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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81화 (81/389)

◈81화 이러지 말라고 (6)

룩콴의 일목요연한 설명을 들은 직후, 인퀴지터는 한달음에 중앙 정원까지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마주친 모든 민간인들은 도적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안전한 방을 사람들에게 찾아 줄 것이다. 그들이 괜히 성 바깥에 나갔다가 악마 밥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각설하고, 중앙 정원 입구.

그녀는 시체 무더기와 쪼개진 문을 넘어 피비린내 나는 정원에 발을 디뎠다. 정원수가 뽑아 버리고 대신 설치한 구덩이가 가장 먼저 보였다. 몇 명의 사람들에게서 뽑아냈는지 모를 피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악마기사?”

거기서 간신히 시선을 떼, 좀더 주위를 살폈다. 마련된 화로가 미처 밝히지 못한 어둠 속, 희미하게 움직이는 인영이 보였다.

훤칠한 키와 등에 맨 검의 실루엣은 명백히 악마기사의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직감은 왜 이다지도 불안하게 울고 있을까. 어째서 악마기사의 오른팔의 마기는 그의 몸 전체로 뻗어 있나.

인퀴지터는 방패를 올린 채 천천히 앞으로 반 보 내디뎠다. 그건 참 현명한 행동이었다.

“흐으.”

쾅!

“……!”

눈 깜짝할 시간에 칼날이 내리꽂혔다. 방패를 내리고 있었다면 반응하기 퍽 까다로웠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악마기사……!”

동시에 화톳불의 영역에 들어온 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기사는 온몸에 붉고 검은 기운을 두른 채, 투헨더를 한 손으로 쥐고 있었다.

불꽃 특유의 불그스름함에 물든 눈동자는 회색인지 붉은색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잿빛 광대뼈 아래에 점점이 튄 피는 마치 눈물처럼 뺨을 종단하고 있다.

“거슬려…….”

“악마기사, 정신 차리십시오!”

“거슬려 죽을 것 같아…….”

또 온다. 그녀는 방패를 들었다. 콰앙! 묵직한 일격이 방패를 두드렸다. 신성력을 펴 발랐음에도 손목이 얼얼했다.

“악마기사!”

인퀴지터는 재차 악마기사를 불렀다. 이번엔 조금 반응이 있었다. 악마기사의 왼손이 그 자신의 이마를 짚고 허리를 구부렸다. 두통을 호소하는 이들과 비슷했다.

다만, 두통 환자와 그의 결정적 차이점은 인퀴지터를 향해 치켜든 채 거두지 않는 검이라.

“흐, 으.”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악마기사는 비틀거렸다. 아지랑이처럼 그의 몸을 맴도는 마기는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정신 차리자…… 근데 거슬려. 거슬린다고.”

투헨더의 검날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죽여 버리면 안 되나……?”

인퀴지터는 그 한마디를 듣고 유보했던 확신을 내렸다.

악마기사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그 악랄한 악마 놈이 그의 육신을 차지하려 드는 게 분명했다!

“악마기사, 걱정 마십시오! 저는 버틸 수 있습니다!”

하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악마기사를 믿고, 시간을 끈다.

“그러니 지지 마십시오!”

그가 몸속의 악마를 누르고 온전히 깨어날 때까지.

휙!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마기사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수축하던 마기는 끝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마치 왕관처럼, 혹은 뿔처럼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치솟는다.

“거슬린다고, 말했잖아.”

튄 핏방울로 인해 길게 빼어진 붉은 눈꼬리가 우는 사람처럼 휘어졌다.

“왜, 왜 날 짜증나게 만들어?”

햇빛 아래서조차 백색으로 보이진 않던, 그러나 어둠 속에선 그리도 하얗게 보이던 회색 빛깔이 사라진 사내는 다소 어색한가 했다.

그러나 창백한 뺨이 화로의 불에 주홍빛으로 물들 때, 항상 직선만을 그리던 입술이 깨진 유리창처럼 비죽 올라갈 때.

그 어색함은 온전히 낯선 것으로 변모했다.

“너희 때문이야, 너희 때문이라고.”

