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83화 (83/389)

◈83화 이러지 말라고 (8)

아유 힌은 항구도시가 아니다. 해변과 인접한 건 사실이지만, 지형상 숨겨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단 말을 타고 가는 게 더 빨랐다.

그러나 인원이 삼백 명쯤 되고, 말조차 없다면 그 부분도 역전되기 마련이니.

해서 항구의 해적들은 스스로 사다리를 내렸다. 교단의 사람들과 마법사들을 아유 힌의 앞바다까지 옮겨 줄 배의 사다리를 말이다.

“무슨 바람으로 나선 거야?”

바람손은 뱃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멀리, 고지에 지어진 아유 힌이 보이는 자리였다.

“당신이 가장 먼저 태워 주겠다고 나설 줄 몰랐는데. 그것도 교단에게.”

다만 그 자리엔 선객이 하나 있었으니. 바람손은 두목 라홍에게 술 한 병을 건넸다. 항구에서 몰래 꿍쳐 온 술이었다.

“네가…… 네가 말하지 않았나.”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라홍은 지적 대신 술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동으로 만든 술병에서 독하디독한 술이 쫄랑쫄랑 나왔다.

“가족들을 또 잃을 순 없지 않냐고…… 걔네까지 불타 버린 잿더미 위에 살게 하지 말자고…… 그냥,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 것뿐이다.”

그녀는 주름진 눈꺼풀을 살금 내렸다.

“아이들은 죄가 없으니까.”

“…꼬부랑탱 할망구가 어쩐 일이래. 고집을 다 꺾고.”

“네놈은 아니 늙을 것 같나.”

“너보단 오래 살겠지.”

“그래. 오래 살아라. 오래 살면서 엿같은 거나 더 보고 오시지.”

“지금 저주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착잡한 마음과 설움을 가리기 딱 좋다. 또한 술은 가려 둔 감정이 쌓이기 전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수단이라.

“…성공했을 거라 생각하나.”

“알까 보냐.”

바람손은 술병을 건네받아 본인 입에도 액체를 쑤셔 박았다. 배에 칼이 쑤셔졌으니 술 같은 건 먹을 생각 말라던 치료사의 말은 무시했다.

“항구도 그 모양 그 꼴이 됐는데, 비푸릿 일당마저 못 죽이면 망하는 거지, 뭐.”

해적 중에서 의사 말 잘 듣는 놈은 별로 없었다.

“선장!”

그때 망루에 있던 이가 크게 소리쳤다. 라홍의 눈매가 사납게 휘었다.

“수선 떨지 마라. 악마들에게 걸리면 어쩔 셈…….”

“아유 힌에서 청색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

“비푸릿이 죽었어요!”

그건, 꽤 소리칠 만한 소식이었다.

* * *

“허억!”

인퀴지터는 눈을 뜸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다급히 들이켠 숨이 차갑고, 동시에 묵직했다.

폐가 혹은 갈비뼈가, 그 겉을 둘러싼 모든 근육이 뻐근하기 짝이 없었다.

“악마기사는?!”

그러나 그런 통증에 굴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휙 돌아간 고개에 한쪽 머리카락만이 그녀의 뺨을 때리고, 주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감옥이었다. 다소 아늑하게 꾸민.

“……?”

그녀는 가장 먼저 자신이 늦었는가 하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 늦었다면 그녀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 터. 그러니 해당 가설은 기각이다.

그렇다면 악마기사가 제압되었다? 그녀마저 쓰러진 마당에, 어떻게?

아니, 그보다 주변인들의 안위는?

스윽.

일단 제 목숨이 멀쩡히 붙어 있다. 그것으로 하여금 최악은 아닐 거란 판단을 내리며, 그녀는 몸을 온전히 일으켜 세웠다.

폭신한 솜이불이 밀려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감옥 안에 침대가 마련된 수준은 아니나, 덮는 이불 외 다른 이불이 겹겹이 쌓여 침대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아, 있군.”

더불어 그녀의 영원한 파트너, 메이스와 방패도 감옥 벽 한쪽에 나란히 기대져 있다.

