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야구에 100%는 없다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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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미신은 떼려야 뗄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최상위 선수들이 뛰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징크스와 미신을 믿는 건 너무 유명한 얘기다.
팀으로도, 선수 개인으로도 그런 미신을 믿긴 하지만 전 세계에 통용되는 미신이 있다.
국가와 인종, 실력까지 뛰어넘는 미신 중 가장 유명한 걸 꼽으라면 바로 기록을 달성 중인 선수에게 그 기록을 언급하지 말라는 걸 꼽을 수 있다.
특히 선발 투수가 퍼펙트게임이나 노히트노런을 기록 중이라면 더그아웃은 그 선수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꼭 그 미신이 아니더라도 선의에 건넨 한 마디가 기록을 망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최대한 조용히 있는 게 당연시 여겨질 정도였다.
거기에 퍼펙트게임은 투수만 잘해서 이룰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야수들 역시 실책 하나가 기록을 망칠 수도 있다는 부담감을 지닌 만큼 긴장한 상태다.
그나마 지난 시즌에 노히트노런과 퍼펙트게임을 경험했던 마린스 선수단이지만 그런데도 말로 할 수 없는 긴장감에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 더그아웃의 정적을 깬 말이 바로 김수호의 그 말이었다.
“다 너 때문이잖아.”
그 말은 조용한 더그아웃에 순식간에 퍼졌고 그 말을 들은 선수들은 처음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쟤가 벌써 미친 건가를 시작으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 이게 사실 꿈이었구나 등등 현실도피를 시전했다.
“나? 왜?”
그 와중에 당사자인 이호민의 반응이 이상했다.
왜냐고? 저게 지금 퍼펙트 중인 투수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모든 선수가 김수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김수호가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컨디션 안 좋아 보여서 신경 쓸까 봐 다들 조용히 하는 거지. 그쵸 선배?”
김수호의 눈이 근처에 앉은 김호기를 향했다.
김호기의 죄라면 김수호와 가까운 데 앉은 것, 그거밖에 없다.
이미 판은 엎어졌고, 꼼짝없이 공범이 되게 생겼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어. 그치. 호민아, 아프면 아프다고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선배들이 다 네 걱정했잖아.”
‘이게 맞아?’
‘저도 몰라요.’
김호기가 차마 이호민과 눈은 못 마주치고 김수호와 눈으로 대화했다.
그리고 숨죽인 채 이호민의 말을 기다렸다.
“아....”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리고 이호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구십 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몸 관리 잘하겠습니다!”
딱 3초, 3초간의 정적이 이어지고 상황을 대충 눈치 챈 선수들의 입이 하나 같이 쏟아졌다.
“괜찮아. 그래 남자면 자기 잘못 딱 인정하고 사과하고 할 거 하면 되지. 좋아!”
“마! 기죽지 마라! 오늘 마! 어, 마! 마!”
“그래, 호민아. 오늘 퍼페···.”
그 말이 들리자 순식간에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말의 주인공인 이규영이 핏기 없는 표정으로 침을 한 번 삼켰다.
“트하게 잘 던지고 있어! 외야로 공 오면 형이 다 잡아줄 테니까 자신 있게 던져. 오케이!?”
어떻게든 수습한 이규영이 이호민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고, 이호민이 웃으면서 말했다.
“넵!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전 정말 괜찮으니까 말씀 나누셔도 됩니다! 제 생각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더그아웃은 강제로 하고 싶지 않은 대화를 하게 됐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인공인 이호민은 그저 기분 좋다는 듯 김수호한테 조심스럽게 말했다.
“와, 나 이규영 선배랑 별로 안 친했는데 좀 많이 고맙네. 선배님 성격 진짜 좋은데?”
김수호는 그저 땀이 흥건한 손으로 이호민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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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날이 갠 것처럼 우리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겨우 수습한 더그아웃 사건 이후 7회 말이 됐다.
다행히 이호민은 아직 전광판을 못 봤다.
그라운드에 신경 못쓰게 옆에서 쉴 틈 없이 말을 건 게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할 말도 떨어졌다.
그나마 내 얘기를 들은 선배들이 마운드에서 이호민이 전광판 쪽으로 시선을 줄 때마다 호민이에게 말을 건 게 효과가 좋았다.
그렇게 7회 말도 삼자범퇴로 마무리.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너 화장실 안 가냐?”
“어. 이제 좀 괜찮은 듯?”
이젠 속이 괜찮아졌는지 이호민이 이닝이 끝났는데 더그아웃에 붙어있었다.