인퀴지터는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앞서 한계까지 쥐어짜 낸 전적이 있으나 무시했다.

신성력이 주는 고통은 정신적인 피로로써 누적될 뿐, 육체에 실질적으로 피로를 쌓진 않는다. 그녀는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아니, 싸워야만 했다.

“그러니까, 죽어 버려.”

그렇지 않으면, 악마기사는 누가 되돌린단 말인가.

쿵!

방패를 들어 검을 막는다. 이어 메이스를 휘둘러 공격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바로 빠진 기사가 바로 찌르기를 해 온다. 핏빛으로 물든 검날엔 당연히 섬뜩한 마기가 맺혀 있다.

“신이시여!”

그것에 당할 것인가? 아니, 그럴 수 없다.

“저와 함께하소서!”

인퀴지터는 엄습하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신이 내어준 힘을 내뿜었다. 억지로 메이스와 방패의 방향을 틀어 공격을 막고, 나아가 전방을 향해 신성력의 파도를 내뿜었다.

악마기사의 눈이 살풋 찡그려지며 검을 회수하고 그대로 땅에 박았다. 전방위로 쏟아지는 마력이 그녀의 신성력과 충돌했다.

그그그극.

일순 철과 철이 맞부딪친 양 마기와 신성력이 치열한 힘겨루기를 했다. 신성력과 마기의 양이 비슷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두 사람의 육신이 결국 서로 반대 방향으로 쭈욱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나 그걸로 안도해선 안 된다. 악마기사는 찰나도 베풀지 않고 다음 공세에 나섰다.

핏빛 검날이 허공을 가르고, 그에 맺혀 있던 강대한 마기가 쭈욱 늘어나며 아래서부터 위로 세상을 양분했다.

콰앙!

피하기엔 여력이 되지 않는다. 인퀴지터는 방패를 앞세운 채 그 공격을 막았다.

일선에 집중한 마기는 더없이 첨예하여, 방패에 약간의 흠집이 새겨졌다.

심지어 공격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위로 치켜세워졌던 기사의 검이 이번엔 아래로 어긋나게 내리그어졌다.

대각선으로 베어진 세계를 피해 인퀴지터는 바닥을 굴렀다.

평상시 쓰던 장비였다면 다시 한번 막았겠지만, 천 옷과 싸구려 중형 방패로는 가드하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흙먼지와 함께 나부꼈다.

그 틈을 타 악마기사가 돌진하듯 짓쳐들었다. 구른 상태에서 균형을 잡다 말고 그녀는 방패를 들었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다른 손으론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는 자세였다.

곧 방패 위에 육중한 일격이 내리꽂혔다. 방패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치욕적이었다.

악마기사는 저런 얼굴을 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질 것 같으냐!!”

그녀는 우렁차게 외치며 기도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악마기사를 밀쳐 냈다.

동시에 인퀴지터의 오른손에 들린 메이스가 전방의 땅을 후려쳤다.

쿠웅.

폭 3m, 거리 15m에 달하는 지반이 출렁이며 새하얀 빛이 대지로부터 차례차례 솟아올랐다.

악마기사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인퀴지터가 직접 고안해 낸 기술이었다.

“크윽!”

완전히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숙달도 되지 않아 연비는 나쁘지만, 최소한 떨어진 적을 공격할 수는 있다.

빛이 솟구치는 범위가 뒤로 밀려난 악마기사까지 휩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뒤쪽, 철편으로 만들어 땅에 박아 둔 구덩이마저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짜증나게……!”

하지만 악마기사가 이런 기술 하나에 당해 줄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닌지라.

마기를 표출하며 신성력에 저항한 이가 바로 발돋움을 하며 달려왔다. 까앙! 방패와 검이 또 한 번 마찰했다.

인퀴지터의 방패가 힘겨루기 속에서 각도를 미묘하게 틀어 가며 전진을 시작했다.

텅!

그녀는 방패에 검을 맞댄 채로 악마기사를 넘겨 버렸다. 악마기사가 유연히 땅을 딛긴 했으나, 이미 그녀의 메이스는 땅에 직격한 채다.

촤아아악!

