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보상금
정도연은 위장을 마치고 나간 한명호와 구조팀을 바라보다가, 거실 창문 앞으로 다가가 밖을 한번 내다보았다.
“7, 8층 정도네⋯⋯.”
그녀가 약간 놀란 듯 중얼거렸다.
유적 사냥꾼인 정도연은 언제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도망칠 수 있도록 거리 근처 2, 3층에만 숙소를 잡아 왔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에게 뭔가 설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용여홍이 얼른 입을 열었다.
“허를 찌른 거지. 이러면 주요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
정도연은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조사가 시작됐다면 결국 여기도 그 대상에 포함될 텐데?”
“우린 이미 그 기척을 알아차리고 그때쯤 준비를 다 마친 상태겠지.”
이 순간 용여홍은 평소 자신에게 설명해주던 팀장 장목화의 마음을 실감했다. 기쁘기도 했고, 약간의 자신감과 함께 기대도 생겼다. 더 이상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정도연이 알아서 깨우치길 바라는 기대감이었다.
정도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어떻게 도망쳐?”
이번엔 백새벽이 간단히 설명했다.
“군용 외골격 장치가 있잖아. 이 정도 높이는 아무것도 아냐.”
특히 이 건물은 발코니와 파이프 등 각종 구조물이 튀어나와 있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가 있다면 7, 8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정도연은 잠시 스스로가 너무 촌뜨기처럼 느껴졌다.
“좀 앉아도 될까?”
정도연이 거실에 있는 1인용 소파를 가리키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 사실 전에 받은 충격으로 그녀의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려워할 필요 없어.”
백새벽은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대꾸했다. 그녀는 이 건물의 높이에 힘입어 주위 거리 상황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이는 구조팀이 일부러 높은 층의 방을 구한 이유이기도 했다. 저격수가 포함된 팀으로서 높은 곳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군용 외골격 장치도 있으니 철수 노선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내 정도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마냥 편하게 있을 수는 없잖아.”
용여홍은 한참의 시간을 들인 후에야 언젠가 구세계 콘텐츠에서 본 한 표현을 떠올렸다.
‘꽤 뻔뻔하네.’
곧이어 백새벽이 돌아서서 느릿하게 자리에 앉는 정도연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건 그것뿐이야?”
구조팀의 내력이나 목적은 안 궁금한가?
몇 초간 고민하던 정도연이 자조하듯 웃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둬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우리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백새벽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지프 안에서, 운전 중인 장목화가 룸미러로 한명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널 찾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네?”
뒷좌석 왼쪽 자리에 앉은 한명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왜 우리한테 연락 안 했어.”
보조석의 성건우가 물었다.
한명호는 침묵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목화가 웃었다.
“괜찮으니까 얘기해 봐. 다들 같은 배를 탄 처지에 내외할 건 없잖아.”
한명호는 옆자리의 게네바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날 왜 찾은 건데?”
“관심이 있었으니까. 지켜보고 싶었으니까.”
성건우가 더 이상 사실일 수 없는 사실을 고했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다른 문제였다.
한명호는 가만히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난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는 오히려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너희도 애쉬랜드인이니 들어봤을 거야. 이유 없이 잘해주는 건 사기꾼 아니면 도둑놈뿐이라고.”
장목화가 웃었다.
“너한테 훔쳐 갈 게 뭐가 있다고?”
한명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장목화는 한명호가 친구를 자칭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난 두 갈래 상처 중 적어도 하나는 그렇게 남은 것일 터였다.
한명호가 아무 이유도 없이 친하게 구는 사람을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성격도 좀 삐딱하니, 타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겠지.’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사이, 성건우도 웃으며 덧붙였다.
“정말로 무슨 사기를 칠 마음이었다고 해도 우리 중에 누구도 너한테 피해는 못 입힐걸? 음, 작은 빨강이는 또 모르겠네. 불운의 대가니까.”
한명호는 알아듣지 못할 말은 받지도 않고 감정적으로 대꾸했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냐. 너희는 내력이 불분명해. 난 너희 때문에 더 큰 문제에 휘말릴까 걱정된다고. 너희 정신상태도 정상은 아닌 거 같고.”
“정상이 아닌 건 얘뿐이야. 아무튼 고맙다.”
장목화가 공인된 환자와는 얼른 선을 그었다.
하지만 정작 그 환자는 매우 의아해했다.
“우리는 아주 정상이야. 대체 뭘 보고 우리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착각하게 된 거야?”
성건우는 장목화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시 ‘우리’로 모두를 묶어버렸다.
한명호 역시 ‘우리’가 구조팀 전체를 지칭한다고 알아듣긴 했지만, 이 말을 잡고 늘어지기보단 잠시 고민 끝에 물었다.
“정말로 날 도울 작정이야?”
대화가 이미 시작된 이때, 일단 확인부터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방면에 대해 거리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한명호 자신의 생명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이길 바라?”
성건우가 웃으며 반문했다.
침묵하던 한명호가 재차 물었다.
“왜지?”
성건우는 진지하게 답했다.
“첫째,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
한명호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둘째, 우리는 분명 너한테 골칫거리를 안겼고, 네 계획을 망쳤고, 임무에 성공할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정확히 한명호가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한 말을 성건우가 대신해주었다.
그 사이 성건우의 표정은 점차 진지해졌다.
“셋째, 우리의 이상은 전 인류를 구원하는 거니까. 초봄 마을 주민들 역시 인류의 일원이고,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나쁜 짓을 한 게 없으니까.”
한명호는 성건우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걸 다시금 확신했다.