본대에게 떠넘기고 왔던 갑옷도 천 한 장을 깔고 곱게 놓여 있는 걸 보면, 정말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비푸릿은 정말 죽은 건가?”

“효수한 거 봤잖아.”

“아니…… 그 괴물이 비푸릿이란 게 잘 안 믿겨서…….”

하물며 복도 밖에서 사람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와서야.

인퀴지터는 눈을 깜빡이다가, 일단 옷부터 갈아입기로 했다.

빠른 이동과 잠입이라는 조건이 잇따라 이어지며 갑옷을 두고 다니긴 했지만, 그 덕분에 더욱 이것이 그리웠다.

“용사님은 언제 깨어나시는 거지?”

“사제들 말로는 크게 다치신 건 아니시라더군.”

그녀는 살살 들려오는 수다를 엿들으며, 갑옷을 빠르게 착용했다. 종자가 없음에도 10분도 채 되지 않아 철의 기사가 완전한 무장을 갖췄다.

“그 괴물은 정말 봉인으로 끝내는…….”

끼이익.

그녀는 열려 있는 쇠창살 문을 밀었다. 관리가 되지 않을 때 나는 쇳소리가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좀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던 수다가 끝났다.

“요, 용사님!”

“깨어나셨는지요!”

인퀴지터는 교단 소속 인물들이 앞다투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인물들’이라 말했다고 해서 정말 그 수가 많은 건 아니었다.

“내, 내가 알리고 오겠어!”

심지어 그중 하나는 발걸음을 돌리기까지 했다. 나머지 두 사람이 그녀 앞에 당도했다.

“예, 에.”

인퀴지터는 제 앞으로 우다다 달려온 이들에게 가볍게 목례한 후, 중요한 것부터 확인했다.

“상황은 어찌 되었습니까?”

악마기사는, 도적은, 그때 달려와 주었던 이들은.

그녀가 쓰러진 이후 사건의 전개는.

인퀴지터의 질문에 사제들이 말을 잠시 아꼈다. 사람과 말 섞은 경험이 여즉 적어, 섬세한 감정을 캐치하지 못하는 그녀지만 그다지 부정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일단…… 처음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한참 만에 그들은 설명을 시작했다.

본대가 어떻게 타이밍 맞춰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인원이 왜 그것뿐이었는지, 정확한 사상자는 몇인지, 이후 수습은 어떻게 했는지 등등.

“항구의 해적들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빠르게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적대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고려했는데, 다들 협력적이더군요.”

“도시로 진입하던 과정에서 적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목격, 제압을 위해 인원을 나누셨습니다.”

“성에 왔던 38명 중 사망자는 0명, 부상자는 35명입니다. 그중 중상자가 4명 있었습니다만, 사제들이 그 자리에서 치료에 들어가, 목숨은 부지했습니다. 현재 회복 중입니다.”

“바깥에 남았던 264명 중 사망자는 19명, 부상자는 37명입니다. 적들이 전부 오합지졸같이 싸워 큰 피해는 일지 않았습니다. 나온 사망자도 대부분 악마에게 저항하다가 나온 것입니다.”

“현재 마법사들이 성과 지하 감옥을 중심으로 안전지대를 형성 중이며 우리 측에선 악마 처리 및 인명 구조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퀴지터는 가만히 보고를 들었다. 그러다 궁금증이 조금 무거워지면 중간중간 질문도 했다.

“해적들은 오지 않았습니까?”

“위험성으로 인해 해변에 남았습니다. 탈환에 성공한 후엔 신호를 보냈으니, 약속대로 물자를 가지러 항구로 돌아갔을 겁니다.”

“적들이 혼란스러워했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문제가 생겼는지, 악마들이 비푸릿 일파를 공격하더군요. 지휘 계급도 거의 보이지 않아, 혼비백산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크메이지님께서 인원을 쪼갠 것도 저 정도면 수월히 제압할 수 있다는 판단이셨던 것 같습니다.”

“아, 그건 성에 있던 악마계약자들이 전부 죽어서 악마들이 날뛴 것일 겁니다.”

“예. 상황이 끝난 후 조사한 결과, 저희도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비푸릿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자의 죽음은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시신은 효수해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진 질문은 역시 이것이었다.

