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차
퍼스트 시티를 벗어나는 것, 이 순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한명호, 정도연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퍼스트 시티를 떠나지 못하면, 초봄 마을을 영원히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북안으로 가는 건 제일 어려워. 퍼스트 시티에서 다리를 봉쇄하고 배와 드론을 이용해 강을 순찰하기만 해도 금방 잡힐 거야.”
한명호는 퍼스트 시티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뒤이어 정도연이 덧붙였다.
“동쪽으로 이동해 골든애플 구역에 접근해봤자 검문만 엄격해져. 남문을 통해 도시를 빠져나가면 곧장 장원 지대가 나오지. 거긴 오가는 행인들이 많으니 이 방법도 고려해볼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질서의 손이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어. 분명 그쪽에도 검문소 여러 개를 설치할 거야.
비교해보면 서쪽으로 가서 공장 구역에 진입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야. 매일 이른 아침과 저녁 무렵에 수많은 노동자가 출퇴근해. 질서의 손에서 인력을 10배로 늘려도 그 많은 사람을 다 검사하진 못하지. 공장 구역에 들어가서 거기 환경을 이용한다면 도시 밖으로 나갈 기회도 있을 거야.”
공장 구역은 굉장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의미상의 교외까지 포괄하고 있어, 각종 건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이를 전면적으로 봉쇄한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얘기였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방법이네. 근데 문제가 두 가지 있어. 첫째, 출퇴근하는 노동자 중 자전거를 타는 이는 소수야. 대부분은 걸어서 이동해. 만약 우리가 차로 이동한다면 확연히 눈에 띌 거야.
그렇다고 차를 포기한다? 그럼 짐을 못 가져가. 필요한 무기랑 식량 등등의 물자를 옮길 방법이 없다면 그것도 좋은 수라곤 할 수 없어.”
공장 구역을 오가는 이들 중 차로 이동하는 이들은 공장의 관리층과 임무를 받으러 온 유적 사냥꾼뿐이었다. 평범한 노동자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기에 그런 이들을 검사하긴 매우 수월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장목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둘째, 이번에 질서의 손에서 출동시킨 인원에 굉장히 강한 각성자가 있어. 우리가 출퇴근 중인 노동자 사이에 섞여들어도 그들을 속일 수 있을까?”
이는 포카스 장군으로부터 받은 교훈이었다.
한명호와 정도연은 그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매우 위험한 적이 있다는 것만 파악했을 뿐, 그가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는 짐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설명에 나섰다.
“명호, 어인 신사 기억해?”
“기억하지.”
한명호의 표정에 진지한 빛이 더해졌다. 그는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던 상대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장목화보다 앞서 입을 열었다.
“질서의 손의 강력한 각성자는 어인 신사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해. 심지어는 10배 이상이라고 봐도 돼.”
“⋯⋯.”
한명호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성건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디마르코와 비슷한 수준일 거야. 근데 난 완전한 상태의 디마르코를 본 적이 없어서,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모르겠네.”
“디마르코?”
오래도록 레드스톤 마켓 치안관이자 마을 경비대장으로 지냈던 한명호는 지하 방주와 디마르코에 대해 당연히 잘 알았다.
그 신비로운 지하 방주의 주인이 이상하리만치 강력한 각성자였다고?
“응, 우린 그 사람이랑 한판 붙은 끝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유물을 손에 넣었어.”
성건우는 회상에 잠겼다.
한명호는 그런 성건우의 사고 흐름을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유물?”
“응, 구슬이었어. 지금은 없어졌고. 지하 방주 종들은 다 주인이 됐지!”
성건우는 있던 일들을 그대로 고했다. 매우 자랑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지하 방주가 그렇게 바뀌었다니, 여태 수많은 일을 겪었던 한명호도 지금 들은 이 이야기가 가장 믿기지 않았다.
“디마르코는 지금 어떻게 됐는데?”
“죽었어.”
성건우의 답은 간결하고도 확실했다.
그제야 한명호는 자신이 레드스톤 마켓을 떠난 뒤 구조팀이 지하 방주에 들어가 디마르코를 죽였다는 걸 어림짐작했다.
‘그렇게나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고, 성공하기까지 했다고?’
한명호의 얼굴에 충격의 빛이 그대로 드러났다. 다음 순간 현재 상황을 떠올린 그는 구조팀이 퍼스트 시티에 온 목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저들은 정말 퍼스트 시티를 노린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도 몰라!’
이내 장목화는 지하 방주, 디마르코, 어인 신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연의 모습을 보고 떠보듯 물었다.
“네가 생각하기엔 북안 불모지에서 가장 위험한 강도단이 누구 같아?”
“노이스.”
정도연이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물자를 약탈당한 유적 사냥꾼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훌륭한 무기를 갖춰 충만한 화력을 자랑하는 그들 사이엔 각성자도 있었다. 그들의 실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지난 오랜 시간 동안 퍼스트 시티 정규군 포위망에서 번번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이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질서의 손의 위험한 각성자는 혼자 노이스 강도단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 물론 그들이 목표를 찾아낸 상황을 전제로 했을 때 이야기지.”
“⋯⋯.”
정도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드디어 그 위험한 각성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실감한 듯했다.
