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러지 말라고 (7)
왜 네가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지 억울하지 않아?
왜 팔자에도 없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화가 나진 않고?
억누르지 마. 쏟아 내.
너의 분노는 정당해.
* * *
“하아, 하아.”
인퀴지터는 긴장이 살짝 풀리자마자 몰려오는 격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몰아쉬는 숨은 하얗게 문대졌던 시야 가장자리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중이다.
“된 건가……?”
그녀는 땀을 닦으며 멀리 나가떨어진 이를 가만 노려보았다.
해치운 걸까. 악마기사의 몸에서 악마가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는 게 맞나.
인퀴지터의 녹색 눈이 연신 쓰러진 이를 살폈다.
복부에 움푹 파인 상처를 얻었을 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후.”
그녀는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친 곳은 하나도 없는데,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으윽.”
신성력을 사용하고 남는 부작용은 그 어떤 것으로도 고칠 수 없다.
하므로 그녀는 아픔을 감내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탁탁탁.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습니까요?!”
오면서 하는 말이란 게 살아 있느냐는 질문이라니. 그럼 당연히 살아 있지, 죽어 있길 바라기라도 하는 건가? 하여간 저 도적은 도통 좋게 봐 줄 수가 없다.
인퀴지터는 쓸데없는 투정과 함께 팔다리를 축 늘였다.
교단의 가르침에 따라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역이었다.
“신께서 노하시지 않기를…….”
최소한 드러눕지 않았으니, 부디 그분께서 굽어살피기를 빌 뿐이다.
“쓰읍, 살아 있는 거 맞죠? 왜 대답 안 해요.”
“…시끄럽다.”
“잘 살아 있네. 근데 머리는 또 왜 그 모양입니까? 쥐가 파먹기라도 했습니까?”
도적의 지적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졌다. 귀는 온전히 잘려 나간 게 아닌지라 어떻게 다시 붙었지만, 그 근처 머리카락은 손가락 한 마디만도 못하게 짧아진 채였다.
“잘렸다.”
인퀴지터는 좌우 달라진 머리 길이에 조금 아쉬워하다가, 귀라도 멀쩡한 게 어디냐며 마음을 다잡았다. 머리카락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랄 것에 불과했다.
“…꼴이 아주 지저분하기 짝이 없네.”
싸움이 거칠면 옷이 찢어지고 망가지기 마련이다. 한데 그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다니. 역시 멍청이다.
그녀는 뚱하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도적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추가로 캐묻진 않았다.
대신 어깨에 무언가가 얹혔다. 도적 녀석이 항상 두르고 다니는, 후드 달린 숄이었다.
인퀴지터의 시선이 도적에게로 향했다.
“뭐요, 왜요.”
밤이라서 퍽 서늘하긴 하지만 곧 동이 틀 것이다. 애시당초 이 정도 쌀쌀함은 그녀에게 추위도 되지 못하고.
하여 그녀는 눈을 끔뻑거렸다.
“필요 없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요. 아니면 뭐, 도적 새끼 거라 싫습니까?”
“그건 아니다만.”
안 추운데. 인퀴지터는 녹색 후드를 매만지다가 이내 돌려주길 포기했다. 저 입만 산 놈을 상대하며 논쟁하기엔 너무 지쳤다.
“사람들은 대피시키고 오는 건가?”
대신 그녀는 가장 궁금한 것만 물었다. 저 뺀질이가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답이 나오긴 하지만, 제대로 된 말로 확인받고 싶었다.
“하, 당연하죠.”
역시 그런가.
그녀는 사람들이 대피했다는 말에 안도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만큼 남았다 해도 가장 큰 위협들이 제거됐다는 소식만큼은 반길 수밖에 없다.
“본대도 도착했습니다. 오는 걸 봤어요.”
“그거 좋은 이야기군.”
본대가 왔다면 도시에 남은 악마들을 정리할 수 있을 거다. 더불어 사람들도 제대로 된 장소로 옮길 수 있을 테고, 또…….
“악마기사는…….”
“저곳에 있다. 그렇지만 다가가지 마라.”
악마기사를 제대로 봉인할 수 있을 거다.
“…악마는, 물러간 겁니까?”
“글쎄.”
