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미신을 이겨내는 법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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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는 다양한 미신이 있다.
작게는 선수들마다 가지고 있는 징크스나 루틴 같은 것들.
크게는 메이저리그의 염소, 밤비노, 블랙삭스의 저주 등.
이들의 공통점은 우승이든, 성적 하락이든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 거였다.
경기장에선 터프한 덩치들이 고작 미신이나 믿는 게 한심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얼마나 안 풀리면 이런 것까지 할까.
나는 아직 루틴 같은 건 없지만, 마린스는 이런 저주 비슷한 것이 있다.
웰시코기와 경기해도 3번 중 한 번은 지는 팀이라는 팬들의 비꼼에서 시작한 저주.
일명 웰시코기 데이.
2승으로 위닝 시리즈를 확정지어도 스윕은 못하는 마린스를 비꼬는 이 말은 저주처럼 항상 마린스를 따라다녔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있던 말이니, 이 팀이 언제부터 못 했는지 짐작이 안 된다.
[내일 웰시코기 데이 실화?]
저번주 승승패 승승패
이번주 승승x
내일도 지겠네 ㅋㅋㅋㅋ
ㄴ 그래도 선발이 하슨데 해주지 않을까?
ㄴ 깔끔하게 전반기 10승 채우고 가자!
ㄴ 제발 스윕 한 번만 해보자....
ㄴ 운빨 투수 vs 웰시코기 데이 ㅋㅋㅋㅋㅋ 꿀잼일 듯
ㄴ 그래도 위닝이 어디냐. 난 만족함 ㅇㅇ
ㄴ 내일은 걍 안 볼란다
sns를 보자 어김없이 팬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사실 선수들도 이 말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당장 저번 주에 있던 두 번의 스윕 기회를 살리지 못하기도 했고.
그래서일까? 어쩐지 다들 몸이 무거워 보였다.
“킴! 킴!”
날 급하게 찾는 하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그래?”
“꿈에서 레타쿠가 갈색의 거대한 털복숭이 엉덩이에 깔렸어! 네 도움이 필요해!”
“뭐?”
“이런 꿈은 처음이야. 레타쿠는 괜찮겠지?”
... 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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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경기 전 하스는 진정했고, 경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딱히 마운드 위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이든 침착하게 공을 던지는 모습은 여전했고, 결과는 6이닝 3실점.
하지만 타선이 상대 선발을 공략하지 못했고, 이후에 불펜이 추가로 실점하면서 결국 6대2로 패배했다.
나도 안타만 하나 쳤을 뿐, 타점은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홈런 3개와 타율 0.381, 장타율은 무려 0.792가 찍혔다.
도루저지도 5개 중 4개를 잡아냈다.
물론 표본이 30타석, 100이닝이 안 될 정도로 큰 의미는 없는 수치였다.
그래도 저걸 보면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아마 나만 기분 좋은 게 아닐 거다.
가장 기뻐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팬들.
내가 콜업 되기 전 가장 타율이 높은 포수가 2할 1푼이었나?
덕분에 오늘도 패배했지만, 경기가 끝나고 기다리는 팬들에게 싸인을 해주고 버스에 올라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자, 버스가 서서히 출발했다.
이제 수원을 떠나 광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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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울프즈와 경기는 사실상 총력전이다.
이번 3연전이 끝나면 거의 3주 동안 긴 휴식이 있는 만큼 로스터에 변화가 있었다.
외국인 투수 2명이 2군으로 내려가고 다른 선수 두 명이 1군에 왔다.
웰릭스와 하스는 1군에 동행하긴 하지만 3연전 동안 마운드에 오를 일이 없다.
오랜만에 보는 2군 선수들이 반갑긴 했지만,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
감독님도 생각이 똑같은지 선발라인업에 변화는 하나밖에 없었다.
멍청한 얼굴로 로스터 종이를 뚫어져라 보는 이주학한테 다가갔다.
“울려고?”
“안 울었거든!”