더그아웃에 있다 보면 언제 들킬지 모른다.
얼른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너 그러다 마운드에서 배 아프면 어쩌려고. 혹시 모르니까 한 번만 더 갔다 와.”
“아, 그럴까?”
그렇게 보내긴 했지만 아직 남은 이닝은 2이닝.
“수호야!”
이호민이 화장실로 가자 강기호가 급하게 나를 불렀다.
“호민이 공 어때? 괜찮아? 퍼펙트는 모르는 눈치고?”
“예. 아직 공 좋습니다. 퍼펙트도 모르고요.”
초반에 투구 수를 절약해서인지 구위도 좋고 제구도 괜찮았다.
“후우, 그래. 이제 2이닝 남았으니까 좀만 더 열심히 해보자.”
타자들이 추가점은 못 내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점수가 아니다.
퍼펙트 게임엔 1점이면 충분했다.
이제 돌핀스 타자들도 이젠 슬슬 똥줄이 탈 때가 됐다.
이미 1호 퍼펙트게임은 나왔지만 퍼펙트게임이 어디 흔한 기록인가?
KBO 50년 역사상 고작 한 번 나온 기록이다.
우리든, 돌핀스든 선수들이 대하는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주인공인 이호민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후, 갔다 오길 잘했다. 네 말대로 또 아프더라? 진짜 내가 그 고깃집 다신 가나 봐라.”
우리 속도 모르고 맘 편하게 화장실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머리를 세게 쥐어박고 싶었지만 참았다.
좀만 더 참자.
참고 참아서 딱 한 대만 때리는 거다.
“왜 그렇게 봐?”
“...아니다. 투아웃인데 글러브 챙겨. 잠깐 마운드에서 할 얘기 있어.”
“그래? 오케이.”
이런저런 변명을 대면서 겨우 전광판을 못 보게 하고 맞이한 8회 말.
문제가 발생했다.
4번 타자 김효준부터 시작한 타선이었지만 큰 고비였던 두 타자를 완벽하게 잡아냈다.
이걸로 남은 아웃카운트는 네 개.
6번 타자 최강민이 빠지고 대타가 들어왔다.
최강민은 정교한 안타보다는 장타력이 있는 선수.
그를 대신해 들어온 타자는 좌타자에 달리기가 빠른 선수였다.
즉, 어떻게든 기록을 깨보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이호민이 공을 낮춘 순간 타자는 그대로 자세를 낮추고 번트를 시도했다.
-딱!
“아웃!”
하지만 공이 뜨면서 그대로 내 미트 속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퍼펙트게임이나 노히트노런을 하는 중 번트를 대는 건 불문율 중의 불문율.
“우우우우!”
“우우우우우!”
엄청난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이호민을 바라보자 이호민이 고개를 돌린 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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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오늘 하루, 배 때문에 정신없긴 했지만 딱히 못 던졌다는 느낌은 받은 적 없었다.
원하는 대로 공이 들어갔고 항상 결과가 좋았던 느낌.
그리고 더그아웃이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던 것과 그 이후 김수호가 끊임없이 얘기를 걸었던 것.
선배들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잘한다고 박수와 응원을 해줬던 것.
결정적인 건 방금 들린 관중들의 야유소리였다.
고작 번트 시도를 했다고 야유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니, 그런 경우가 있긴 있다.
설마 싶은 마음에 전광판을 올려다본 이호민이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0 옆에 0 옆에 0 그리고 또다시 0.
온통 숫자 0밖에 없는 돌핀스의 오늘 성적을 보자 드디어 깨달았다.
‘나 퍼펙트 중이네?’
그제야 오늘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상념을 깬 건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봤냐?”
“...어.”
“들어가자. 아직 안 끝났어.”
김수호가 이호민을 데리고 더그아웃에 돌아왔다.
더그아웃은 다시 적막해졌고, 이호민의 곁엔 오직 김수호만 있었다.
사실 김수호도 지금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이호민이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줬다.
그리고 굳게 닫혔던 이호민의 입이 열렸다.
“야.”
“어, 말해.”
“나 진짜 퍼펙트 중이냐?”
“어. 너 오늘 존나 잘 던졌어.”
그 말에 이호민이 침을 한 번 삼키고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나 지금 존나 떨리는데 이게 맞냐?”
“나도 떨려.”
“후, 이게 지금···.”
차라리 전광판을 보지 말 걸.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잊고 있었던 로또를 확인했는데 숫자 5개까지 맞추고 이제 남은 숫자 발표만을 남겨둔 기분?
