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세대 교체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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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팬들의 최지용에 대한 평가는 본인이 이룩한 업적에 비해 박하기 그지없었다.
150KM를 넘기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위력적인 변화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메이저리그 도전에 실패했다.
그 이후 붙은 별명은 국내용 대투수.
이전에 국가대표에서 활약했던 건 까맣게 잊고, 최지용과 KBO리그를 싸잡아서 비하하는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 별명을 지은 사람이 오늘 경기를 보고 있다면 아마 그딴 별명을 지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6회가 끝날 때까지 95개의 공을 던지며 5피안타 2볼넷 1실점.
4회 초에 허용한 홈런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주자도 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호투를 펼치고 당당히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최지용! 최지용! 최지용!”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팬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멋진 호투에 대한 감사를 보냈다.
특히 직접 공을 받은 나로서는 완벽하지 않은 변화구로도 아웃카운트를 잡아낼 수있는지에 대한 교과서를 본 기분이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번 경기를 여러 번 돌려 보지 않을까?
물론 일본의 투수, 나카무라 준도 만만치 않았다.
최지용이 팔색조 투수의 정석이자 정수를 보여줬다면, 나카무라 준은 투 피치 투수의 정석을 보여줬으니까.
6회 말 공격이 시작됐고 타석엔 9번 타자 서도하.
3회 말 이규영의 내야 안타 이후 단 한 명도 출루에 성공하지 못했다.
투 피치 투수에겐 당연한 말이지만 볼 배합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가위바위보로 예를 들면, 투수가 바위와 보밖에 내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타자가 유리한 것 같지만, 투수의 바위가 보를 뚫어버리고, 보가 가위를 감싸버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트라이크 아웃!”
슬라이더 또는 포심을 던지는 단순한 볼 배합.
하지만 그런 볼 배합이 통한다는 건, 포심과 슬라이더의 위력이 여느 투수와 궤를 달리한다는 말이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초반엔 투구수를 빼놓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젠 슬슬 눈에 익는지 포심을 아예 못 건들지는 않았다.
서도하도 5개 공을 보며 삼진.
이어진 이규영은 초구부터 배트를 짧게 쥐고 작정하고 컨택 하기 시작했다.
결국 7구 슬라이더에 삼진당했지만, 점점 투구수가 쌓여갔다.
물론 호주전과 다르게 나카무라 준이 내려가도 만만한 투수가 올라오는 게 아니었다.
이 경기 이후 남은 경기는 단 한 경기뿐.
우리나 일본이나 다음 경기에 등판할 선발 투수를 제외하고 전부 대기 중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 선발 투수가 내려간 이상, 상대 선발도 내려야 했다.
“건우야, 나이스!”
“잘 쳤다!”
거기에 최건우가 결국 포심을 쳐내면서 3회 이후 첫 출루에 성공했다.
비록 김규완이 아웃당하면서 기세를 이어가진 못했지만, 투구수도 80개 가까이 빼놓은 상태.
1대1의 팽팽한 스코어를 유지한 채 7회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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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7회 초 일본의 공격입니다. 대한민국의 선발투수였던 최지용 선수가 내려가고 오상엽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벌써 오상엽 선수를 올린 건 일종의 승부수라고 봅니다.]
[아, 그런가요?]
[현재까지 대표팀에서 7회는 이신영이나 김영태 선수가 맡았거든요? 오상엽 선수는 보통 8회에 올라왔고요.]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근데 여기서 오상엽 카드를 꺼낸 건 아마 7회 말 공격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투수 교체가 7회 말 공격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거죠?]
[오늘 나카무라 준 선수를 상대로 장타를 뽑아낸 건 김수호 선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이신영 선수나 김영태 선수는 최필주 선수와 호흡을 맞췄죠. 반대로 오상엽 선수는 김수호 선수와 맞췄고요.]
[그 말씀은 7회 말에 김수호 선수의 장타를 기대해서 오상엽 선수를 올렸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김목근 감독은 강주호, 김민주, 황인재 선수 중 한 명이 출루하고, 김수호 선수의 장타를 기대하는 그런 그림을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확실히 김목근 감독님이 경기 전에 오늘 활약해줘야 하는 선수로 김수호 선수를 뽑기도 했죠.]
[7회 역전에 성공하면 김수호 선수 대신 최필주 선수를 넣으면서 안정감을 더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과연 오연석 해설위원 말씀대로 될지, 오상엽 선수 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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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오연석 말 어케 생각함?]
-난 솔직히 일리 있다고 보는데?
ㄴ 개소리
ㄴ 김수호 믿고 오상엽 올렸다고? 진짜 이 정도면 오연석 걍 꼴린스 팬 아니냐?
ㄴ 나도 꼴린스 팬인데 그건 개소리라고 봄
ㄴ 응~ 팩트는 지금까지 나카무라 공 제대로 친 타자는 김수호 밖에 없쥬?
ㄴ 6회 말 최건우 안타는 안 봤냐?
ㄴ 근데 애초에 수비도 김수호>>>>최필주 아님?