그녀도 그러길 바란다. 그렇지만 악마기사 체내의 마기가 도통 줄어들지를 않는 게 느껴진다. 당장은 기절했지만, 다시 깨어났을 때 제정신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돌아오실 거다.”
그러나 그녀는 믿었다. 다음 깨어날 때가 아니라면 그다음이라도, 혹은 그 다다음이라도 본래의 악마기사가 깨어날 것임을.
“일어나야겠군.”
숨은 돌릴 만큼 돌렸다. 그녀는 절로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를 삼키며 억지로 몸을 세웠다.
“좀 더 쉬지 그럽니까.”
“안 된다. 봉인을 걸어야 해.”
악마기사가 깨어나기 전에 간단한 봉인이라도 걸어야 한다. 악마기사가 속에서 저항해 준 덕에 큰 피해 없이 제압하긴 했지만, 다음에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지 않나.
악마기사가 상처 악화로 죽는 게 보고 싶지 않다면 복부의 상처도 치료해야 하고.
“봉인이요?”
“만일을 대비한 거다.”
“그건, 알지만. 그럼 기사 나리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녀는 뺀질이가 왜 이렇게 당황하나 의아해졌다.
“그땐 봉인을 풀면 된다만?”
“…풀 수 있는 겁니까?”
“세상에 못 푸는 봉인은 없다.”
“봉인은… 막 오래 걸리고 거창한 거 아닙니까? 절대 못 깨어나게 막는 거?”
“그런 대규모 봉인도 있긴 하지만, 나는 할 줄 모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간단한 구속 봉인뿐이었다. 신성력의 사슬로 몸을 꽁꽁 묶어 움직임을 제한하는 봉인 말이다.
“애초에 하지도 않을 거고.”
무엇보다 대규모 봉인은 악마뿐 아니라 악마기사까지 깨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걸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악마기사를 믿으니까.
“다행이긴 한데… 김새네.”
그렇지만 지금 오는 교단의 견해는 아마 다르겠지.
인퀴지터는 그 미래를 삼켰다. 악마기사는 언제나처럼 멀쩡히 깨어날 것이다. 그럴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게 술식입니까?”
“그래.”
“…어깨 좀 빌려줄까요?”
“…그래.”
그녀는 비틀거리며 식을 적다가, 도적의 베푼 배려를 받아들였다. 자존심 상했지만 고집 부리기엔 몸이 도저히 좋지 않았다. 온몸에 새겨진 아릿한 고통에 팔다리가 괜히 후들거렸다.
도적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녀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으리라.
“술식이 뭐 이리 커…….”
그렇게 한 땀 한 땀 악마기사 주위에 둥근 식을 어느 정도 적어 나갔을까.
“이거 한 줄로 끝나는 거 아닙니까?”
“봉인식은 보통 두 줄부터 시작이다.”
“그거 귀찮…… 피해요!”
겨우 한 줄을 다 채웠을 때, 도적이 그녀의 몸을 옆으로 밀쳤다. 왜 난리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콰앙!
새까만 기운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
엄습하는 불안감은 상황 파악을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절정에 달했으니.
그녀는 일어선 악마기사를 볼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얼굴 반쪽은 무언가에 잠식된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다.
마기로 인해 형체를 가진 살의가 그의 오른쪽 눈을 삼킨 채 안와에서 흘러내렸다.
독하디독한 마기가 그 육신 전체에서 준동했다.
“젠장, 이거 망한 거 맞죠?”
한번 풀렸던 긴장은 이미 온몸을 천근만근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몸이 무겁다고 싸움을 피할 수 있을 리가.
그녀는 이를 악물고 메이스를 다잡았다. 무기를 바닥에 내버려 두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여긴 내가 맡는다, 도망가라!”
“빌어먹을!”
인퀴지터는 신께 기도를 올렸다. 칼날에 찔린 상처를 단번에 낫게 할 수 있는 양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그 대가는 운동을 과하게 한 다음 날에 올 만한 근육통이다.
“큿!”
그러나 그마저도 지금의 그녀에겐 부담이다. 잇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딱.
안타깝게도 그런 그녀의 사정을 상대는 알아주지 않았다. 악마기사의 왼손이 퉁겨지자 그의 몸을 맴돌던 마기들이 몇 개의 무리로 뭉치기 시작했다.
