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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79화 (79/649)

79화. 이상한 곳

대화를 나누다 보니, 구조팀은 곧 복도 끝에 이르렀다.

“왼쪽으로.”

장목화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방향을 알려줬다.

이 복도 끝에서 또 왼쪽으로 꺾으면, 비상 통로 입구가 자리한 복도로 갈 수 있었다.

장목화는 지시를 마친 뒤, 무의식적으로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이 층의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하, 아깝네. 꼭 지하 기계실을 찾아서 이 폐허 도시에 전력을 공급하고 실험실 문을 열어, 거기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지 연구해보고 싶었는데.”

장목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일부러 여자 흉내를 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장목화는 곧장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성건우를 노려보았다.

“지금 내 흉내 낸 거야? 그래, 나 그렇게 생각한 거 맞아. 그럼 지금은 무슨 생각하는지 또 한 번 흉내 내봐.”

“음, 성건우 저 개 같은 놈 대가리를 갈겨줄까, 생각하고 계시네요.”

성건우가 제법 진지하게 답했다.

장목화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데, 백새벽이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팀장님, 저희 빨리 1층으로 돌아가야 해요.”

“알아, 알아. 전부 이 자식 때문이야. 진짜 분위기 망치는 데 일가견 있다니까? 성건우, 좀 진지하게 굴어!”

장목화가 성건우를 매섭게 쏘아보곤, 왼쪽 복도로 들어섰다.

백새벽, 용여홍, 성건우도 곧장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

* * *

이 복도 양쪽으로 자리한 방 중에선 활짝 열려 건너편 복도까지 내다보이는 방이 있는가 하면, 꽉 닫혀 있어 내부를 살필 수 없는 방도 있었다.

장목화는 전기 신호만 감지할 뿐, 굳이 닫힌 문을 열어 안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확인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때, 돌연 장목화가 굳은 눈빛으로 소리쳤다.

“피해!”

동시에 전방으로 비스듬히 몸을 날린 그녀는 한 바퀴 굴러 옆쪽 방으로 숨었다.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는 세 사람도 곧장 몸을 날려 자리를 피했다.

백새벽, 용여홍은 옆쪽 방으로 들어간 반면, 성건우 쪽에서 가장 가까운 방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를 막을 순 없었다. 성건우는 소리 나게 나무 문을 들이받곤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 순간, 출처 모를 유탄 하나가 조금 전 그들이 있던 곳에 떨어졌다.

콰광!

주변 방문이 부서지고 지면엔 움푹 구멍이 팼다. 이글거리는 화염에 새카맣게 탄 흔적이 남기도 했다.

그 후론 공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습격자의 인영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들 각자 자리에 숨어선 감히 나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성건우가 들어간 방에선 빛이 번쩍였다. 환한 액정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화면 속에선 사람 같지 않은 기괴한 존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액정 화면 앞엔 검은 기계 한 대가 놓여 있었고, 기계 앞엔 검은 머리 남자아이 하나가 앉아있었다. 아이는 갑작스레 난입한 성건우를 보고 놀란 듯, 쥐고 있던 컨트롤러도 내버려 둔 채 근처 탁자 뒤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아이의 예상과 달리, 성건우는 공격하지도 숨지도 않고 아이가 보던 액정 화면만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놀란 아이는 몇 초간 아무 말이 없다가, 겁에 질린 얼굴로 답했다.

“게, 게임. 무지 오래된 게임⋯⋯. 난 VR 캡슐을 못 찾아서 이, 이런 게임밖에 못 해.”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재밌어?”

“응, 엄청 재밌어.”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어떻게 하는 건데?”

성건우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진심으로 가르침을 청했다.

아이는 성건우를 한 10여 초간 관찰하다가, 숨어있던 곳에서 살그머니 기어 나왔다. 이윽고 아이가 성건우 곁에 조심스럽게 앉아 컨트롤러를 들었다.