“…악마기사께선 어찌 되었습니까?”

악마기사를 상대했던 38인 중 사망자 없이 부상자만 나왔단 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그게 꼭 맞으리란 법은 없어서.

인퀴지터는 미루고 미룬 끝에, 겨우 그에 대한 것을 물었다. 용사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사제가 고할 말이 조금 무서웠던 것 같다.

“그분은…….”

그리고 사제의 표정이 흐려졌다.

“…주교께서 사형을 주장하셨으나 아크메이지께서 반대하신 끝에 임시 봉인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인퀴지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늙어서 고생이군…….”

아크메이지는 나열해도 끝나지 않을 일 목록에 잠시 뒷목을 주물렀다.

무리해서 300명이나 이끌고 왔건만, 그마저도 부족하단 게 그녀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이것은 현자의 지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재해에 휩쓸린 이가 아무도 없음이 천운인가…….”

늙은 샤기는 악마기사에 빙의한 대악마가 성을 날려 버린 순간을 잠시 돌이켜 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40명만 이끌고 들어간 것과 나머지 인원을 성 근처까지 데려오지 않은 건 참 운 좋은 선택이었다.

성 입구까지 그들을 끌고 갔다면 성이 날아갈 때 그들도 같이 죽었을 것이다.

“…아무도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요행은 거기까지일 것이다. 흔적조차 없이 소멸했기에 알아볼 방도가 없을 뿐, 그녀는 그곳에 정말 아무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은 그녀가 이끌던 이들과 인퀴지터, 도적의 생존으로도 과했다.

“공격이 비껴 나간 것인지…… 비껴 나가도록 한 것인지.”

아크메이지는 성을 돌아보았다. 성은 모종삽으로 밑동을 살짝 남기고 푹 파낸 것처럼 윗부분이 뻥 뚫려 있으니.

그건 정확히 인퀴지터가 공격을 막아 낸 흔적이자, 검격이 그들보다 조금 더 윗부분을 노리고 들어간 자국이다.

비껴 나간 것과 비껴 나가게 한 것 사이를 고민하는 이유기도 하다. 남아 있는 벽의 높이가 사람이 엎드렸을 때의 높이와 거의 엇비슷하다.

그녀가 교단에 사람이 휘말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대신, 희생자는 아무도 없노라 단정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악마기사가 멀쩡히 깨어난다면, 그리고 그가 보인 가능성대로 악마를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이번에 그가 죽였을 목숨 이상을 살릴 수 있다.

“…죽은 자가 있다면, 그들에겐 미안하게 됐어.”

상대적 가치를 잣대로 들이민 순간 선은 유명무실해진다던가. 그러나 지혜는 꼭 선함에 있지만 있지 않으니.

그녀는 현자로서 그녀만의 최선을 매듭지었다. 올바르진 않을지언정 후회는 없는 결정이었다.

“흠.”

…후회는 없지만 조금 두려운 것은 있다.

그녀는 잠시 상기한 것만으로도 뻣뻣이 굳은 손가락을 풀었다. 악마는 악마였다. 일격을 두고 이렇게나 사람을 위축시키다니.

“아크메이지님!!”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좋다 싫다기보다는 응당 왔어야 할 일거리가 이제 도착했구나 인식한 쪽에 가깝다.

“계속 작업하게.”

“예.”

그는 마법사에게 그리 이르며, 작업하던 것을 힐끗 바라보았다. 건물을 밀어 버리는 것으로 마련한 공터 한가운데에는 악마기사가 구속되어 있다.

그녀의 감독하에 마법사들이 하는 일도 구속 마법진을 더 강하게 보강하는 것이다.

“악마기사를 봉인 중이시라고…….”

그사이, 쇳소리와 함께 다가온 이가 곧 본인의 동공을 확장시켰다. 그녀의 시선은 봉인된 사내에게 닿아 있다.

다만 융통성이 없을 뿐, 꽤 명석한 데다가 봉인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도 아는 사람이 인퀴지터라.

그런 그녀가 새삼 봉인에 놀랐을 리는 없다. 하면 역시 인퀴지터가 놀란 부분은…….

“저, 저 칼은 무엇입니까?”