물기가 촉촉한 목소리로 부정해봤자 신용이 안 간다.
오늘 이주학은 9번 타자 겸 유격수로 출전한다.
계속 출장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직전 경기 후반에 교체 출전해 안정된 수비를 보여준 게 좋게 보였나 보다.
“호민아.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지?”
“그치. 좋아하는 거 보니까 귀엽네.”
“야, 야! 거기 서!”
이주학이 발끈하자 이호민과 함께 도망쳤다.
발이 워낙 빨라서 얼마 안 가 잡혀서 한 대씩 맞았지만, 이걸로 긴장이 좀 풀렸다면 만족한다.
오늘 선발인 김호기는 주로 땅볼을 유도해 잡는 걸 좋아하는 사이드암 투수.
그런 만큼 내야수, 특히 유격수의 수비가 중요했다.
만약 오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휴식기가 지나도 계속 1군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반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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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이하게도 양 팀 선발 투수가 전부 사이드암 투수였다.
같은 사이드암이었지만 성향은 조금 달랐다.
김호기는 투심과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포크 등 다양한 변화구를 섞으면서 맞혀 잡는 투구를 한다.
그에 반해 상대 선발 우민준은 150km 가까이 되는 포심을 중심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다.
사이드암이 던지는 150km의 속구는 분명 위력적이다.
하지만 그런 투수가 4선발이라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
“볼!”
1번 타자 박은성을 볼넷으로 내보내고 다음 최치호에게 또다시 볼.
아무리 빠른 공을 던져봤자, 존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렇게 보면 포수는 참 어이없는 포지션이다.
밤새워서 상대방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고 경기 전까지 되새겨도 결국 투수가 못 던지면 의미가 없는 정보가 돼버린다.
결국 6구도 볼을 던지자 포수가 급하게 마운드로 향했다.
“답답하지?”
“동업자로서 아주 조금요. 당연히 기분 좋죠.”
강기호가 내 옆에 앉았다.
“코치님은 저럴 때 어떻게 하셨어요?”
“나? 아는 타자가 들어오면 제발 부탁이니까 방망이 한 번 휘둘러 달라고 했지.”
“그러면 휘둘러 줘요?”
“아니, 절대.”
강기호의 말처럼 최치호는 방망이를 내지 않았고, 결국 3-1에서 볼넷을 골라내면서 출루했다.
그리고 그 다음 타자 오준혁에게 역시 초구 볼.
그러자 울프즈 더그아웃이 분주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제 고작 3연전의 첫 경기.
그것도 1회부터 투수를 교체한다면 모든 게 꼬여버린다.
“투수 교체할까요?”
“글쎄.”
당장 교체는 못 하겠지만, 뭐가 됐든 우리로선 좋은 현상이다.
오준혁은 결국 방망이 한 번 내지 않고 볼넷을 얻어냈다.
그리고 타석엔 강주호.
“강~ 주호! 강~ 주호! 강! 주! 호!”
응원단은 안 왔지만, 생각보다 많은 팬이 찾아와 강주호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초구.
-따아악!!!
시원한 소리와 함께 공은 가운데 담장을 훌쩍 넘겼다.
투수의 표정을 보니, 오늘은 쉽게 가겠네.
내 예상대로 4점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잭 미켈과 김민석 역시 연신 방망이를 휘둘렀고, 무사 주자 2, 3루 상황에 타석에 들어섰다.
내가 타석에 들어서자 울프즈 더그아웃에서 투수코치가 올라갔다.
결국 최대한 끌어보려 했지만, 연속 3안타 이후 완전히 멘탈이 나간 듯한 투수를 유지하는 건 이 경기를 버리겠다는 뜻이다.
선발 투수의 정보가 의미 없어지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올라온 투수의 몸 상태가 온전할 리 없다.
그렇게 타격 자세를 잡고 올라온 투수의 정보를 떠올렸다.
상대 투수 박지훈은 2군에서 몇 번 만났던 투수다.