분수가 순서대로 솟아오르듯 인퀴지터가 있는 방향에서부터 차례로 치솟은 빛이 다시금 악마기사를 강타했다.

치이익.

신성력과 맞닿은 부정이 타들어 가며 연기를 내뿜었다.

“으윽.”

그러다 말고 악마기사가 이마를 짚었다.

“안 돼…… 이러면…….”

비틀거리며 무언갈 중얼거리는 꼴이 딱 정신 차리고자 노력하는 이의 모습이라.

지금이다. 인퀴지터는 악마기사를 제압하고자 앞으로 뛰어나갔다. 방어력이 현저히 낮아진 대신, 갑옷이 없어 가벼워진 몸이 앞으로 손쉽게 나아갔다.

까앙!

“크윽!”

갈비뼈나 팔 하나는 부러트리려 했건만, 전투에 익숙한 사내는 호락호락 허락해 주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치켜올린 듯한 검이 메이스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처음부터 준비한 공격과 뒤늦게 인지해 끌어올린 힘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둔기와 도검류의 겨루기라면 더더욱.

악마기사의 몸이 기어코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낙법 취할 여력은 있었는지, 한 바퀴 돌며 균형을 되찾고 착지하는 게 날랜 짐승과 같았다.

“으으윽.”

그러다 또다시 몸이 비틀거린다. 괴로움에 찬 목소리가 성대를 긁어 대는가 하면 큼지막한 손은 그 자신의 골을 부수려 드는 것처럼 이마를 꽉 쥔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아지랑이가 더 짙어졌다.

“흐읍!”

인퀴지터는 악마기사가 정신 차리고자 노력하는 틈을 노려 계속 공격을 가하려 했다. 팔다리라도 부러트리면 그가 날뛰어도 제압하기 쉬울 테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번 접근은 실수였다.

“으아아아!”

악마기사가 포효함과 동시에 마기가 구 형태로 파앙 터져 나왔다. 사방으로 뻗은 마기가 공기를 비롯해 대지를 갈가리 찢었다.

인퀴지터의 뺨에도 쫙쫙 혈선이 그어졌다. 신성력을 급하게 끌어올려 저항을 했는데도 그랬다.

그녀는 단단한 흙을 지이이익 끌며 뒤로 미끄러졌다.

“죽여, 죽어, 죽어, 죽여?”

그사이, 안면 대부분을 왼손으로 짚고 있던 이가 손가락을 구부렸다.

까드득.

손톱이 끝내 본인의 이마 쪽 살갗을 긁어 냈다. 촤악! 오른쪽 눈을 가리던 안대가 끝내 찢겨 나갔다.

“아.”

다만, 텅 비었거나 인공 눈이 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리엔 아주 멀쩡한 눈이 존재했다.

붉은 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왼편의 회색도 아닌. 빗방울에 짓이겨져 물이 날아가 버린 꽃잎 같은 색채의 눈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

소용돌이처럼, 마기가 사내의 몸을 거세게 휘감았다. 그것은 더 이상 아지랑이가 아니라 안개다.

쩌억.

“……!”

한순간이었다. 한순간에 검이 마기를 내뿜으며 반경 20m를 갈랐다. 인퀴지터가 가까스로 치켜들었던 방패마저도 그 참격을 버티지 못하고 잘려 나갈 위력이었다.

“크윽!”

비록 반으로 잘려 나갔으나, 그래도 방패는 최소한의 일은 하고 갔다. 인퀴지터는 그녀의 배에 새겨진 상처에 손을 대었다.

방패로 막지 않았다면 이 상처의 깊이는 더 깊었을 것이다.

“더 강해졌나……!”

그녀는 상처를 치유하다 말고 다급히 바닥을 굴렀다.

스윽. 더 이상 무언가 잘려 나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허공에 순간적으로 새겨지는 검은 궤적만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정면으로 보면 실선에 불과할, 위나 아래서 봐야 초승달의 면적이 나올 참격이지마는.

인퀴지터는 아들아슬하게 팔뚝 아랫부분부터 잘려 나간 방패를 풀었다. 이렇게 많이 잘려 나가서야 방패를 착용할 이유가 없다.

