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환각의 근원
“와, 군용 외골격 장치를 대적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고?”
용여홍은 차으뜸을 처리하지도, 붙잡지도 못한 상황에 상당히 실망한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새삼 군용 외골격 장치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다.
백새벽도 아쉬움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가자.”
장목화가 눈앞의 모퉁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차으뜸이 사라진 복도와는 비스듬히 떨어진 맞은편 복도였다.
“안 쫓아가고요?”
용여홍의 물음에, 성건우가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 남자의 능력이 얼마나 기이한지 더 경험해보고 싶어서?”
벽도 많은 이 빌딩에서 계속 추격전이 벌어진다면, 유리한 건 차으뜸뿐이었다. 이런 곳에선 각성자 능력 영향 범위 안에 들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환경에선 장목화의 전기 신호 감지 능력도 유용하게 쓰이질 못했다.
“그건 그러네.”
용여홍도 성건우의 추리 광대 능력을 떠올리곤, 차으뜸을 쫓으려는 생각은 단박에 접어버렸다.
이내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자, 우린 최대한 빨리 계단으로 우회해서 1층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야. 차으뜸의 목표는 그 기계실을 찾아 이 건물에 전력을 공급하고, 정보망 센터로 돌아가 온 도시에 전기를 통하게 하는 거고.
이건 걔가 곧 지하를 떠날 거란 뜻이지. 여길 떠나면 차으뜸은 빌딩을 벗어나 그 실험실로 갈 거야.
우린 이걸 알고 있으니까 1층 엘리베이터 로비에서든, 비상 통로, 또 주위를 감시할 수 있는 높은 곳이든, 언제고 차으뜸을 저격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지형도 복잡하고, 장애물도 많고, 괴이한 무심자도 상당수인 곳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누구도 장목화의 말에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백새벽도, 성건우, 용여홍도 곧장 무기를 챙겨 들고 오른쪽 복도로 꺾어 들어갔다.
* * *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손전등 불빛밖에 없었다.
용여홍은 짙은 어둠 속을 걸으며 사방을 경계하는 한편, 계속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차으뜸에겐 각성자 능력이 몇 개나 있을까요?”
“나도 마침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차으뜸의 능력을 빨리 파악할수록 나중에 또 그를 맞닥뜨릴 때 좀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일단 매혹.”
백새벽을 필두로, 성건우가 말을 이어받았다.
“다른 사람한테 미친 듯 그림을 그리게 하는 능력?”
지프차를 타고 이동하던 당시 성건우는 차으뜸에게 달려들었지만, 차으뜸은 펜과 종이 하나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하지만 성건우는 말을 내뱉자마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분명 좋아하는 감정을 만들거나 열정에 불붙이는 능력일 거야.”
장목화는 괜한 논쟁 대신,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그건 네가 유일한 경험자니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난 아까 일이 좀 인상적이었어. 차으뜸이 여홍이를 죽이려 했을 때. 그때 우린 좀 비정상적일 만큼 절망했잖아. 진짜 난 무슨 일도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럼 남을 절망하게 하는 것? 그게 세 번째 능력이겠네요. 지불한 대가는 뭘까요? 매혹 능력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던데요.”
말을 잇던 용여홍은 돌연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 근데 우리 왜 갑자기 차으뜸의 매혹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게 된 거지? 너무 자연스러운데? 그리고 말이야, 난 그 사람을 죽인 뒤에 박제품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싶어. 이건 또 왜 이러는 거지?”
성건우가 용여홍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야 네가 엄청난 변태니까.”
“이게 전부 너 때문⋯⋯.”
순간 용여홍이 말을 하다 말고 물었다.
“잠깐, 네 추리 광대 능력. 효력을 잃은 거야?”
장목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까 우린 이미 차으뜸의 매혹 범위에서 벗어났어. 그 추리 광대 능력이 성립되려면 우리가 차으뜸을 좋아한다는 게 전제 조건인데, 그 조건이 사라졌으니 추리 광대 능력도 자연스럽게 힘을 잃은 거지.”
고민하던 백새벽이 물었다.
“그래도 계속 차으뜸을 저지해야 할까요?”
“당연하지! 난 아주 옹졸한 사람이야. 그 사람은 우리를 이렇게 위험한 곳에 몰아넣었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 바도 먹고, 압축 비스킷도 먹고, 군용 통조림까지 다 먹었어! 반드시 갚아줄 거야.”
장목화가 단호하게 답했다.
‘어째 귀에 익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용여홍도 차으뜸이 죽도록 싫었지만,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이 도시를 벗어나는 게 좋을 듯했다. 단순한 복수심으로 남아 있기엔 이곳은 너무 위험했다.
이윽고 장목화가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사실 진짜 이유는, 우리도 여기 잠시 남아서 전기를 공급받은 폐허 도시가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해야 해서 그래. 하하, 아니면 전력 복구를 막아도 되고.
무턱대고 여기까지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갈 순 없어. 그러느니 차라리 시간 낭비 안 하게 차으뜸을 기다리는 게 낫지.
있잖아, 혹시 전에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면서 꿈틀거리는 피와 살점이나 털모자를 쓴 그 할머니, 아니면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 해골 본 적 있어?”
불쑥 나온 질문에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 모두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없어. 그럼 전에 그 고등 무심자가 만들어낸 환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낮은 지능을 가진 무심자들이 만들어낸 환각이면 분명 뿌리가 있을 텐데.”
성건우가 곧장 답했다.
“그 고등 무심자가 꿈틀거리는 살점이나 털모자를 쓴 할머니,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 해골을 보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죠.”
여기까지 말을 잇던 그가 돌연 멈칫하며 목소리를 음산하게 바꿨다.