악마기사의 복부를 관통한 채로 존재하는 칼 때문이리라.

“그 스스로 박아 넣은 것입니다.”

“스스로……?”

아크메이지는 인퀴지터의 기억이 어디서 끊겼을지 대충 짐작했다.

악마기사가 도적을 살려 둔 채 대신 자해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런 식으로 되묻진 않았을 터였다.

“예, 그 스스로.”

“그런…….”

악마기사가 스스로 자해했다는 소릴 들은 인퀴지터가 눈을 떨었다.

그러나 자해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할 사람 또한 아니기에, 인퀴지터는 끝내 눈의 흔들림을 다잡았다.

“하지만, 저대로 두면 과다 출혈로 죽을 겁니다.”

“설마 그리 내버려 두겠습니까. 걱정 마시지요. 치료는 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치료란 게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칼 때문에 온전히 낫지 않을 뿐, 그의 회복력은 치료를 크게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인퀴지터가 보여 주는 정도의 재생력은 없어도, 일반인은 분명 능가한 자연 치유력이었다.

“그래도, 저것은 너무합니다. 그는, 그는 이런 대우를 받아선 안 됩니다.”

글쎄. 정말 그럴까?

아크메이지는 인퀴지터를 따라 봉인된 이를 다시 응시했다.

팔다리가 구속된 것을 넘어, 눈과 입마저도 축성한 천으로 단단히 동여매져 있는 사내이지마는 그녀의 시선엔 여전히 부족해 보였다.

그건 그녀가 악마기사를 신뢰하는 것과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악마기사의 무력은 명백히 인간의 평균을 초월했고, 그만큼 위험했다.

악마기사 대신 악마가 깨어날 확률이 0.01%에 국한된다고 해도, 그 확률을 뚫은 순간 그들이 감수할 피해가 너무 압도적이란 소리다.

더불어 그녀는 이 현장의 총책임자기까지 했다. 한 사람의 처지만을 생각해 주기엔, 그녀가 책임지는 목숨이 너무 많다.

“인퀴지터께서 말하셔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무력은 인퀴지터가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 구속을 막으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복부에 박힌 칼만큼은 제거해도 되지 않느냐 묻는 겁니다.”

그러나 인퀴지터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서 더 까다로웠다.

날뛴 전적이 있기에 봉인은 찬성하되,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기에 칼은 제거하길 바라는 이를 뭐라 설득하겠는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닌 것도 맞는데.

“칼까지 박으신 줄은 몰랐지만…… 최소한 마지막 순간, 악마기사가 자의로 공격을 틀었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악마추종자나 해적 외 사망자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까지. 전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그것이 우연이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속식을 약하게 해 달라거나 풀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최소한의 인도적인 대우라도 부탁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마저도 불가능합니까?”

“…아직은 손이 부족합니다. 좀 더 상황이 안정되면 치료를 행해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결국 아크메이지는 한발 양보해 주기로 했다. 기실, 그녀 또한 이 처우가 찝찝하기도 했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두고 ‘그래선 안 된다’라고 질타할 순 없어도 올바르단 말 또한 못 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신 인퀴지터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인퀴지터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 있었다.

이것을 거절했다고 부탁을 안 들어줄 위인은 아니지만 인간관계란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평탄한 법이다.

“무엇입니까?”

“별것은 아닙니다. 도심의 악마를 잡는 데 인퀴지터의 힘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아니, 그것뿐일까. 말은 안 했을 뿐, 인퀴지터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은 꽤 많다.

도시 곳곳에 퍼진 시신과 부정한 땅을 정화하는 것도, 아직 갇혀 있을 사람들을 이곳까지 이송해 오는 것도, 도시 바깥의 악마를 처리해 길을 뚫는 것도 인퀴지터가 나서야만 수월해지니까.

물론 아크메이지가 나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는 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할 일은 더 많았다.

생존자를 다독이고 그들의 의식주를 준비하는 것부터, 후방에 물자 보급을 요청하는 일,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었을 악마추종자 색출, 패망의 기운이 보이자 항복한 이들의 처우 결정, 사망한 악마추종자들 시신 정리 등등 말이다.