아마 상대 전적이 꽤 괜찮은 걸로 기억한다.
‘1루가 비어있긴 하지만 승부를 피할까?’
아직 1회, 심지어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은 상황.
코너에 몰린 건 내가 아니라 상대 배터리였다.
“볼!”
초구는 그냥 흘려보냈다.
볼카운트를 하나 손해 보더라도 상대 배터리의 의중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으니 손해라곤 생각 안 했다.
심지어 볼까지 얻었으니 상황은 내 편이었다.
다음 2구 역시 볼이었다.
이로써 완벽한 내 카운트.
굳은 표정의 투수가 고개를 계속 흔들다 결국 결심했는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무슨 공을 던지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한 가운데로 날아오는 공에 시선을 집중하고 그대로 퍼 올렸다.
어, 근데 저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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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 선수의 타구가! 담장!!! 넘어갑니다!]
[사실 저는 거르는 게 어떨까 했거든요. 이미 카운트가 몰린 상황에서 최근 기세가 좋은 김수호 선수를 상대로 한 가운데 포심은 너무 무모했어요.]
[아, 지금 김수호 선수의 타구가 광주 구장의 홈런존을 때렸군요. 이야, 저기에 타구를 보낸 선수는 광주 울프즈 모기업에서 가전 세트를 보상으로 주기로 했습니다.]
[김수호 선수 효자네요.]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아무튼 김수호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반면에 울프즈 입장에선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벌써 7실점이거든요? 오늘 경기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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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9점이나 내주면 사실 그 경기는 포기하는 게 맞다.
내 홈런 이후 이준은 아웃됐지만, 이주학의 내야 안타로 다시 1번 타자에게 타순이 돌아갔고, 기어이 2점을 더 내면서 완벽하게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이주학이 득점을 기록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올 때 바보 같은 웃음 짓는 걸 찍어놨어야 했는데.
김호기도 넉넉한 점수에 주자가 나가든 말든 본인의 투구에 집중하면서 5이닝 2실점.
나도 이후 희생 플라이를 치면서 추가 타점을 올렸다.
나는 7회가 끝나고 교체됐고, 9회 말 15대 4라는 스코어를 등에 업은 채로 이재익과 오늘 1군에 올라온 차호준이 배터리를 이뤘다.
11점 차이라는 점수 차이는 처음 1군을 올라온 투수를 시험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긴장했는지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그냥 가운데만 꽂아도 11실점은 못할 거 같은데.
이후 1실점 하긴 했지만 본인 손으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매일 오늘처럼 10득점씩 하면 좋을 텐데.
경기가 끝나고 부모님에게 가전 세트를 타냈다는 연락을 드렸다.
어쩐지 아들이 홈런 쳤을 때보다 더 업된 엄마의 목소리에 서운했지만, 어쨌든 이것도 홈런으로 타낸 거니 내 홈런에 기뻐하는 거 아닐까?
“김수호!”
“아 씨. 깜짝이야.”
“흐흐흐. 이거 봤냐?”
그때 갑자기 이주학이 나타나선 아까 그 바보 같은 웃음으로 내게 무언갈 보여줬다.
“뭔데.”
[오늘 유격수 ㄱㅊ더라]
ㄴ ㅇㅇ 수비도 좋고 좌타에 발도 빠르던데.
ㄴ 난 얘처럼 근성 있는 애가 좋음.
ㄴ 작년 드랲 진짜 잘했네.
ㄴ ㄹㅇ 1, 2, 3라가 다 1군 데뷔했음
ㄴ 오. 허하준 박은성 김호기처럼 되는 건가?
이주학이 보여준 건 마린스 갤러리에서 굳이 굳이 찾은 본인에 관한 글이었다.
근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봤냐?”
“어.”
“어때?”
“뭐가.”
“너는 뭐 할 말 없냐?”
아, 설마?
“그래. 너 오늘 잘했어. 됐냐?”
“흐흐흐. 그렇지. 앞으로 마린스의 20년을 책임질 센터라인으로서 잘 해보자. 나 먼저 간다!”