“그 여자 무심자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도 몰라요. 너희는⋯⋯ 수종이를⋯⋯ 방해했어⋯⋯.”
손전등 불빛 아래, 성건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순간 용여홍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공포에 휩싸인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성건우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만, 그만! 아이씨, 무섭게 왜 그래!”
“네 기억에 좀 더 잘 남으라고 그랬지. 그래야 나중에 또 그런 상황이 오면 딱 맞게 반응할 거 아냐. 안 꾸물대고.”
성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 그,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그런 상황이 아예 없어야지!”
용여홍은 친구의 입이 두려웠다. 스스로도 자신의 운이 나쁘단 걸 잘 아는데, 성건우가 앞으로 무슨 불길한 예언을 할지 겁이 났다.
하지만 성건우는 무서워하는 용여홍을 보고도 대충 대꾸하곤,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이내 그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따로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장목화는 알아서 손전등으로 성건우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그 덕분에 성건우의 얘기도 더 음산한 빛을 발한 것이다.
이 네 명 중, 손전등을 손에 들고 있는 건 장목화뿐이었다.
세 사람은 뭔가를 쥐고 있어야 해서 손전등을 켠 채로 벨트에 묶어뒀다. 수직으로 매달린 그들의 손전등은 범위가 좁긴 해도 주변을 적당하게 밝혀주었다.
이내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손전등 불빛을 전방으로 돌렸다.
“건우 네 말 말이야, 내가 추측한 거랑 거의 똑같아. 우리가 아니면, 환각은 고등 무심자가 경험한 걸 거야. 무심자는 야수보다 조금 더 지능이 높을 뿐이라, 정보를 막 대단히 복잡하게 만들진 못해. 그러니까 우리가 본 환각은 무심자의 경험이었을 가능성이 커. 물론 간단하게 재가공하긴 했겠지. 재밌네.”
백새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다리를 후들거리게 했던 무시무시한 기운은 실재하는 모양이네요. 그 고등 무심자가 어디서 그 기운을 경험했는지, 그 기운의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백새벽과 장목화가 동시에 외쳤다.
“그 미스터리한 실험실!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던 거!”
탁탁탁.
성건우가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 측면을 치며 박수를 대신했다.
“고마워.”
장목화는 톡 쏘아붙이듯 호응하곤 주위 전기 신호를 감지했다. 그렇게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관찰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전 그 고등 무심자는 일찍이 실험실 근처에 접근했던 거야. 평범한 사람은 발견할 수도 없는 모종의 통로를 통해서 그 안으로 들어갔던 거지. 거기서 극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낀 걸 거야.”
“그럼 꿈틀거리는 피랑 살점은요?”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이번엔 백새벽이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실험실에 실패한 결과물일 수도 있으려나? 근데 구세계가 파괴된 지도 거의 70년이나 지났어. 지금까지 뭐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지.”
장목화는 계속해서 환각의 본질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무심자가 본 건 터져서 곤죽이 된 살점일지도 몰라. 썩어가는 살점엔 벌레들이 꼬여서 꿈틀거리고 있었겠지. 아까 우리가 본 환각은 그 두 개가 합쳐진 결과일 수 있어.
그 할머니랑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 해골도 실제로 존재했을 거야. 그렇지만 할머니가 여태까지 이 폐허 도시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진 알 수가 없어.
어쨌든 그 할머니가 가진 괴이한 능력, 아니면 할머니와의 만남 자체가 고등 무심자의 어떤 본능을 건드린 것 같아. 그러면서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거지. 결국 당시에 보고 들었던 것들이 자연스레 환각에 반영된 걸 거야.”
이어 백새벽도 나름의 추측에 나섰다.
“그 할머니도 고등 무심자지만 아이를 일찍 잃었던 건 아닐까요?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내내 죽은 아이 시신을 품에 안고 지냈던 거고요. 그건 번식과 모성 본능을 가진 고등 무심자에게 강한 충격을 안겼을 거예요.”
“근데 문제는 언어 능력이 없는 고등 무심자인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었냐는 거야. 설마 그게 그 고등 무심자의 특징이었나? 할머니의 연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를 낳을 수가 없잖아. 만약⋯⋯.”
계속 생각을 거듭하던 장목화를 지켜보다, 성건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무리 노인이라도 젊었던 시절이 있잖아요. 그 할머니, 구세계가 파괴되던 당시에는 기껏해야 이십 대이지 않았겠어요? 그때 본인은 무심자로 변하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을 수도 있죠.
그것도 번식과 모성 본능을 가진 무심자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아이가 죽을 때 스스로 했던 말이 머리에 깊이 남은 거죠.
그 이후론 아이를 안은 채 사냥하고, 너희는 수종이를 방해했단 말만 되풀이하게 됐을 거예요. 품속 아기가 백골로 변할 때까지, 자신의 얼굴이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뒤덮이게 될 때까지.
지금까지도 이 폐허 도시 어딘가에서 강보에 싼 아기 해골을 안고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을 거예요. 너희는⋯⋯ 수종이를⋯⋯ 방해했어.”
“아, 진짜 이렇게 심각한데 계속 무심자 흉내를 내야겠어?”
용여홍은 아직도 무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해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말하니까 느낌이 더 살잖아?”
성건우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넌 무섭지도 않냐?”
용여홍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이내 장목화가 서둘러 둘의 말싸움을 중단시킨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좋아,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했으니 토론은 이쯤에서 끝내자고. 응? 일단 빨리 지하를 떠나서 1층으로 돌아가야 해. 거기서 다시 복기해보자.”
“예, 팀장님.”
용여홍은 이번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는 걸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