때문에 그녀는 이 도시를 공략하느라 무리했을 인퀴지터에게 나머지 일을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인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건 부탁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 말하실 건 압니다. 다만…… 제대로 쉬지도 못하신 상황 아닙니까. 쓰러지신 후 고작 8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괜찮습니다. 쉬지 못한 건 저뿐이 아닙니다. 그런 마당에 제 의무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합니까.”

“예. 악마기사께서도 이러셨을 겁니다.”

아크메이지는 머리카락이 또 한 번 잘려 나갔음에도 여전히 빛나는 이를 보았다.

이번 사건으로 악마기사를 쳐내려 들지 않는 게 다행인가 싶다가도, 악마기사를 향한 과도한 존경이 슬슬 걱정되었다.

만약 악마기사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저 동경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싶던 까닭이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과도하게 힘줄 생각 없습니다. 제가 쓰러지는 것보단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음을 아니까요.”

“…아주,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더라도 인퀴지터가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애시당초 악마기사가 깨어나지 않을 거란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녀도 그 사내를 믿었다.

“…그러고 보니 도적은 어디 갔습니까?”

그러다 잠깐, 막 떠나려던 모습의 인퀴지터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물어볼 만한 질문이었다.

단지 답하기가 궁할 뿐이지.

“아, 그는…… 제가 맡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 있는지도 아십니까?”

“…잘 모릅니다만. 그는 왜 찾으십니까?”

아크메이지가 도적에게 맡긴 임무는 따지자면 인퀴지터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일은 아닌지라.

사정을 설명해 준다면 납득은 하겠으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벌어질 것이다. 요즘 간신히 친해졌는데 거기에 초를 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모르는 체했다.

“그건…….”

그러자 반대로 인퀴지터가 대답이 궁한 얼굴을 했다. 아크메이지는 왜 그런가 하고 짐작해 보았다.

“고, 고맙다고 말해야 하니까요.”

금방 답이 나왔다. 아크메이지의 얼굴에 속절없이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시군요. 다만 제가 그에게 부탁한 일은 굉장히 은밀한 것이니 지금은 찾지 않으시는 걸 권합니다, 인퀴지터. 그가 도시를 떠난 건 아니니 나중에…… 그가 해야 할 일을 마친 후에 전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별개로 여전히 만나게 해 줄 수는 없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팔랑팔랑 손을 저으며 인퀴지터를 배웅했다. 그리고 인퀴지터가 멀어졌을 때, 그녀는 다시 제 일로 고개를 틀었다.

“아크메이지님! 안전지대 결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쪽이 더 먼저입니다! 악마추종자들이 개발한 물건과 그 자료들을 발견했습니다! 변종 좀비와 저주 항아리에 대한 연구 같습니다!”

…무어, 추가로 일거리가 몰려오는 걸 미리 알아챈 건 아니었다.

아마도.

* * *

아크메이지가 본인의 일에 시달리는 사이, 데스브링거는 골목 속에 몸을 숨겼다. 아크메이지가 그에게 맡긴 임무를 위해서였다.

『미안해.』

그렇다고 그가 임무에만 마냥 집중하느냐면 그건 또 아닌지라.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기억을 곱씹었다. 단단히 구속되어 현재 진행형으로 봉인이 더해지고 있을 사내의 모습 위로, 새벽노을이 맺혀 있던 속눈썹과 그 아래서 흐리게 반짝이던 회색 눈동자가 계속해서 겹쳤다.

『정말 미안해.』

세상에 그리도 괴리감 드는 사과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영광의 죽음’이란 단어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데,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은 변화가 있을 수 있어?

데스브링거는 그 순간만 떠올리면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때의 악마기사는 분명 악마가 아니었지만…… 동시에 그가 알던 사내 또한 아닌 것만 같았다. 그가 아는 악마기사라면 그런 부드러운 사과 대신 강직한 한마디만을 남겼을 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묘한 위화감이 온전한 위화감으로서 다가오지 않는 건 또 어째서인지.