길쭉하니 끝만 날카로운 마기의 덩어리는 꼭 창을 연상시킨다.
“……?”
저런 게, 가능한가? 신체나 무기에 깃든 기운을 사출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기운을 뭉쳐 사출하는 건 마법의 영역이 아닌가?
인퀴지터는 얄팍한 의문을 가졌다. 곧 스러질 의문이었다.
창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파바바박.
무거운 다리로 빠르게 바닥을 굴렀다. 창이 그녀를 따라 계속 대지에 내려꽂혔다.
스스스.
인퀴지터는 악마기사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옆으로 옆으로 달렸다. 그러던 순간 그녀의 시야 들어온 건 어둠 속을 가르고 흐르는 무언가라.
그건 검은 기류였다. 아니, 붉은 핏물이었다. 그녀와 악마기사가 싸우는 동안 기울어지고 들썩이며 철편의 구덩이가 쏟아 버린 핏물.
“저 무슨!”
악마기사의 왼손 앞에 모여든 피가 천천히 하나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검이었다. 지독하게도 농밀한 부정으로 이뤄진 검.
기존에 들고 있던 투헨더는 더욱 가늘어지고 살짝 짧아져, 한 손으로 들 만한 크기로 변하고 있다.
“신이시여, 제게 다시 한번 싸울 수 있는 힘을.”
신께서 신성력을 더 내려 주실까. 그보다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저것을 정화할 수 있을까.
인퀴지터는 약한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이 역경조차 넘지 못한다면 마왕은 어찌 잡겠나.
주륵.
코피가 다시 흘렀다. 눈에서도 무언가가 흐르는 기분이 든다. 괜찮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해룡을 잡을 때도 이러했다.
그러니, 그때 성공했던 것처럼 이번 또한 그녀는 이겨 낼 것이다.
분명 이겨 낼…….
서걱!
그녀는 황급히 휘둘러진 투헨더를 피해 옆으로 굴렀다. 하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악마기사의 검로는 그녀의 어깨 살점을 도려내 갔다.
도적이 빌려준 옷자락 역시 형편없이 찢어졌다.
“……!”
어째서 맞았는가. 그녀는 파악도 못 한 채 눈을 부릅떴다. 다시 한번 깨어난 악마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왜 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악마기사가 검을 휘두르거든, 반의 반 박자 늦게 휘두른 검격과 같은 궤적으로, 그러나 30cm가량 떨어진 허공에 또 하나의 궤적이 새겨졌다.
검면과 수평이 되게 위아래로 두 개의 공격이 추가로 들어오는 것이다.
저것을 피하려면 조금 더 멀리 뛰어야 한다. 그녀는 그것을 깨달았다.
“크윽!”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다 피할 수 있다면 누구나 싸움의 달인이 될 수 있으리라.
그녀의 팔뚝에 또 하나의 자상이 새겨졌다.
“악마기사!”
인내한다. 그녀는 신성력에 정화되어 사라지는 코피와 피눈물의 존재를 느끼며 악마기사에게 접근했다.
허공에 생성된 창이 날아오며 그녀를 방해했다.
그사이 악마기사는 미끄러지듯 저 뒤로 물러나 혈검을 아래서부터 위로 긁었다.
마기가 대지를 가르며 부채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불꽃과 같았다.
“……!”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녀는 신성력을 앞세웠다. 단단한 빛의 막이 검은 기운에 두들겨 맞았다. 그 가운데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양팔을 교차한 상태로 검 휘두를 준비를 하는 악마기사다.
인퀴지터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앞을 향해 굴렀다. 대지에 여전히 옮겨붙어 타오르는 마기가 망토를 태우고 피부를 짓이겼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
악마기사는 그녀가 있던 자리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쏘아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뻗어 나간 검격이 지반을 쪼개다 못해 그 너머의 성마저 잘랐다.
잘려 나간 틈새로 성 너머의 광경이 언뜻 비치는 것 같았다. 가공할 무력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구른 덕에 악마기사의 뒤편을 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신성력을 있는 대로 처부은 메이스를 휘둘렀다.
허리를 뒤튼 사내가 혈검으로 메이스를 막아 서고, 투헨더로 그녀의 복부를 찌르려 들었다.