스윽.

약간의 간격도 없이, 검격이 출수되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그것을 피했다. 회피가 살짝 늦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그렇지만 숨 돌릴 틈 따윈 없다. 검격은 연속적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인퀴지터는 서둘러 신성력의 막을 쳤다. 콰앙! 방어막이 공격 한 번에 흔들렸다.

서걱!

이어 날린 검격보다 반 박자 느리게 달려온 악마기사가 검을 휘두르면, 그녀가 자랑하던 굳센 방어막은 종잇장처럼 잘려 나간다.

신성력을 때려 박아 몇 겹의 방어막을 만들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방어막과 함께 그녀의 머리도 쪼개졌을 것이다.

“흐압!”

방패라는 엄폐물이 사라진 건 많은 단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게 꼭 단점만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닌지라.

방패가 없어진 대가로 인퀴지터는 어렵지 않게 메이스를 휘둘러 반격했다.

깡!

플랜지드 메이스의 날과 핏빛 검날이 맞부딪쳤다. 지금까지와 비슷한 형태의 충돌이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 있다면 추가 공격이었다.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느라 텅 비었던 악마기사의 왼손이 아래서부터 위까지 허공을 긁어 올렸다.

촤악!

인퀴지터의 어깨에 핏방울이 튀었다. 캉! 그녀의 힘이 기어코 악마기사를 밀어내고 발로 사내의 명치를 걷어찼다.

“큿.”

손톱에 마기를 둘러 공격했나. 복도에서 마주쳤던 시신들을 고려해 미리 예상했어야 한 문제였다. 이건 그녀의 실수다.

그러나 실수를 곱씹으며 고칠 여유 따윈 주어지지 않으니.

검을 아래서 위로 휘두른 악마기사가 마기를 해일처럼 쏘아 보냈다. 조금만이라도 늦었다간 그녀의 몸은 사정없이 두 조각 날 터였다.

인퀴지터는 이를 악물고 메이스를 땅에 박았다. 그를 기점으로 터져 나온 신성력이 마기와 충돌했다.

거대한 폭발이 먼지구름과 함께 일었다.

촤악!

1초, 2초.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일순 조각난 큐브처럼 어긋났다.

“……!”

그 찰나간 악마기사는 몇 번이나 검을 휘두른 것인지.

방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왼쪽 귀와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오른쪽 어깻죽지는 가슴 윗부분까지 베여 틈을 내보였다. 허벅지에도 스쳐 간 자상이 뼈가 보일 정도로 새겨진 채다.

“나는─! 약속했다!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버티기로!!”

그러나 부상은 그녀를 멈출 수 없다. 끌어올린 신성력의 대가로 작열하는 고통이 끝끝내 이유 없이 코피를 터트렸다.

그 대가인 것처럼 찢긴 천 자락 속 상처는 그녀가 전진하는 동안 전부 나아 버린다. 짤막한 깨달음이 인퀴지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신이시여, 어린 양을 굽어봐 주소서!”

신성력을 아무리 뭉치고 밀집시켜도 저 마기의 검격을 막아 낼 수 없다면, 차라리 베이고 치유하는 게 어떨까.

“하므로 가엾은 자를 구원하소서!”

금빛 물결이 사위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스윽. 압축하고 또 압축한 마기의 검격이 그것에 대항하듯 세상을 잘랐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중요 장기만을 보호한 채 몸이 베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악마기사의 검은 접합 부위가 너무 깔끔하게 잘려, 도로 붙이거나 회복시키기도 쉬웠다.

“흐아압!!!”

그리고 끝내, 그녀의 육신이 악마기사의 바로 앞에 다다른 순간.

악마기사의 손이 그것을 막으려는 양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팔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경직된 손과 검이 허공에 멈춰 섰다.

콰앙!

적중한 메이스에 악마기사의 허리가 접히며 그대로 날아갔다.

* * *

데스브링거는 지진 난 것처럼 쿵쿵 울리는 대지를 두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다독였다.

물론 사람을 유혹하는 쪽은 전문이 아니었으므로 하다가 환멸이 나기도 했다.