어쩌면 그리 웃던 얼굴이 너무 무해해 보였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너를 절대 다치게 하지 않아. 네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그 문장을 표정으로써 오롯이 전하던 미소라서, 그래서…….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남을 따르게 할 힘도, 명예도, 권력도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

쓰러진 이를 차마 눕히지도 못해, 자세가 엉거주춤해서 치료하지도 못해.

죽여야 한다며 길길이 뛰는 주교에겐 말 한번 붙여 보지 못했고,─그쪽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해 준 덕에─아크메이지가 겨우 설득한 끝에 봉인이 결정됐을 땐 더더욱 발언권이 없었다.

하다못해 칼만은 뽑아 달라 호소한 것마저도 들어주는 이 하나 없었다.

무력했다.

악마기사가 자신을 죽이려 든 순간에 저항 한번 못 해 봤듯이.

“젠장.”

툭.

데스브링거는 그때만 떠올리면 차오르는 울분에 벽에 머리를 대었다.

얄팍한 자괴감이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아 손을 흔들었다. 이 여정에 합류하기 전까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아무렴, 이들과 함께하기 전만 해도 그는 따지자면 ‘포식자’ 쪽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명예나 권력이 없을 뿐, 밤과 고요가 함께할 때면 온갖 쓰레기들의 처형자로 존재할 수 있었으니 분명 그러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보 수집과 진상 파악이 그의 재주 중 하나라곤 하나, 처형자로서 존재할 수는 없다.

이들과 함께 다니겠다 결정 내릴 때만 해도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던 거다.

저들과 그가 사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저들이 인간이어서 그가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인 이들만 그가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빌어먹을,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그러다 잠깐, 그가 숨어 있던 골목 바깥에서 상념을 깨 버리는 소리가 났다.

기어오르며 뇌를 적시려던 무기력함이 순식간에 억눌러지고, 차가운 이성이 오감에 집중했다. 맡은 바 임무에 집중한 것이다.

“조용히 해, 죽기 싫으면.”

“빌어먹을. 악마추종자들이 당할 줄은 몰랐는데…….”

그는 그늘에 녹아든 채 놈들의 대화를 들었다.

성에 즐비한 시체를 치우고 무너진 건물의 잔재를 옮기는 이들의 불평불만은 참 길기도 길었다.

“제대로 즐겨 보지도 못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한 게 어디야?”

“그건 그렇지만…….”

그들의 정체를 말하자면, 악마추종자들을 따르다가 그들이 패배하자 귀신같이 항복한 해적들이니.

고향을 팔아먹다가 자기네가 질 것 같으니 백기 드는 게 매국노에 이어 변절자까지 2종 세트다.

“어서 옮기기나 해. 일 못하면 놈들이 우릴 죽일지도 모르잖아.”

그런 재활용 불가 쓰레기들이 본대가 도착했는데도 어째서 살아 있느냐 묻는다면 글쎄.

저들을 처형하겠다고 나서기엔 살아남은 해적이 너무 많았다고 답하겠다. 저들을 다 죽이려면 본대도 피해를 제법 각오해야 할 정도로.

“설마 죽이겠어? 우리들 수가 몇 명인데?”

해서 아크메이지는 추가 지원이 올 시간을 벌기 위해 한때의 그가 그랬듯, 거짓 미끼─사면─로 잠시 휴전을 타협 보았고…… 이왕 살려 두는 김에 노동력으로 써먹기로 했다.

“거기에 시키는 대로 일도 하고 있잖아! 이런데도 우리를 죽이면 안 되지!”

그 결과가 지금 지나가는 두 사람을 비롯한 머저리들이다.

본인들이 저지른 죄는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린 항복했고, 심지어 너희가 시키는 대로 노역도 좀 하고 있으니 우린 살 수 있어!’라고 자신하는 머저리들.

“여차하면 일반인들을 인질 삼아 도망치면 그만이야.”

심지어 저런 생각을 하는 작자도 있다.

참 우스운 놈들이었다. 미리 퇴로를 짜 두는 게 현명한 일은 맞는데, 저들이 무슨 염치로 퇴로를 짠단 말인가. 순순히 죽어도 모자랄 판에.

이럴 줄 예상하고 관찰 및 감시를 부탁한 아크메이지가 옳았다.

진짜 악질인 놈들은 제가 잘못한 것에도 진심으로 남이 문제라 여기기 일쑤다.

