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36화 (436/649)

436화. 제안

성건우도 한명호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 사람이 사명 영역 각성자라는 걸 알고부터 네 심장이 걱정됐어.”

사명 영역의 각성자?

한명호는 본래 레드스톤 마켓 치안관이자 마을 경비대 대장이었다. 그는 경계 교회당과 교류도 했으며 어인 신사와 직면한 경험도 있었다.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이에 관해선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연은 달랐다. 달지기와 각성자에 대해서만 알뿐, 몇몇 교파만 만나본 것이 전부라 영역 구획과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성건우의 설명을 듣는 내내, 정도연은 이들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번에 장목화는 너무 솔직하게 말한 성건우를 꾸짖을 새도 없이 위로부터 건넸다.

“그건 상세한 검사를 통해야만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인 느낌이 기기를 대체할 순 없다고. 주관적인 감정은 실제 상황과 크게 차이가 나니까.”

한명호가 물었다.

“검사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데?”

말을 내뱉자마자 자신의 말투가 너무나 충동적이었음을 깨달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덧붙였다.

“미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이해해.”

성건우가 동감한다는 듯 대꾸했다.

장목화 역시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죽을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가까스로 치료 방법을 찾고 희망을 얻어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내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모든 걸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면, 과연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장목화는 자신이 없었다. 상대에게 설령 악의가 없었다 한들, 계획에 혼란을 일으킨 게 전부 뜻밖의 사고였다고 한들 분노를 참기는 힘들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몸 상태를 검사할 장소에 관한 건 일단 이야기를 피한 뒤, 장목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넌 사실 이미 적합한 심장을 찾았고, 그 비용을 모으기 위한 임무를 완수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거야?”

“그런 셈이지.”

한명호는 의도적으로 정도연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답했다.

“어떤 임무인데?”

성건우가 호기심을 표했다.

이때 침대에서 일어난 정도연이 쭉쭉 스트레칭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임무라는 건 내 고향을 구하는 거야. 보수는 내 심장이고.”

정도연은 구조팀이 한명호에게 상당한 호의를 품고 있다는 걸 파악하고 문제를 똑바로 알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상황에선 다른 도우미를 찾아 초봄 마을을 구하기는커녕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도 못할 터였다.

용여홍이 흠칫 놀랐다. 성건우가 전에 했던 추측이 사실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한명호가 정말로 장기 기증자를 곁에 두고 있었다니!

‘껄끄럽지 않을까?’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보통 사람은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았다.

반면, 백새벽은 정도연에게서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발견한 듯 자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고향을 위해 너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거야?”

정도연이 웃었다.

“희생이라고 할 것까지야. 어차피 버려질 쓰레기를 이용하자는 거지. 나도 죽을병에 걸렸거든. 어차피 내 장기들은 때가 되면 쓸모가 없어져.”

“무슨 병?”

장목화가 물었다.

정도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변이로 일어난 혈액 쪽 병이래. 구체적으로 어떤 병인지는 나도 잘 몰라. 진료소 의사는 내가 알아듣지 못할 단어만 줄줄 읊더라고.”

‘꼭 죽을병이 아닐 수도 있는데……. 정밀 검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장목화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자칫하다간 한명호의 명줄을 끊고 그의 앞길을 막은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실행 가능성이 확실히 있는 새로운 방안을 내놓기 전까지는 침묵을 유지하는 게 옳았다.

정도연이 안타깝긴 해도 사실 그녀와는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였다. 그 정도의 측은한 마음으론 무엇도 바꿀 힘이 없었다.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성건우가 장목화의 역할을 대신 맡아 물었다.

“그렇군⋯⋯. 고향엔 무슨 일이 생겼는데? 왜 구하려는 거야?”

정도연은 퍼스트 시티 실험 구역으로 전락한 초봄 마을 상황을 간단히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구조팀 모두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생화학 실험과 유전자 연구, 말하자면 그건 반고 바이오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반고 바이오가 악명을 입게 된 이유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도연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퍼스트 시티 역시 그러한 일을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훨씬 더 강제적이기까지 했다.

‘잘못된 대본을 받은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있던 장목화는 곧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형 세력이라면 어디든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다. 기회만 생긴다면 절대 그것을 놓치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장목화는 자꾸만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근데 퍼스트 시티의 스타일은 너무 폭력적이잖아? 이 여자 말대로면 초봄 마을 돌연변이는 상당히 많고, 엄청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어.

그런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개원했다거나 치료 방법 개발을 위한 유전자 관련 실험을 한다는 구실만 대면 조건에 부합하는 지원자야 얼마든 구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강압적이고 거친 방법을 취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설마 그들한테는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건가?’

장목화가 보기에 퍼스트 시티의 방식은 반고 바이오보다 훨씬 비효율적이었다. 이는 많은 인구수와 사방에 주둔한 군대가 뒷받침되어야만 유지가 가능한 방법이었다.

“너, 어, 이름이 뭐지?”

무슨 말을 하려다 그제야 상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장목화가 뒤늦게 물었다.

정도연은 자신의 이름을 순순히 알려주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말을 들어보면 퍼스트 시티가 너희 마을에서 진행 중인 실험의 보안 등급은 절대로 낮지 않을 거야. 거길 지키는 병력도 엄청 강할 거고. 명호가 모은 인력에 의지할 수도 없어.”