촤악!
직선으로 쏘아진 검으로부터 나선형의 마기가 쏘아지며 일직선상의 모든 걸 꿰뚫었다. 검날에 직격당하는 건 피했으나, 마기의 소용돌이 범위를 벗어나진 못한 인퀴지터의 옆구리에 커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억지로 뜯어낸 듯 너덜거리는 살점과 찢어진 근육이 피를 토해 냈다.
“윽.”
회복은 가능하다고 하나, 한층 가중되는 부담은 어쩔 수 없다. 그녀는 휘청이려는 몸을 다잡으며 바닥을 굴렀다.
망할, 대악마답게 마기가 넘쳐도는지 상대는 약간의 텀도 주지 않고 대각선으로 혈검을 휘둘렀다.
대지가 갈라지며 갈라진 틈새 사이로 마기가 솟구쳤다. 오래도록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 그 궤적을 따라 남았다.
공격할 틈이란 게 없다. 인퀴지터의 입술이 끝내 이에 짓눌렸다.
“흐아아압!”
그러나 틈이 없다면, 직접 만들면 그만이 아닌가.
그녀는 불꽃 사이로 쏘아진 일직선상의 찌르기 공격을 겨우 피한 후 메이스를 잡았다. 지반을 흔들어 균형을 잃게 만들 요량이었다.
캉!
“……!”
하지만 너무 빠르다.
그녀는 메이스로 땅을 후려치기도 전에 짓쳐든 공격을 쳐 냈다. 일점에 집중된 두 개의 검이 메이스에 흠집을 내었다.
별의 금속과 세례받은 철로만 제련된 메이스에 처음으로 새겨진 흔적이었다.
“무슨─!”
그리고 메이스를 찌르던 두 개의 검 중, 롱소드 정도로 짧아진 투헨더가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밀어내던 압력은 절반으로 줄었으나, 그것을 이용할 새는 별로 없었다.
투헨더가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허공을 갈랐다. 인퀴지터의 허리가 다급히 숙여졌다.
사악!
검 자체는 피했으나 추가로 새겨진 궤적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동시에 인퀴지터는 악마기사의 몸에 태클을 걸었다. 이대로 넘어트리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퍼엉!
허튼 바람이었다. 마기가 악마기사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치솟더니, 그대로 터져 나왔다.
“으읏.”
그녀의 몸을 보호하던 가호에 의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은 막았다. 그렇지만 뒤로 튕기듯 구르는 것과 약간의 생채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더불어 생성된 마창에 허벅지와 팔뚝이 꿰뚫리는 것도 말이다.
촤아악.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자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에게 악마기사가 다가온 건 한 순간이었다. 바닥을 긁으며 다가왔던 혈검이 위로 치솟고, 부채꼴로 타오르는 마기를 표출했다.
연이어 그녀가 피하는 방향을 예측하듯 휘둘러지는 검격이란. 불꽃과 짐승의 손톱자국 같은 세 갈래의 검흔이 차례로 대지에 남았다.
인퀴지터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틈이, 틈이 도무지 없다. 만들고자 해도 속도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피하기도 급급하다.
그러나.
그러나.
여기서 굴복할 수는 없기에.
그녀는 처음으로 메이스를 통하지 않고 육신으로만 신성력을 방출해 았다. 이런 건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으나,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강화된 육신이 땅을 딛는 순간, 그녀의 발을 입구 삼아 빠져나간 기운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
쿠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솟아오르거나 꺼지기를 마구잡이로 행했다.
그 속에서 인퀴지터는 코피를 왈칵 터트렸다. 무기를 축 삼아 신성력을 뿜는 것과 육신을 축 삼는 건 참 다르구나. 그런 깨달음이 그녀의 뇌리에 새겨졌다.
육신으로 행하는 건 좀 더 직관적이었지만 힘의 방출이 불안하고 더욱 고통스러웠다.
아팠다.
고통에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악마기사!!”
그래도 아직 서 있을 수 있다. 움직일 수 있다.
인퀴지터는 힘이 빠지려는 손을 굳게 쥐고 발로 하여금 땅을 밀었다. 몸이 박차고 나아갔다.
콱!
때마침, 악마기사가 혈검을 땅에 박았다.