“민간인들 있는 곳은 접근 금지잖아.”

“괜찮아. 아는 놈 중 몇 명이 거기 숨어 있어. 걔네들을 시켜서 인질 잡아오라고 하면 되지.”

“눈치 하난 존나 빠르네. 언제 숨었대?”

“몰라. 아마 저 희멀건 놈들이 사람 구하러 돌아다닐 때 은근슬쩍 끼어든 거겠지.”

“젠장, 나도 그럴걸.”

왜, 저들이 스스로 실토한 내용처럼, 살기 위해 저들이 학살했던 일반인인 척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쉽게도…….”

그러나 이런 일은 그가, 그리고 그와 같이 온 도적들이 한 수 위다.

“다 들켰네요.”

이미 민간인 사이에 숨어든 해적들은 대부분 색출되었으니.

그들이 지금 찾는 건 만일의 상황에 바람 잡으며 폭동을 선도할 수 있는 불만 종자들이다. 안 그래도 불안불안한 마당, 시한폭탄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이들을 살려 둘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고로 저 녀석들도 정리 대상이다.

데스브링거는 정보를 꾹꾹 눌러 담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쿠크리가 악마기사의 손에 박살 나 버렸다는 사실은 반 박자 뒤에 자각되었다.

“흠.”

아쉽긴 하지만 상관없다. 별로 아끼는 무기도 아니었거니와…… 그는 무기가 없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그의 길지 않은 생 중에서도 절반 가까이를 그런 행위로 보냈으므로.

“벽창호가 알면 까무러치겠네…….”

데스브링거는 그 지점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가 초인들의 전투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맞지만…… 이런 솎아 내기는 악마기사도, 용사도, 아크메이지도 불가능하다. 오직 그만이 가능하다.

“근데 뭐 어쩔 거야.”

그리고 오직 그만이 가능하기에, 이 파티에서 그가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잔소리 듣긴 싫으니 용사에겐 비밀로 하겠지만, 어쨌든.

데스브링거는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귀를 쫑긋거렸다.

목표는 단 하나. 악마기사가 깨어나서 추가로 할 일이 없도록, 저것들을 미리 다 정리하는 것.

“아, 오랜만에 쓰레기 정리하겠네.”

정보길드에서도 아주 소수만이 하사받은 이름, 죽음 전달자DeathBringe가 도시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악인들이 심판받을 시간이 도래했다.

* * *

“……?”

“왜 그러십니까?”

“음…… 방금 비명 소리가 난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 뒤편은 마법사들이 결계를 설치함으로써 악마의 진입을 막아 버린 구간이다.

급조한 것이다보니 악마들이 조금만 뭉쳐도 뚫려 버리겠으나, 대신 결계가 부서지면 마법사들이 눈치챌 수 있는 구조인 거다.

악마가 결계를 뚫고 사람을 죽인 게 사실이라면, 결코 조용할 리 없다.

“저는 못 들었습니다만…….”

“예, 기분 탓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냥 잘못 들은 것이겠지. 애초에 꺄악 하는 비명 소리도 아니고 컥, 하는 정도의…… 바람 빠지는 소리였으니까.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신 건…….”

“그건 아닙니다.”

이 땅에 도착한 이래,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여기까지 달려온 건 사실이지만 그건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녀가 전열에 나서 유독 고생했다손 쳐도 뒤로 물러나고 싶진 않다.

“그보다 준비하십시오. 악마가 보입니다.”

대신 그녀는 도심에 남은 악마와 추종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마침 도시 그늘에 숨어 있는 가고일이 보였다.

“무리하지 마시지요.”

“이 정돈 괜찮습니다.”

몸 상태가 만전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몸을 못 가누는 것도, 신성력을 못 끌어올릴 정도도 아니다. 단지 가용 가능한 최대치가 일시적으로 줄었을 뿐이다.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래도 남은 잔당을 처치하는 데 있어 평소의 최대치까진 필요하지 않다.

인퀴지터는 과부하가 오지 않도록 기도를 조절했다. 악마기사를 상대할 때에 비하면 1/8도 채 되지 않을 양의 기운이 그녀의 몸이 스며들었다.