“아, 맞아. 넌 이름이 뭐야?”

성건우가 지나치게 예의를 갖춰 물었다.

아이는 대략 일고여덟쯤 된 듯했다. 이내 아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통통한 볼이 동그랗게 올라갔다. 컨트롤러를 잡으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아이는 환한 얼굴로 답했다.

“수종이.”

성건우는 그 이름을 듣고 고개를 홱 돌렸다. 소리 없이 아이를 몇 초 응시하던 그가 돌연 웃음을 터뜨리며 액정 화면을 돌아보았다.

성건우가 다시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수종이었구나. 그럼 짙은 색 털모자 쓴 할머니도 알고 있겠네? 주름이 좀 많고, 검은색 모직 드레스 입은 할머니.”

한창 게임에 빠져 컨트롤러를 조종하던 수종이 답했다.

“알아, 좋은 분이지. 살아계실 땐 날 위해 문을 지켜줬어. 누구도 날 방해할 수 없게. 헤헤, 난 조용히 게임하고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정말 그렇게 해줬어.”

성건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게임 화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분이 네 말을 알아들어?”

“너도 알아듣잖아?”

수종은 어쩐지 성건우의 질문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성건우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지. 그럼 그분이 돌아가신 후엔 문을 지켜준 사람이 없었어?”

“있었⋯⋯.”

수종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게임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성건우가 보기에도 화면은 전보다 더 현란해져 있었다.

수종은 갑작스러운 전투를 다 끝내고 남은 답을 이어갔다.

“삼촌 몇 명이랑 이모, 누나, 형들이 지켜줬어. 정기적으로 정리도 해주고, 유지 보수도 해주고, 날 데리고 나가 말도 태워주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해줬어. 아, 혹시 내 고양이 봤어? 길에서 주운 고양이야. 그 고양이를 위해서 연못에 물고기도 키워. 대단하지?”

그러자 성건우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대꾸했다.

“그게 네 고양이였어? 그 털 없는 고양이 말하는 거지?”

수종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응, 아주 특별한 품종이야. 절대 얕보면 안 돼.”

“걔가 계속 날 재우려고 했는데.”

성건우의 불만을 듣고, 수종의 통통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못된 장난치는 걸 좋아하거든. 이따가 돌아오면 내가 따끔히 일러둘게. 너 잠들게 하지 말라고.”

“너 고양이 말도 알아?”

성건우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몰라, 근데 걔는 아주 똑똑해서 사람 말을 알아들어.”

수종이 답했다.

성건우는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럼 넌 평소에 뭘 먹어?”

순간 고요해진 수종이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통통한 얼굴이 액정 화면 빛 아래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성건우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매우 침착하게 수종을 마주 보았다. 수종은 곧 다시 게임에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먹는 양은 아주 적어. 때론 통조림도 먹고, 때론 그들이 잡아 온 새, 쥐, 벌레, 아니면 그들이 찾아온 얼린 고기나 채소도 먹고. 내가 기른 물고기를 먹기도 하고.”

“넌 아직 어리잖아. 날것 먹으면 배 안 아파?”

성건우는 아주 진지하게 학술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수종이 키득키득 소리 내 웃었다.

“내가 그들한테 음식 굽고 익히는 법을 알려줬어. 대단하지?”

“진짜 대단하네!”

성건우가 손뼉까지 치며 격하게 반응하자, 수종은 약간 부끄러워했다.

“사실 그들도 원래부터 라이터를 사용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어. 난 그 불로 음식을 익히는 방법만 가르쳐줬을 뿐이야. 너도 좀 먹을래?”

“어떤 게 있는데?”

성건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다.

“몰라. 그들이 뭘 가져오느냐에 따라 다르지. 난 음식에 까다롭게 굴지 않거든, 정말로!”

수종이 강조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입가를 슥, 닦은 성건우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넌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던 거야?”

수종은 잠시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몰라. 달력도 없어서. 아무튼 엄청 오래됐어. 그 할머니가 이모였을 때부터 봤으니까.”