펑, 펑, 펑!
한 걸음 뒤부터 마기로 이뤄진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악마기사가 계속 반 박자 늦음을 깨닫고 혈검을 회수한 후에나 멈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퀴지터는 피를 담는 데 쓰였던 구덩이의 철편을 들었다. 그녀의 발에 맞고 튕겨 오른 철편이 그녀의 빈손에 들려 날아갔다.
세 갈래 참격이 그것을 네 조각으로 잘랐다. 인퀴지터는 이제 바로 그 뒤에 서서, 다시 한번 대지를 뒤흔들고자 한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몸에 깊은 열상을 세 개 새긴 채로 인퀴지터는 진각을 밟았다. 지반이 출렁이며 악마기사의 균형을 빼앗았다. 마기가 흐트러졌다.
[그레트헨.]
그러나 그녀가 틈이라 생각하며 한 발 내딛는 순간, 그렇게 메이스를 휘두르려던 찰나.
악마기사의 입꼬리가 살금 올라갔다.
[분노에 순응해.]
마기가 흐트러져도 검은 휘두를 수 있다. 제대로 된 위력의 참격을 쏘아 보낼 순 없어도, 검 자체에 마기를 담을 수 있다.
인퀴지터는 그것을 간과했고, 그 결과 악마기사는 땅에 박았던 혈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러면, 적어도 속은 시원하잖아.]
이 검로는 절대 피할 수 없다.
인퀴지터의 뇌리에 예언이나 다름없는 확신이 새겨졌다. 목 언저리가 섬뜩해졌다.
“응집하고 쌓아 올려, 보호하는 벽을!”
그러다 별안간 투명한 벽 몇 겹이 인퀴지터의 앞에 세워졌다.
쨍그랑!
제대로 마기가 실린 것도 아니건만, 악마기사의 검격 한 번에 전부 쪼개질 벽이었다.
다만 인퀴지터가 몸 뺄 시간은 분명 벌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인퀴지터!”
“……! 아크메이지님?!”
그녀는 아주 간만에 보는 듯한 얼굴을 확인했다.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옷자락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아크메이지는 수십 명의 마법사와 신관들을 꼬리로 달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직 안 늦었죠?”
데스브링거의 헉헉거림과 함께, 악마기사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엎드려!”
그녀는 다급히 외치며 지원군과 악마기사 사이에 섰다.
신성력이 빠르게 배열되며 보호막을 형성하고, 악마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네 개의 궤적이 보호막을 밀빵처럼 손쉽게 자르며 뒤편의 성벽을 할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모두 그녀의 말을 듣고 엎드린 덕에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사람이 나오진 않았다. 적어도 보기엔 그랬다.
“구속식을!”
“아니, 퍼지면 안 됩니다! 퍼지면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화를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외침에 신관들이 자리 잡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정화는 본디 정화할 대상과 가깝거나 포위하는 형국을 해야 효율이 좋으나, 상황이 상황이다.
그녀는 전방위를 커버하는 능력이 없고, 악마기사는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을 싹둑 잘라 버릴 수 있으니. 차라리 그녀가 막을 수 있는 한 방향에 밀집된 게 낫다.
나을 것이다.
인퀴지터의 손등이 코피를 닦았다. 본래라면 신성력이 태웠을 것이나, 이젠 그럴 여력도 없다. 아닌 척하지만 눈이 가물가물했다.
힘겨웠다.
“바인딩!”
그때 몇몇 마법사들이 구속주문을 외쳤다. 희고 푸른 사슬이 솟아오르며 악마기사를 묶으려 들었다.
귀찮다는 듯 휘두른 손짓 한 번에 모든 사슬이 박살 나 흩어졌다. 정말이지, 강해도 너무 강했다.
“받으십시오!”
그래도 그 찰나가 번 시간은 또 하나의 기회를 건네주었다. 뒤편으로부터 두 사람의 인영이 다가와 무언갈 던졌다.
“이건…….”
쿵!
메이스와 마찬가지로 별의 금속과 철을 섞어 만든 성물이자 그녀의 든든한 파트너, 대형 방패가 드디어 그녀 앞에 섰다.
콰앙!