ㄴ 와, 최필주 은퇴할 때 됐네. 이제 20살이랑 수비 비교도 당하고 ㅋㅋㅋ
ㄴ 필주가 부상 때문에 블로킹을 못 하는 거지, 뜬공, 번트 처리 같은 건 비교가 안 됨
ㄴ 속보) 김수호 개 미친 수비
ㄴ 와 씨바 개돌았네?
ㄴ 최필주가 뭐? 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와 꼴린스가 부러운 건 또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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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초 일본의 선두 타자는 7번 타자 시마무네 신야.
한 방이 있는 타자는 아니지만, 좌타자에 빠른 발 때문에 1루에 나가면 골치 아픈 타자였다.
최지용 다음으로 올라온 오상엽과 사인을 교환하고 초구를 바깥쪽에 던졌다.
-딱
시마무네 신야와 동시에 공이 1루 라인을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다.
오상엽이 급하게 공을 잡으러 내려왔지만, 투수가 공을 잡아도 1루로 던질 각이 안 나왔다.
“마이!”
타구를 따라 뛰고 있는 내가 오상엽에게 소리치고 맨손으로 공을 잡았다.
그리고 달려가는 그대로 라인 안쪽에 미트를 대고 있는 강주호에게 던졌다.
급하게 런닝스로로 던진 터라 송구 후 자세가 무너지면서 그대로 다이빙했지만, 시선은 끝까지 강주호의 미트를 향했다.
“아웃!”
“수호야!”
아웃콜이 들리고 오상엽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땡큐. 수비 진짜 좋았다.”
“빨리 두 명 잡고 내려가죠?”
“반응 존나 싱겁네. 너 진짜 스무 살 맞지?”
손을 잡고 일어나자 무슨 신기한 동물을 본 것처럼 바라보길래 그냥 웃었다.
방금 아웃당한 신야가 나를 노려보면서 갔지만, 어차피 패배자의 눈빛이라 무시했다.
첫 고비를 무난하게 넘겼다.
이제 8, 9번 차례.
내 수비에 힘을 얻은 걸까?
대타로 나온 두 타자를 손쉽게 잡아내고 같이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삼자범퇴.
최지용이 호투하긴 했지만, 매 이닝 주자를 내보냈었다.
이걸로 미세하지만 흐름이 우리 쪽으로 바뀐 것 같다.
이제 완벽하게 흐름을 가져오기 위해 남은 건 마운드에 올라온 나카무라 준을 끌어 내리는 것뿐.
그걸 위해서 강주호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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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에이스.
공을 처음 잡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등 뒤에 새겨진 1번을 양보한 적이 없었다.
그건 국가대표도 마찬가지.
그리고 한국인들이 라이벌이라고 부르는 이 관계를 끊기 위해 결승이 아닌 4강전에 등판했다.
6이닝 12k 3피안타 1실점.
지금까지 오늘 경기에서 거둔 성적이었다.
단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역시 실점 앞에 숫자.
‘김수호, 이번 이닝에 네 타격 기회는 없을 거다.’
이번 경기에서 유일하게 던진 실투를 놓치지 않은 한 사람을 떠올리며 강주호를 쳐다봤다.
‘강주호, 일본의 원수.’
인프라도, 실력도, 리그도 모두 일본이 우월하다.
하지만 한국에 강주호라는 선수가 등장한 이후, 일본은 국제대회에서 단 한 번도 한국을 상대로 이긴 적이 없었다.
8년 전, 올림픽에서 이기긴 했지만, 그땐 강주호가 메이저리그로 갔던 상태였다.
나카무라 준은 그 경기들을 보면서 일본이 한국에 진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내가···. 없어서였다.”
“뭐라고?”
“나라는 에이스가 없어서 지금까지 일본이 한국을 이기지 못했던 거였다!”
혹시 부담을 느낄까 찾아온 포수였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맞아. 그러니까 저 한국인들에게 보여주자고. 일본의 진정한 에이스의 모습을!”
처음엔 어색했지만, 사춘기가 온 사촌 동생 놀아주는 것처럼 몇 번 맞춰주니 익숙해진 포수가 오그라드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그 말에 흡족해하던 나카무라 준이 포수가 돌아가는 동안 흥분을 가라앉혔다.
겉으로 볼 땐 쉽게 흥분하고, 멍청해 보이는 그가 에이스로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이유는 160km가 넘는 포심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공을 뿌릴 수 있는 능력.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게 그의 진짜 힘이었다.
라고 나카무라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강주호의 눈빛은 가라앉아있었다.
몸이 제 컨디션이 아니다.
이전 두 타석에선 160km의 빠른 공에 제대로 반응조차 못 했다.
메이저리그의 날고기는 투수들을 전부 상대해봤던 강주호로선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이 야속했다.
한때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그 강주호는 이제 없다.
하지만, 이미 이빨에 발톱까지 다 뽑혀버린 호랑이지만 몸뚱아리는 아직 움직인다.
심판의 사인이 떨어지자, 나카무라가 투구를 시작했다.
80개가 넘는 공을 던졌음에도 줄어들지 않은 구속.