아무튼 표현하기 힘들었다.
“이제 세 타자 남은 거지?”
“어. 7, 8, 9. 아마 대타 나올 거야.”
돌핀스는 번트까지 대면서 어떻게든 퍼펙트를 깨고 점수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걸 생각하면 대타는 확정이라고 봐도 됐다.
“나, 후, 심장 터질 거 같아. 어떡하냐?”
“그래서 포기하려고?”
“...아니. 미쳤냐? 이걸 포기하게?”
“그럼 넌 하던 대로만 해.”
“하던 대로?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김수호가 미트를 펼치고 이호민 눈앞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호민의 시야에 붉은색 가죽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딱 여기만 보고 던져.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케이.”
이호민이 김수호가 건넨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선수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들! 한 이닝만 더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이제 더그아웃이 조용히 해봤자 더 이상 큰 의미 없다.
“오케이! 우리 호민이 하나 해줘야지!”
“드가자! 가자!”
이호민이 먼저 나서서 크게 외치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셋.
그걸 잡기 위해 마린스 선수들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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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핀스는 이호민이 마운드에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타를 기용했다.
번트 시도까지 한 이상 무조건 퍼펙트를 깨야 했다.
이미 비난은 피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기록마저 내준다면 돌핀스 팬들마저 등을 돌릴 것이다.
막중한 임무를 맡고 대타로 나온 전병민이 타석에 바짝 붙어섰다.
몸에 맞더라도 출루하겠다는 의지였지만, 초구 꽂히는 몸쪽 포심에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공 속도가 무슨···.’
9회에도 포심이 157km가 찍혔다.
다시 타석에 바짝 붙어 서려고 했지만 방금 본 공의 잔상 때문에 결국 한 걸음 물러난 채로 타석에 섰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전병민의 목을 옥죄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 헛스윙하며 원 아웃.
방망이와 공의 거리는 딱 그 한 걸음이었다.
다음 타자도 역시 대타가 나왔다.
하지만 이호민의 공은 더욱더 빨라졌다.
157km.
“스트라이크!”
158km.
“스트라이크!”
그리고 160km.
“스트라이크 아웃!”
퍼펙트 상황, 거기에 0-2 카운트를 잡고 곧바로 다시 포심을 던질 줄은 생각도 못 한 타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제 창원 구장은 말 그대로 조용했다.
마린스 팬들은 제발 경기가 끝나기를, 돌핀스 팬들은 경기에 지더라도 제발 1루를 밟기를 바라며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을 지켜봤다.
이제 단 하나 남은 아웃카운트.
타석엔 대타 고승혁.
“스트라이크!”
135km의 체인지업에 헛스윙.
“스트라이크!”
140km의 슬라이더에 다시 헛스윙.
그리고,
“스트라이크 아웃!”
몸쪽 높게 오는 161km의 포심으로 마지막 삼진을 잡아냈다.
유인구라기엔 너무 높고, 그냥 빠르기만 한 공이었지만 고승혁은 이 순간의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고승혁의 방망이가 돈 직후 이규영이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했다.
그리고 글러브도 내팽개친 채 김수호에게 달려갔다.
“수호야! 고맙다! 진짜 존나 고맙다!”
한 명의 유망주가 어엿한 투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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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린스 1 : 0 창원 돌핀스]
[누구도 생각 못했던 퍼펙트게임! 마린스, 한 번에 두 가지 대기록 수립!]
[퍼펙트게임과 개막 10연승,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이호민!]
[최대 구속 161km. 한국 야구의 미래가 마린스에 있다!]
[마지막 KKK! 과감한 승부, 그 볼 배합의 주인공은 김수호!]
[벌써 두 명의 투수와 퍼펙트, 김수호의 볼 배합은 뭐가 다른가.]
[이호민, ‘김수호를 믿고 던지다 보니 어느새 9회가 됐다. 마지막까지 그 믿음을 유지했을 뿐이다.’]
[김수호, ‘이호민이 오늘처럼만 던진다면 퍼펙트게임은 오늘만 있는 일이 아닐 것.’]
[이정훈 감독, ‘이호민은 허하준의 뒤를 이을 선수. 자랑스럽다.’]
[돌핀스 감독, 8회 기습 번트에 대해 언급, ‘1대0으로 지는 상황이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선수는 잘 못 없다.’]
[마린스 TV, 퍼펙트 순간 더그아웃 분위기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