나도 스무 살이지만 쟨 진짜 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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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즈와 2차전 경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겼다.
이기긴 했는데···.
“후....”
“하....”
내 방에 와서 양옆에서 미친 듯이 한숨을 내 쉬는 두 놈 때문에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다.
오늘 경기, 원래 5선발이었던 박지호 대신 이호민이 선발 등판했다.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고, 최근 2경기 연속 박지호가 완전히 무너져서 그때부터 얘기가 됐던 거였다.
이호민이 맡은 이닝은 최대 3이닝.
2회까진 어찌저찌 잘 막아냈는데, 3회 다시 만난 상위 타선에 그대로 무너졌다.
결국 2와 1/3이닝 4실점.
이호민은 그렇다 치고, 어제까지만 해도 바보처럼 웃고 다니던 이주학은 왜 이러느냐.
오늘은 선발 출장을 못 했다.
어제는 상대 투수가 우투 사이드암이라 좌타인 이주학을 기용한 거였지만, 오늘은 우완 쓰리쿼터 투수가 등판했다.
한 경기 만에 벤치로 돌아온 이주학이 경기 중에는 티를 안 냈지만, 많이 아쉬운 것 같다.
이호민도 그렇고.
물론 나는 선발 출장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3타점을 기록했다.
“계속 내 방에서 이러고 있을 거야?”
“넌 고정 선발이니까 벤치따리인 내 마음 이해 못하지?”
“넌 오늘 3타점 올렸으니까 4실점 한 내 마음 이해 못하지?”
“에휴. 됐다. 쉬고 있어. 마실 거 좀 사 올게.”
두 달 전만 해도 내가 저런 포지션이었는데, 사람 일은 진짜 모른다.
아무튼 두 놈을 챙겨주러 편의점에 왔는데 허하준과 김호기, 그리고 박은성을 만났다.
“어, 수호야.”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세 명의 장바구니엔 무언가 잔뜩 담겨있었다.
“아, 이거? 내일 하준이 등판하고 바로 국대 가잖아. 그거 때문에 오늘 짧게 쫑파티나 하려고.”
김호기의 말에 허하준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나와 비슷한 상황에 동질감을 느껴졌다.
“그래서 뭐 사려고? 가져와. 같이 계산하게.”
“아, 저도 방에 일행이 있어서 좀 많이 사야 할 거 같아요. 먼저 가세요.”
“왜? 누군데?”
박은성의 물음에 짧게 설명을 해줬다.
“그래? 너네도 동기끼리 사이좋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거 다 들고 네 방가자. 어차피 우리가 다 먹기엔 많았어. 음료수만 몇 개 더 사.”
“아뇨. 선배님, 괜찮습니다.”
“수호야. 네가 뭘 착각하고 있는데,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자 빨리 골라. 빨리 놀고 자게.”
마지막 찬스로 허하준을 바라봤지만 외면당했다.
결국 두 명을 떼어놓으려다가 세 명이 추가된 채로 내 방에 도착했다.
뭐, 당장 허하준이 내일 선발이기도 했고, 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 간단하게 먹고 헤어졌다.
그래도 선배들 덕분에 이호민이랑 이주학의 표정이 나아졌으니 도움이 됐다.
허하준이 가기 전 궁금한 거를 물어봤다.
“선배도 웰시코기 데이 아세요?”
“어. 그걸 모르는 마린스 선수도 있냐?”
“그건 그렇죠.”
“왜? 신경 쓰여?”
“그냥, 뭔가 찜찜해서요.”
“그래? 내가 그거 깨는 법 알려줄까?”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얼마나 쉬운 방법인데.”
미심쩍은 눈으로 허하준을 바라봤지만, 허하준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뭔데요?”
결국 먼저 백기를 들었다.
“잘 들어.”
“예.”
“내가 내일 완봉을 하고 네가 홈런을 쳐. 그럼 끝. 어때,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