간발의 차로 대형 방패 위에 악마기사가 쏘아 보낸 창들이 박혔다. 싸구려 방패와 다르게 신성력을 효율적으로, 다량 받아들이는 성물이 손쉽게 창들을 소멸시켰다.
부담이 덜어졌다. 그렇다고 이미 쌓인 피로까지 사라지진 않지만서도.
“불꽃이여, 내 적을 불태워 다오!”
그사이 아크메이지를 위시한 몇 명의 마법사는 공격마법을 발사했다.
악마기사의 손이 들고 있던 혈검으로 하여금 바닥에 원을 그렸다. 불꽃이 치솟으며 공격마법들을 전부 막아 냈다.
[널 괴롭히는 것들을 전부 죽여 줄게.]
제각각의 타이밍에 공격을 날리느라, 불꽃이 멎고 나서 날아온 공격도 그렇다. 악마기사는 검을 살짝 휘두르기만 해도 그것들을 손쉽게 사그라트렸다.
[불태우고 찢어 네 마음을 풀어 줄게.]
오히려 그는 그 자리에서 공격을 가했다. 혈검이 바닥에 박히며 대지를 통로 삼아 마기를 내뻗었다.
불기둥이다. 아까 겪어 본 패턴에 인퀴지터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뒤는 넘어갈 수 없다!”
그녀의 손이 방패를 대지에 내려찍었다. 안구 쪽 실핏줄이 터졌는지 시야 일부가 붉은색으로 얼룩덜룩해졌다.
피를 먹고 피어오른 빛이 짓쳐들어오던 마기를 정화했다.
[그런데 왜 방해하는 거야?]
아파. 인퀴지터의 다리가 살짝 흔들렸다.
[왜…… 순응하질 않는 거야?]
“신이시여, 부정을 태우고 삿된 것을 지우소서!”
투헨더의 검격이 날아온다.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기도문을 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아직 더 버텨야 했다.
[왜.]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째서?]
그녀는 붉어진 시야로 다시 앞을 보았다. 악마기사가 혈검을 떨어트린 채 이마를 쥐고 있었다.
인퀴지터의 녹색 눈동자가 일순, 얇은 소망으로 반짝였다.
“지금이다, 공격해!”
안 돼. 방금 그의 모습은 분명.
“자, 잠까…… 크흡.”
인퀴지터는 날아가는 공격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제각각 사용한 기술들이 허공을 날아 악마기사가 있던 자리를 포격했다. 먼지구름이 일었다.
“…해치웠나?”
…설마, 죽었을까?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구름속을 바라보았다. 악마기사가 쓰러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래도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가 정말 위험한 존재란 건 알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악마기사가 살아 있길 바랐다.
[친애하는 그레트헨.]
…그렇지만 여전히 악마에게 사로잡힌 상태이길 바라진 않았다.
악마기사의 오른쪽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살의는 마치 핏방울과 같았다.
[그건 안 돼.]
혈검을 내려놓으며 비게 된 손이 투헨더의 도신을 쓸었다. 검이 본래의─길고 거대한─형상을 되찾더니, 양손에 단단히 잡혔다.
바닥으로 추락했던 혈검은 어느새 핏물로 분해되며 투헨더의 검날에 모여들고 있다.
[분노는, 모든 걸 삼키는 존재야.]
큰 게 온다.
애석함과 안도, 막막함 따위로 뒤섞인 감정을 제치고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다들 가운데로 모여!”
그녀는 반사적으로 외치며 방패를 앞에 내리꽂았다. 어떤 정신으로 끌어모았는지 모를 신성력이 방패에 담기며 직사각형의 보호막을 완성시켰다. 너무 아득한 통증은 그녀의 손끝 발끝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하되, 본능이 외치는 비명만큼은 이기지 못했다.
사악.
먼지 쓰는 듯한 소리가 잠시 귓가에 울렸다. 예상했던 둔통은 일지 않았다.
“……!”
그보단 느낄 수 없었다. 무언가가 그들을 짓누르고 지나갔다란 감각이 생생했다. 어쩐지 뒤가 허전했다.
“…….”
인퀴지터의 고개가 홀린 듯 뒤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도시가 보였다. 성에 가려져서 보이면 안 될 도시가 보였다.
“성이…….”
사라졌어.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던……?”
