포심 타이밍을 잡는데 이건 잡아줘야지.
어제 그렇게 말해놓고 너무한 거 아니냐고?
여기서 포심 던져주는 게 애를 잘못 키우는 거다.
이럴 땐 제대로 골려줘야 정신을 차리지.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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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승은 12연승에서 끊겼다.
내 조언 덕분인지 하스를 상대로 맹타를 친 홍민우가 그 경기의 MVP로 뽑혔다.
내 착각이 아니라 진짜 홍민우가 경기 끝나고 문자로 말했다.
-형 덕분에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이나마 안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그걸 왜 우리를 상대로 아냐고.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그렇게 시즌 13차전이 끝난 시점에 성적은 당연히 1위.
연승은 끊겼지만 기세는 그대로였다.
다음 스타즈와의 원정 3연전은 승패승으로 위닝.
두 번째 경기에서 패전투수가 된 이호민은 초반 볼넷을 남발하다 3회에 가서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본인 말로는 완벽하게 던지려고 해서 그렇다는데 내가 봤을 땐 생각이 많아서 그랬다.
직전 경기에서 그런 경기를 했으니 이해는 되지만, 아쉽긴 했다.
뭐 본인이 제일 아쉬워하는 것 같으니 더 뭐라 할 것도 없었다.
다음에 잘 던지면 되지.
그렇게 패배를 맛보고 허하준이 완벽투를 던지면서 다시 승리.
그리고 이제 우리 뒤를 바짝 쫓고 있는 프렌즈와 만나게 됐다.
우리가 14승 2패로 1위, 프렌즈는 11승 6패로 2위.
스윕이라도 당하면 격차가 순식간에 0.5경기로 좁혀진다.
반면 위닝시리즈만 기록해도 격차를 4경기 이상으로 벌릴 수 있다.
아무리 20경기도 치르지 않은 초반이라지만 2등 팀과 격차가 그 정도로 벌어지면 여유로워진다.
선두권, 그중에서 1위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
가장 중요한 첫 경기를 잡기 위해 웰링턴이 나섰다.
지금 팀이 1위를 달리는 것처럼 지난 시즌 초반과 완벽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웰링턴.
-타악!
“아웃!”
“Broooo!”
서도하가 포함된 프렌즈의 끈질긴 상위타순을 단 공 15개로 잡아내고 더그아웃에 돌아왔다.
흠잡을 것 없는 완벽투를 선보인 웰링턴에 이어 이규영이 선두타자 안타를 치며 기분 좋게 시작했다.
박은성도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냈다.
이제 주자는 무사 1, 2루.
주말을 시작하는 금요일인 만큼 사직에 가득 들어찬 팬들의 함성이 들린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몇 번을 들어도 몸에 소름이 돋고 또 듣고 싶은 게 부산 팬들의 응원이다.
“수호야! 홈런 한 번 쌔리자! 함 칠 때 됐다!”
“김수호 파이팅! 홈런! 김수호!”
특히 이런 득점권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가면 별에 별소리가 다 들린다.
대부분 응원 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진 않지만 어떨 땐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끄아아악! 김수호 파이팅!”
아, 오늘도 저기 오셨네.
아무튼 어떤 방식이든 응원하는 팬들이 내게 원하는 건 같다.
홈런, 안타 또는 최소한의 진루타.
안타깝게도 이번 시즌은 지난 시즌만큼 홈런이 많이 안 나오고 있다.
이유야 많겠지만 내 생각엔 나와 승부를 피하는 투수들이 많아졌다.
이제 16경기를 했는데 16볼넷이다.
시즌 144볼넷 페이스.
거의 경기당 하나꼴로 볼넷을 얻지만, 홈런은 아직도 5개밖에 안 된다.
지난 돌핀스전에 한명훈을 상대로 쳤던 홈런이 마지막이니까··· 그 이후로 7경기 동안 홈런을 못 치고 있다.
급한 건 아닌데 지금처럼 컨디션이 좋을 때 좀 치고 싶은 생각이 있다.
“스트라이크!”
그 생각이 방망이에 묻어나왔는지 초구 떨어지는 유인구에 그대로 방망이가 헛돌았다.
만루가 수비가 쉽다곤 하지만 1회부터 만루를 채우고 싶어 하는 투수는 없다.
이 상황에서 유리한 건 나다.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기고 타석에 들어왔다.
상대 투수는 류재원.
프렌즈는 투수력으로 승부를 보는 팀이다.
그 팀의 3선발인 만큼 좋은 투수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경기, 지금 1회만큼은 허점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류재원은 주로 투심과 서클체인지업으로 우타자와 승부한다.