미처 낫지 않은 근육통에 약간의 열감이 더해졌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정말로 괜찮습니다.”

신성력이 사용자에게 아픔을 주는 건 사실이나, 기실 과하게 사용하지만 않으면 몸살 기운 오는 정도로 그치곤 한다.

정신이 혼몽해질 정도의 통증조차 버티는 그녀에게 이 정돈 인내할 것조차 못 된다. 봉인에 겹겹이 싸인 채로 악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악마기사를 생각한다면 더욱 엄살 부릴 수도 없다.

인퀴지터는 강경히 걱정을 차단한 후 혼자 나아갔다.

끽!

그러나 몰래 접근하는 데는 재주가 없던 까닭일까. 가고일이 깨어나고 말았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 잠시 도적을 떠올렸다. 대악마의 뒤조차 점했을 정도니 그치라면 이놈에게도 들키지 않고 움직였겠지.

잠깐 부러움이 들었다가, 금세 흩어졌다.

은밀히 걷는 재능은 없을지언정 그녀에겐 오히려 이게 편하다. 더불어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흡!”

인퀴지터는 바닥으로 내려와 그녀에게 이를 드러내는 놈을 보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쿵. 메이스에 얻어맞은 전방의 땅이 요동쳤다.

끼이익!

가고일이 성급히 날아오르고자 했으나 일순 꺼진 지반에서 비행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메이스에서 뻗어 나와 대지를 타고 흐른 신성력이 가고일의 자리를 휩쓸었다.

“대단해……!”

“저런 게 가능하다니…….”

뒤편의 사제들과 이단심문관들이 경악해했다. 이해 못 할 대목은 아니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단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신성력을 사용하는 자는 없었다. 보다 정확히는 이렇게 쓸 일이 없던 쪽이겠지만.

“용사시여,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새로운 사용법이군요. 놀랍습니다.”

아무렴, 신성력은 보호와 가호, 치유에 특화된 힘이다.

더구나 신성력을 많이 보유한 자들은 이단심문관보단 사람들을 치유하고 땅을 정화할 수 있는 사제 쪽으로 많이들 나아갔으니.

제 몸 가호하고 보호하는 데만도 빠듯할 이단심문관들이 이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리 없다. 이건 순전히 그녀가 이단심문관이되 규격 외의 신성력을 다룰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마저도 악마기사가 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도 저럴 순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겨우 착안한 쪽이고.

“잘한다면…… 커다란 무기가 되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신성력이 너무 많이 들고 정형화되지도 못했다.

좀 더 많이, 다양한 방식으로 써 보며 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 일로 하여금 그녀는 그녀 자신의 부족함을 너무도 많이 실감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지요.”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인퀴지터는 가용 가능할 것 같은 양을 끊임없이 가늠하며 다시 나아갔다.

그도 그럴 게, 남을 돕는다는 이유 외에도 그녀에겐 쓰러져선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저기에도 악마가 있습니다!”

“사살합니다. 그리고 한 분은 저쪽 붉은 지붕 집 안에 가 주십시오. 안에 사람이 하나 있을 겁니다. 드래곤 잡고 다시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주교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제들은 악마기사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무리해서 또다시 쓰러져 버리거든…… 그들은 악마기사를 막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그에게 죽음을 선고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당부했다고 해도 그렇다. 용사란 직위는 교단의 인물들을 설득하기 용이할 뿐, 그들의 상급자가 아니다.

그들이 그녀의 부탁을 무시한다면 그녀는 막을 도리가 없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하므로 인퀴지터는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차근차근 나아갔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진 못했을지언정 속도를 조절하며 전진하니 누적되는 피로도 나름 버틸 만했다.

이 빠르기라면 내일 아침까진 도시를 깨끗이 정리하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게 악마기사가 깨어나기 전에 이뤄진다면…… 그녀가 악마기사의 봉인 앞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주교님도 막을 사람이 없단 이유로 함부로 그를 해하려 들지 않을 터.

온전한 목표를 얻어 낸 녹안이 반짝였다.

악마들이 도시로부터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건 그 직후의 일이다.

하루하루가 빠듯하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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