질서의 손은 바로 눈앞에 자리한 이 팀을 잡으려고 그렇게나 강력한 각성자를 파견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 대체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기에? 대체 얼마나 강력한 실력의 소유자이기에?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정도연의 머릿속에 일련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급기야 이들과 합작하기로 한 것이 실수는 아니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구조팀이 일으킨 골칫거리는 앞으로 초봄 마을에서 마주할 골칫거리보다 몇 배, 아니 그냥 훨씬 더 컸다.
하지만 지금 다른 도우미를 구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정도연은 결국 이런 걱정도 애써 마음 깊은 곳으로 억눌러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명호와 정도연이 더 좋은 방법을 내놓지 못하자 장목화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급할 필요는 없지. 어떻게 퍼스트 시티를 빠져나가든 일단 며칠은 숨어있어야 해. 우리한테 아직 생각할 시간은 충분해.”
그와 동시에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포카스 장군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아니면 마이어스 원로를 찾아가? 음, 일단 회사의 답을 기다려보자.’
반고 바이오에서는 아직 구조팀의 향방을 결정하지 않은 채 이사회가 소집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목화는 한명호를 찾아 나서기 전, 최근의 정세 변화와 구조팀의 현재 상황을 전보로 작성해 회사에 보냈었다.
이는 회사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구조팀의 연락 담당자였던 정보원 가리발디에게 최대한 빨리 숨어있으라고 알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다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장목화가 약간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람이 많아졌으니 차도 한 대 더 필요해.”
“훔칠까요?”
백새벽이 의견을 냈다. 이제 그녀는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원래 스타일을 드러낼 정도로 솔직해져 있었다.
본디 평생 위장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법이었다.
한명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때, 정도연이 동조하고 나섰다.
“더 이상 렌트할 수는 없을 거야. 지금쯤 모든 렌터카 회사 사장과 직원에게 통지가 갔겠지. 너희를 문전 박대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차를 빌려 갔는지 질서의 손에 바로 신고할 걸.”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는데⋯⋯.”
용여홍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건우의 추리 광대가 있는 한, 남을 시켜 대신 차를 빌리게 하는 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용여홍도 차를 훔치는 것에 딱히 거부감은 없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차주에게 보상금을 주는 방법도 있고요.”
“그럼 바로 신고하겠지? 우린 그 차를 위장할 시간이 없고.”
장목화는 웃으며 팀원들 제안을 부드럽게 제안을 기각했다.
일단은 성건우 형제회 일원인 블랙셔츠파 세컨드 보스 테렌스에게 차를 한 대 빌릴 계획이었다.
이때 한명호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예비용 차가 한 대 있어. 북안 불모지에서 얻은 거. 후에 기회를 봐서 퍼스트 시티로 가져왔으니 누구도 그게 내 차인지 모를 거야.”
정도연은 의아함이 어린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여태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여서였다.
그러나 한명호가 일찍이 두 번째 거처를 마련해놓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는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모든 일에 있어서 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 순간, 성건우가 갑자기 양팔을 들고 가슴팍 앞에 교차시키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경계하는 마음은 영구히 존재하리라!”
한명호는 돌연 레드스톤 마켓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지난 몇 년간 그가 겪은 갖가지 사건으로 경계란 단어는 마음에 더 단단히 각인됐었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돌아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명호, 그 차는 어디에 있지? 지금 가서 가지고 오자. 일을 끌어봤자 문제만 생기기 마련이야.”
“안타나 스트리트의 어느 주차장에.”
한명호가 사실대로 답했다.
‘공교롭기도 하네.’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백새벽과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정도연이랑 여기 남아있어. 나랑 야, 게네바, 명호가 같이 가서 차를 가지고 올게.”
“네.”
백새벽은 팀장의 결정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 안전 가옥에는 군용 외골격 장치가 있으니 전투력이야 충분히 보장할 수 있었다.
장목화도 구석에 놓인 나무 상자 두 개를 바라보다가 다시 덧붙였다.
“음, 일단 한 대는 우리가 가져갈게. 혹시 모르니까.”
나머지 한 대는 지프에 실려 있었다.
‘저게 뭐길래?’
정도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자를 힐긋 바라봤지만, 의문을 입 밖으로 표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구조팀은 여전히 낯선 존재였다.
“군용 외골격 장치인가?”
그 사이 한명호는 이미 다 상황을 파악한 듯 물었다. 구조팀이 소유한 군용 외골격 장치 중 하나는 바로 그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맞아, 그 후로 두 대를 더 얻었어. 한 대는 디마르코가 줬고, 다른 한 대는 리만한테 샀어.”
성건우가 마치 장난감을 소개하는 듯한 투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정도연은 기함을 했다.
‘군용 외골격 장치? 한 대가 더 있다고?’
군용 외골격 장치라면 정도연도 한두 번 보기만 했을 뿐, 보통은 듣기만 했던 장비였다.
‘이 팀은 정말 강하구나. 어쩐지 질서의 손이 위험한 각성자까지 파견해 그렇게 대대적으로 나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이, 이 사람들이라면 분명 혼자만의 힘으로 노이스 강도단 역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도연의 마음이 조금씩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초봄 마을을 정말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도연은 이젠 구조팀에 뒤따르는 골칫거리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초봄 마을을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퍼스트 시티에 대항해야 했다.
그 사이 방 안에 놓인 상자 하나를 챙긴 게네바는 성건우, 장목화, 한명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