하지만 오늘 이규영과 박은성 타석에서 투심 제구가 안 되는 걸 보여줬다.
패스트볼과 변화구가 압도적인 구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한 가지 구종의 문제는 비단 그 구종만의 문제가 아니다.
잘 던지는 구종 역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그 구종이 체인지업 계열이라면 더더욱.
“볼!”
2구에 던진 투심이 완전히 빠지면서 포수 박희준이 겨우 포구에 성공했다.
주자들에게 멈추라는 사인을 보내고 다시 3구를 기다렸다.
“볼!”
잘 떨어진 서클체인지업이지만, 투심이 아닐 거라 확신하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결과는 듣다시피 볼.
이제 카운트가 유리해졌다.
수세에 몰린 상황, 이 상황에서 배터리가 선택할 방법은 많지 않다.
폭투의 위험을 감수하고 투심을 던지거나, 땅볼을 유도해내기 위해 서클체인지업을 믿고 던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 3의 변화구를 선택하거나.
내 선택은 세 번째였다.
좌투수인 류재원이 우타자를 상대로 그다지 구사율이 높지 않은 슬라이더.
-따아악!
슬라이더가 제대로 휘어지기 전, 그대로 몸쪽을 당겨친 타구가 왼쪽 담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사직 구장의 높은 담장에 걸리는가 싶더니 아슬아슬하게 펜스 위로 넘어간 공이 그대로 사람들의 사이로 사라졌다.
“와아아아악!”
응원가 소리보다 더 큰 함성을 들으며 오랜만에 베이스를 돌았다.
“수호야! 끄아아악! 해줄 줄 알았다!”
...홈런 한 번 더 치면 저 사람 실려 가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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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영이 마린스에 오기 전, 마린스 타선은 말 그대로 우타자 일색인 타선이었다.
이주학이 없던 시절엔 좌타자라곤 기껏해야 채지훈이 전부.
그나마 좌타자인 채지훈도 1루수 출장이 아닌 날에는 김민석과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지명타자로 출장하는 게 전부였다.
거기에 김수호가 등장하면서 좌투수들에겐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선이 완성됐다.
아무리 좌우 놀이라 해도 좌투수 입장에선 좌타자가 편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오늘 프렌즈의 선발 투수인 류재원은 좌·우 가리지 않고 잘 던지는 투수.
하지만 1회부터 홈런을 허용하며 최악의 출발을 맞이했다.
그나마 추가 실점은 최소화해서 4이닝 4실점, 투구 수는 벌써 80개를 넘겼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팀 타선은 상대 선발 투수에게 막혀 1득점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 내려가기엔 고작 시리즈의 첫 경기밖에 안 됐다.
“재원아. 준비해라.”
최소한 5이닝은 책임져야 했고, 책임질 수 있는 선수라는 걸 아는 프렌즈 감독도 류재원을 5회 말에 그대로 올렸다.
다시 마운드에 올라온 류재원이 첫 번째로 본 타자의 얼굴은 바로 1회 홈런의 주인공, 김수호였다.
이전 타석에선 볼넷을 골라 나가며 류재원의 투구 수를 갉아 먹는 데 숟가락을 보탰다.
어차피 뒤는 없는 상황.
류재원이 박희준의 사인에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오늘 류재원의 공이 별로라지만 김수호를 제외하고 그렇다 할 정타를 만들어낸 선수는 몇 없었다.
차라리 선두타자를 내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김수호는 피하려던 박희준이었지만, 류재원이 거절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자세를 잡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받고 싶은 공은 아니다.
하지만 투수가 저렇게 나오면 포수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류재원이 고집 끝에 던진 공은 김수호의 눈에 너무 익숙한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왔다.
-따아악!
공이 미트에 닿기도 전에 방망이에 맞은 공은 타구음이 귀에 잠깐 머무는 동안 사람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같은 승부, 같은 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올라간 점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아악! 수호야! 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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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린스 6 : 2 서울 프렌즈]
[김수호 드디어 홈런포 재가동! 류재원 상대로 2홈런 치면서 황인재를 재치며 홈런 단독 1위!]
[뜨거운 기세! 프렌즈까지 잡아낸 마린스, 초반부터 단독 1위 굳히나.]
[결승 홈런 김수호, ‘팬들의 함성, 들을 때마다 설레. 좋은 경기력으로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
[제대로 불붙은 피닉스 타선, 돌핀스 8대4로 제압하며 3연승 이어가.]
[계속되는 팬들의 감독 교체 요구. 돌핀스 프런트는 묵묵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