“그때부터 줄곧 여기 있었던 게, 네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나?”

성건우가 한껏 걱정을 담아 물었지만, 수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진짜 성가시다. 그런 질문은 하지 마. 사실 줄곧 아이로만 사는 것도 꽤 괜찮아. 고민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이 게임이나 하고 책이나 읽으면 되니까. 게임 하지 말라고 혼내는 엄마, 아빠도 없어.”

수종은 성건우가 뭐라고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행복하다는 듯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성건우가 물었다.

“그립진 않아?”

수종은 몇 초간 입술을 잘근거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리워. 근데 그리워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미 죽고 없는데.”

성건우는 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종은 성건우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게임에만 열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성건우가 액정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엔 어떻게 전기가 통하는 거야?”

“그들이 지하 기계실에서 특별히 선을 끌어다 줬어. 하하, 내가 지도했지!”

수종이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고민하던 성건우는 화려하고 요란한 게임 화면을 바라보다가 검은 기계 옆쪽의 컨트롤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 하는 건데?”

순간 수종의 눈이 반짝거렸다.

“내가 가르쳐줄게! 이 버튼은 점프, 이 버튼은 구르기, 이 버튼은 막기야. 막은 뒤에는 반격을 할 수가 있어⋯⋯.”

* * *

한참을 기다려도 두 번째 공격이 진행되지 않자, 장목화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 전기 신호를 자세히 감지해보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와! 습격자는 이미 떠났어.”

용여홍, 백새벽은 속속들이 조심스럽게 나와서 장목화의 곁으로 갔다.

“아주 이상한 곳이에요. 최대한 빨리 나가야겠어요.”

백새벽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 사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용여홍이 말했다.

“건우는?”

장목화 역시 이를 의아해했다.

“저쪽에 분명히 전기 신호가 있는데⋯⋯. 잠깐, 전기 신호 두 개가 한데 중첩돼있는 것 같아. 혹시 건우가 강제로 잠들어버렸나?”

여태까지 있었던 일과 주변 환경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성건우가 누군가에게 통제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멀쩡히 살아있는데 아무 호응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성건우를 잘 아는 친구 용여홍은 더욱더 긴장했다.

“어쩌면 위험에 처했는지도 몰라요. 눈 깜짝할 사이 위험에 휩쓸렸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알아, 아는데 그 위험이 왜 건우에게 맞춰주고 있는 거지?”

장목화가 낮게 중얼거리며, 사람 형태로 뻥 뚫린 나무 문으로 다가갔다.

근처로 다가가니 안에서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이내 백새벽이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건우가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했을 수도⋯⋯.”

“그래, 어쨌든 일단 건우부터 구하자.”

장목화도 그에 동조하며 대꾸했다.

흔들어 깨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깨우고, 눈 하나 깜짝할 수 없는 싸움 중이라면 얼른 그 싸움을 중단시켜야 했다.

백새벽, 용여홍은 곧장 훈련받은 대로 팀장을 엄호했다.

장목화는 일단 문에 뚫린 구멍 안으로 손을 넣은 뒤 안쪽 바닥을 향해 총을 한 발 쐈다.

탕!

총성이 울려 퍼지자마자 문고리를 향해 몸을 날린 장목화는 재깍 문을 열었다. 그리곤 빠르게 뒤로 물러나 옆쪽 벽에 기대 몸을 숨겼다.

그로부터 비스듬한 방향에 떨어져 있던 용여홍과 백새벽은 문 안쪽을 겨냥했다. 무슨 기척이라도 보인다면 곧장 방아쇠를 당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응전 사격은 없었으며, 성건우의 인영도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이 기괴한 충돌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방에선 끊임없이 번쩍이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세 사람은 이 상황이 더더욱 의아하기만 했다.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장목화는 두 팀원의 엄호를 받으며 곧바로 몸을 굴려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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