이 대목에서 그녀는 한명호를 바라보았다.

오늘 벌어진 일을 보고도 한명호와 계속 합작하려는 유적 사냥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를 팔아넘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주문해둔 무기도 아직 못 받았지.”

한명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모집한 합작파트너들은 구체적 임무가 무엇인지는 몰라서, 초봄 마을에 어떤 영향이 미칠 것도 없다는 게 다행일 따름이었다.

한명호의 한숨 소리를 듣고 성건우가 웃었다.

그렇게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 장목화가 먼저 운을 뗐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 책임도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우리가 네 합작파트너가 돼서 봉사할게. 아니,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건 아니니 봉사라고 하긴 좀 그러네. 우리가 원하는 건 초봄 마을 실험실에 있는 자료나 샘플 일부야.”

장목화가 나중에야 대가를 요구한 건 대형 빌런 반고 바이오 출신으로서의 직업적 습관 때문은 아니었다.

다소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 한명호가 아무 대가 없는 도움을 받기를 원치 않아서 제안을 거절할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명호도 한동안 다른 도우미를 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몇 초간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침묵 끝에 답했다.

“좋아.”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무기는 걱정하지 마. 우리한테 많아. 대량 살상 무기도 하나 있고.”

동시에 성건우는 몸을 틀어 길을 비켜주었다.

한명호와 정도연의 눈앞에, 벽 옆에서 충전 중인 게네바가 드러났다.

로봇!

두 사람은 충격과 동시에 매우 기뻐했다.

애쉬랜드에서 풀 세트 모듈이 장착된 로봇은 확실히 대량 살상 무기였다.

한명호는 기쁨과 충격으로 붕 떠오른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너희들, 대체 왜 질서의 손에 쫓기고 있는 거냐?”

가만히 보면 이 팀은 어디를 가나 문제를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

당시 레드스톤 마켓에서도 이들이 무기상을 흠씬 두들겨 패고, 아류인 연합군을 깨부수는 등 한시도 쉬지 않았던 게 똑똑히 생각났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답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차라리 질서의 손에서 의뢰한 임무를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다. 겐, 투사 좀 해줘.”

게네바는 곧장 모드를 바꿔 전에 기록해 둔 정보를 벽 위에 투사했다.

한명호와 정도연은 소수의 사냥꾼 길드에서나 겨우 보았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기술이었다.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게네바가 띄워준 내용을 살폈다.

“격투장 암살 기도 사건에 참여,

퍼스트 시티를 노린 거대한 임무 계획⋯⋯.”

고작 전반부 설명만 읽었지만, 한명호와 정도연의 눈꺼풀은 경련했다.

‘이 녀석들, 대체 뭐지?’

한명호는 구조팀이 분명 어느 대형 세력 출신이란 걸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퍼스트 시티에 대적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곧이어 장목화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헛소리, 이건 전부 다 그들이 지어낸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는 그냥 약간의 정보만 훔쳤을 뿐이라고.”

“그래, 질서의 손 자식들, 속이 너무 좁던데.”

성건우가 동조했다.

한명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떠올렸다.

“격투장 암살 기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해도, 질서의 손이 이렇게까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었던 걸로 기억⋯⋯.”

그러나 그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논리대로면 구조팀이 저지른 일은 격투장 암살 기도 사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짓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들이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모든 근육이 긴장하는 사이, 정도연은 현상금을 확인했다.

“한 사람당 1만 오레이?”

돌연변이 마을 출신 유적 사냥꾼은 너무 놀란 나머지 빽 소리를 질렀다.

정도연은 주로 퍼스트 시티 세력 범위에서 활동하며 완수한 임무를 오레이로 환산 받곤 했었다. 그러나 지난 오랜 시간 동안 겨우 몇 사람을 잡겠다고 이렇게까지 엄청난 현상금을 건 임무는 본 적도 없었다.

현상금의 액수가 반드시 목표의 위험도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지만, 1만 오레이라는 금액을 확인한 순간 정도연은 이 임무에 내걸린 사람들 모두가 분명 어마어마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쉬랜드의 각종 이야기 속에서, 어린이의 눈물을 금세 그치게 하려고 언급되는 엄청난 존재 같달까.

정도연처럼 평범한 유적 사냥꾼에게 1만 오레이는 본인 목숨값보다도 더 큰 금액이었다.

이들은 대체……. 뭐 하는 자들일까.

정도연은 입을 꾹 다문 채 구조팀을 슥 훑어보았다.

“대충 이런 상황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정도연의 임무를 완수하더라도 장기 이식을 할 장소를 찾긴 힘들어.”

어영부영 화제를 마무리한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심장 이식은 대형 수술이었다. 충분한 의료 기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망률은 대폭 높아지는 아주 위험한 수술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한명호가 입을 열었다.

“안타나 스트리트 내 불법진료소 의사는 그들 목숨보다 돈을 더 중시해.”

“그래,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자.”

장목화도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네바에게 상응하는 자료를 내려받게 해서 그에게 심장 이식 수술을 맡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구조팀에는 수술에 필요한 의료 기기가 없었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전부 다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야.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어. 퍼스트 시티에서 어떻게 벗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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