특히 말투에서 배운 티가 나는─보다 정확히는 예전에 잘살던 티가 나는─이들을 대할 때 그랬다.

“나, 날 더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난 저것들보다 더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

그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게 악마이고 세 번째로 싫어하는 게 교단이라면, 첫 번째가 바로 저런 상류층 인간이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급할 테니까!”

데스브링거는 본인을 상단주라 밝힌 이를 싸늘히 응시했다. 보호받을 가치? 지랄하네. 더 서늘한 속내는 덤이었다.

“염병하네. 그 입 당장 다물지 않으면 바깥에 던져 버릴 거니까 작작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 지금 무슨!”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지금 댁 목숨줄을 잡은 건 우리라고.”

오랜만에 사람 좀 죽이고 싶어지네.

그는 이 여정에 함께한 이래, ‘데스브링거’로서의 일은 한 번도 안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데스브링거로서 사명을 다하려 든다면 가장 먼저 인퀴지터가 그의 멱을 잡을 터였다.

데스브링거가 하는 일은 법이 심판하지 못한 악인─특히 권력자와 부자들─을 살해하는 것이니까.

“악마 밥으로 던져지고 싶지 않으면 닥쳐.”

그는 악마기사의 고압적인 말투를 따라 하며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안 그래도 짜증난 마당에 그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까지 말썽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피는 다 끝났습니까요?”

“일단은. 추가로 붙잡힌 사람들은 없는지 찾고 있어.”

그들은 성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헤메다가, 간수 몇 명을 잡아 족치거나 구슬린 끝에 찾아낸 장소를 돌아보았다.

성내에 마련된 지하 감옥이었다.

비행종 악마가 들어오기도 어렵고, 내부에 간수들이 많지도 않은 데다가 죽어 나간 시체 볼 일도 없어서 딱이었다.

“아이들은 괜찮은 거죠?”

“일단은, 괜찮아. 충격을 너무 받았는지 겁에 심하게 질려 있긴 하지만.”

아이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건 행운이었다.

아이들의 심리엔 썩 좋지 않겠으나, 저 어린애들을 안전한 데로 옮긴다고 다른 곳까지 이끌어야 했다면 그들은 머리가 터졌을 것이다.

“이봐, 쓰레기. 사람들 더 잡힌 데 없는 거 확실해?”

“적어도 성엔 더 없어. 그건 확실해.”

괴물로 변했다는 비푸릿과 도살자가 된 악마기사, 악마계약자들이 죄다 죽어 나간 탓에 피아 구분 없이 날뛰기 시작한 악마들을 겪은 해적이 투덜대듯 대답했다.

믿는 구석이 죄다 사라지자 목숨만은 살려 달라며 이쪽에 붙은 놈들이었다.

물론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어도 악마추종자들에게 협력했던 건 사실이라 마냥 곱게 볼 수만은 없지만……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지경이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받아들였던 데스브링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보다, 확실한 거지? 사형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는 거?”

“그래.”

는 무슨, 그들에게 그딴 권리가 있을 리 있나. 급하니까 거짓말로 좀 쏘삭였을 뿐이다. 약속에 의미가 있으려면 최소한 벽창호 용사의 용인이 있어야 한다.

또한 예상하건대, 그 양반은 절대로 저들을 용납하지 않을 거다. 살아남은 아유 힌의 권력자들도 그럴 테고.

“좋아, 그러면…….”

콰앙!

데스브링거의 말을 끊고,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야!”

“저, 저 바깥에!”

바깥에서 망을 보던 해적과 도적이 그들 있던 복도에 들이닥치며 외쳤다.

“본대가 왔어요!”

데스브링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 * *

아스라이 잘려 간 머리카락에 정신이 잠깐 드는 듯했다.

「광기 게이지 95%」

하므로 다가오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멈출 수 없다면, 남이 나를 멈추는 것만이라도 허용해야 했다.

「광기 게이지 96%」

그런데.

그런데.

「광기 게이지 97%」

너무 아파.

「광기 게이지 98%」

너무 아프다고.

「광기 게이지 99%」

…내가 왜 아파야 해?

‘이건 불합리해.’

「광기 게이지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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