아니, 그럴 리 없다. 악마기사의 몸을 차지한 악마가 그녀를 봐줄 리가 없을뿐더러, 이렇게나 거대한 공격을 쏟아 냈다면 대악마라도 분명 무리가─.
[돌아갈 곳이 없어지면, 반항도 의미가 없어.]
콱!
“커헉!”
방패가 강제로 옆에 젖혀졌다. 팔이 꺾일 듯이 아팠으나, 그보단 다른 부위가 문제였다.
[그렇지?]
“으윽!”
목이 붙잡혔다.
[그러니까 포기해.]
“으─.”
그녀는 자신의 목을 붙잡고 들어 올린 악마기사를 바라보았다. 신성력으로 어떻게든 저항하고 있지만 목에 가해지는 압력은 점차 그녀를 압도하고 있다.
[너의 무력감을 두고 울부짖어.]
마음 같아서는 메이스를 휘두르거나 발로 걷어차며 저항이라도 하고 싶거늘, 몸은 왜 말을 들어 주지 않는지.
[그렇게 분노해.]
숨통이 점점 조여지기 시작했다.
“그분을 놓아라, 이 악마!”
타다다닥!
그때, 아마 이단심문관일 이들 몇이 달려들었다.
안 돼. 그녀의 목은 그 말을 토로하고자 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악마기사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움직였다. 촤악! 육편이 잘리고 핏물 치솟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께 가로되……!”
[…계속 귀찮게!]
연이어 악마기사의 머리 위편 허공에서 창이 생성되었다.
그건 그녀를 넘어 뒤쪽으로 날아갔다. 아크메이지를 비롯한 마법사들의 주문이 끊기고 비명 소리가 아우성쳤다.
[끈질기긴!]
“으윽!”
무력감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푸욱.
“젠장, 아까부터 뭘 그리 중얼대는 건진 모르겠는데, 제발 정신 좀 차리십쇼.”
그러다가 잠깐, 무언가 찔리는 소리가 났다.
[…이건.]
“컥, 컥.”
시야가 까매지기 직전, 목이 풀려났다.
그녀는 힘이 풀린 다리로 인해 주저앉은 채, 다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낮아진 것으로도 모자라 어렴풋한 시야 사이로 악마기사의 다리와 그 뒤편에 서 있는 존재의 다리가 보였다. 멍한 정신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왜……?”
매번 자긴 초인이 아니라며 찡찡댄 주제에, 왜?
[한낱 인간 따위가……!]
“아, 씹.”
쨍그랑.
그녀는 악마기사가 제 어깨에 파고든 쿠크리를 맨손으로 박살 내고 도적에게로 몸을 돌리는 걸 보았다.
“안, 돼…….”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약간의 재주가 있을 뿐,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게 저 도적이었다. 악마기사가 검을 휘두르지 않고 손만 휘저어도 죽을 거란 말이다.
절대로, 막아야 했다.
“안 돼……!”
일어나. 일어나야 해.
뿌연 시야가 억지로 초점을 맞췄다.
“안 됩니다, 악마기사!”
악마기사의 검이 기어코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 * *
뭐라는 거야.
개소리 말고 꺼져.
* * *
데스브링거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올렸다. 그것이 그를 보호할 수 없음은 알지만, 생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분명 참격이 사출되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그머니 떴다.
“…기사 나리?”
아까 전만 해도 새빨간 기운으로 가득 찼던 악마기사의 오른쪽 눈동자가, 흰자위와 눈동자가 구분되는 일반인의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분명 그를 노렸을 검은 그의 오른편 대지를 박살 낸 채 존재하고 있다.
“…두.”
“……?”
“만두.”
만두? 그게 뭔데?
그는 악마기사가 중얼거린 단어를 들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고기만두야.”
다만, 그는 그다음 순간 벌어지는 모든 걸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미안해.”
터 오르는 동을 등진 채, 물이 빠지듯 회색으로 돌아오는 머리칼 위에 주홍색 베일마저 얹은 악마기사가.
“정말 미안해.”
다정하게 웃으며 사과해 오고 있었다.
검으로 본인의 배를 찌르며.
참여자 40명. 경상자 31명. 중상자 4명. 사망자 0명.
대악마를 품은 그릇이 제압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