-따악
하지만 오히려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강주호의 방망이에 맞았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늙긴 했네.’
전성기였으면 구장 자체를 넘겨버렸을 타이밍이었는데 고작 우익수 앞 안타라니.
비록 몸은 노쇠했고, 마음대로 안 따라줬지만, 그동안 쌓은 경험이 헛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카무라라는 젊고 좋은 투수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최대치였다.
남은 건 자신을 대신해 경기를 이어 나갈 후배들이 할 차례.
대주자로 교체돼서 돌아올 때, 관중석에 있는 양준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선수들의 환영을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선배님, 고생하셨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김수호의 별거 아닌 말에 콧등이 시큼했다.
“주자 불러들일 수 있지?”
“당연하죠.”
김수호가 자신 있게 말했다.
3회 이후 첫 선두 타자 출루.
반드시 살려야 할 기회였다.
타순도 좋았다.
5번 김민주와 6번 황인재.
하지만 김민주는 번트를 잘 대는 타자가 아니다.
벤치에서도 사인이 안 나왔다.
다만, 김민주 스스로 방망이를 눕혀 공에 갖다 댔다.
“파울!” “파울!”
하지만 리그에서 번트 한 번 제대로 대본 적 없는 선수가 160km의 공을 상대로 번트를 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두 번의 파울 이후 타자로서 최악의 카운트에 몰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0-2에서 던진 슬라이더에 그대로 헛스윙 삼진 아웃.
김민주가 미련이 남은 듯 잠깐 타석에 있다 돌아왔다.
“미안하다.”
김수호를 지나치면서 김민주가 중얼거렸다.
잠깐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더그아웃에 들어간 상황.
김수호가 대기타석에 서서 황인재를 바라봤다.
황인재는 오늘 나카무라 준을 상대로 제대로 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이크!” “볼!” “볼!” “스트라이크!” “볼!”
오늘 경기 첫 번째 나카무라 준의 풀카운트.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접전 끝에 삼진 아웃.
더그아웃으로 돌아올 때 본 황인재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방망이를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아마 이번 올림픽 첫 무안타 경기일 거다.
하지만 남 일 같지 않았다.
타석에 서자 나카무라가 김수호를 바라봤다.
‘뭐지?
김수호가 기 싸움인 줄 알고 눈을 마주쳤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김수호.’
한국의 미래라던 6번 타자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비록 일본의 원수, 강주호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이제 나카무라의 머릿속엔 오직 이전의 복수만이 가득 찼다.
‘역시 삼진이 좋겠군.’
결과를 정했으니 이제 실행할 차례.
‘내 올림픽 마지막 타자가 된 걸 축하한다. 김수호.’
올림픽 투구수 제한으로 김수호가 마지막 타자가 됐다.
다행인 건 김수호를 상대로 던질 수 있는 투구수는 무제한이었다.
‘아니, 딱 3개면 충분하다.’
초구. 바깥쪽 낮은 포심.
“스트라이크!”
2구.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압도한 볼카운트.
이전 타석, 성급하게 승부하는 바람에 장타를 허용했다.
하지만 그 기억이 3구에 승부를 포기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제3구. 몸쪽 낮은 포심.
공을 던진 순간, 나카무라는 곧 들릴 심판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하지만.
-따아악!
“내가, 에이스가 아니었나.”
분명 완벽한 공이였다.
손을 떠나는 순간, 확신했다.
그동안 했던 모든 노력이 바로 이 순간을 위했던 거라고 느꼈을 만큼 완벽한 공이었다.
하지만 그의 귀에 들린 건 심판의 아웃콜이 아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타구음이었다.
곧, 그의 시야에 김수호가 홈을 밟는 게 보였다.
“고생했다.”
그리고 감독의 말과 함께, 나카무라의 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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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으아아아악!
마지막으로 내 쪽으로 굴러온 공을 잡고 1루 베이스를 밟자, 더그아웃에서 선배들이 굉음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이규영은 곧바로 대자로 쓰러졌다.
스코어 3대2.
8회부터 강주호가 빠진 자리에 1루수로 들어갔다.
9회 김형주가 홈런을 하나 맞았지만, 결국 3대2로 승리를 거뒀다.
“김수호! 빨리 와!”
우오준이 황인재와 최건우를 잡고 내게 외쳤다.
“자, 하나 둘 셋하면 하는 거다!”
내야 세레모니까지 마치고 나자 갑자기 등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수호야! 사랑한다!”
이규영이 그새 뛰어와서 달려들었다.
그 외에도 다른 선수들과 같이 기쁨을 공유했다.
그러던 와중, 저 멀리 나카무라가 씁쓸한 얼굴을 하는 게 보였다.
아마 우리가 졌다면 저 꼴이었겠지.
그때, 갑자기 나카무라가 고개를 드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어느 정도 가까이 왔을 때.
[김수호! 메이저리그다! 거기서 진짜 승부를 겨루자!]
그러더니 사라졌다.
“뭐라는 거냐?”
“저 일본어 몰라요.”
마지막에 뭐라 했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