이때 장목화가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도 지금 당장 이 도시를 빠져나가야 위험을 피할 수 있어. 겸사겸사 너를 도우려는 거지.”
한명호는 앞자리에 앉은 장목화, 성건우를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노래 들을래?”
성건우가 친절하게 물었다. 이미 손은 벌써 전술 배낭에서 소형 스피커를 꺼내고 있었다.
“됐어.”
한명호는 신중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성건우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겐, 더 이상 연기할 필요 없어. 우린 다 친구니까.”
일반 로봇인 척 줄곧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던 게네바는 금속 관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눈으로 붉은빛을 번득였다.
“상응하는 튜토리얼과 기기만 있다면, 내가 직접 장기 이식 수술을 시도해볼 수 있다.”
화들짝 놀라 한명호는 몸까지 옆으로 튼 채 이 로봇을 바라보았다.
“이, 이거, 의료 영역 지능 로봇이야?”
이렇게나 기능이 많고 움직임이 유려한 로봇은 대형 세력에서나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소인원인 팀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웠고 능력도 제한돼 있었다.
“아니, 난 진정한 지능 로봇이다. 인간과 같은 학습 능력, 그리고 그보다 높은 능률을 자랑하지.”
게네바는 한명호를 향해 은흑색 금속 손을 뻗었다.
“소개하지, 게네바다. 일찍이 타르난 시장이자 지하 방주 관리 위원회 초대 회장이었다.”
멍한 표정을 드러낸 한명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머신 헤븐 출신인가?”
레드스톤 마켓 치안관이자 마을 경비대 대장이었던 한명호는 역시 머신 헤븐과 타르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태껏 게네바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건, 구조팀에 그런 존재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네바가 끝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걸 보고, 잠시 망설이던 한명호는 결국 그 금속 손을 맞잡았다.
“맞아.”
게네바는 인간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막 질문을 이어가려던 한명호는 돌연 가는 방향이 이상하단 걸 발견했다.
“안타나 스트리트로 가는 거 아니었나?”
안타나 스트리트는 서북쪽, 그러니까 공장 구역 근처에 있는데 지프는 현재 동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곳도 그린올리브 구역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예정된 목적지는 아니었다.
“먼저 들를 곳이 있어.”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 * *
한참 후, 지프는 휴고 여관 밖에 멈췄다.
장목화가 한명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같이 들어가자. 겐, 차 좀 지켜줘.”
휴고는 여관으로 들어온 구조팀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래된 파란색 가방 하나만 꺼냈다.
“너희가 요구했던 거다.”
그는 약간 불룩하게 부푼 작은 가방을 장목화 앞으로 밀어주었다.
안에는 포카스가 약속한 6천 오레이가 들어있었다.
가방을 받고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슥 훑어본 성건우는 액수가 맞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전술 배낭에 쑤셔 넣었다.
‘상당한 금액인데.’
곁눈으로 지퍼 근처 지폐 다발을 본 한명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 있나? 최근 꽤 큰 문제에 봉착한 것 같던데.”
휴고는 포카스를 대신하듯 물었다.
장목화가 웃었다.
“아직은 없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안전하게 도시 밖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는 도움을 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포카스가 어느 정도 준비를 해놓을 수 있게 미리 언질도 했었다.
“좋아.”
휴고가 덤덤하게 답했다.
장목화는 더 이상의 말을 늘어놓는 대신 돌아서서 밖으로 향했다.
현재 장목화도, 성건우도, 한명호도 위장한 상태이긴 해도 혹시 또 누군가와 맞닥뜨릴지도 모를 여관 홀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 * *
구조팀은 할 일을 마친 후에도 곧장 안타나 스트리트로 향하는 대신 레드울프 구역의 스턴 스트리트로 가서 테렌스를 만났다.
이번에 한명호는 게네바와 함께 차에 남아있었다.
뒷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간 성건우, 장목화는 성건우 형제회 구성원 한 명과만 만나 그의 도움 아래 테렌스를 마주했다.
“마지막 6천 오레이야.”
장목화는 방금 받은 현금을 테렌스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번엔 파란색 가방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테렌스는 수금부터 하는 대신 약간의 혼란과 충격이 어린 눈으로 장목화와 성건우를 한참이나 살폈다.
그는 이 친한 친구들이 질서의 손에게 대대적으로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감히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거나 빌린 돈을 갚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 속에서도 빌린 돈을 잊기는커녕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와 빚을 갚다니! 이건 무슨 정신이란 말인가!
장목화가 웃으며 일렀다.
“우리 기계 팔.”
그제야 정신을 차린 테렌스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돈이야 상황이 좀 안정된 뒤에 갚아도 되는데⋯⋯.”
사실 테렌스는 상대가 남은 돈을 떼어먹고 날라버리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럼 6천 오레이에 T1형 다기능 기계 팔도 한 대 마련한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훨씬, 정말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서야 쓰나. 한 약속은 지켜야지.”
성건우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래.”
지폐를 한 번 헤아린 테렌스는 못내 아쉽다는 듯 위층 금고에서 구조팀이 맡긴 기계 팔을 꺼내왔다.
* * *
장목화와 성건우가 기계 팔을 가지고 차로 돌아오자, 순간 한명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신형 기계 팔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는 건, 기계 심장을 얻을 능력도 있다는 거야. 시간 안에 구할 수 있을지가 문제긴 하지만.”
한명호가 무슨 대꾸를 하기도 전, 그녀는 운전석의 성건우를 돌아봤다.
“이제 안타나 스트리트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