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마왕성! (5)
“마, 마왕님.”
그녀를 알아보고 움찔한 푸시케도 고개를 숙였다.
싱긋 웃은 마왕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푸시케 제3국경선 수비대장, 너는 오늘부로 아르곤 경제특구 위원장을 맡아서 운영해라.”
“예? 경제 뭐라고요?”
츠이잉!
텁!
마왕의 그림자 속에서 검고 커다란 손아귀가 솟아오르더니 푸시케의 몸뚱이를 붙잡아 마왕성 밖으로 휙 던져 버렸다.
“살아남으면 말이다.”
“우으아악?! 야! 마왕!”
이제는 점이 되어 버린 푸시케에게서 고개를 돌린 캐롯이 눈을 크게 떴다.
“웝! 저러다 죽는 거 아니에요?”
“뿔 마족은 하여튼 이렇다니까.”
마왕은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운과 실력을 알아보는 좋은 방법이지. 죽으면 다른 녀석을 앉히면 그만이다. 그보다, 네가 그 캐롯이구나.”
가까이 다가온 마왕은 그대로 에탕다르의 손에 매달린 캐롯을 살펴보았다.
손가락으로 자기 코를 가리킨 캐롯이 물었다.
“으잉? 나 아세요?”
“물론이다. 보자마자 알아챘다. 우연이구나. 너를 만날 줄이야. 사실은 나도 네 이야기책을 많이 읽어보았지. 내 서재에 잠시 들러보겠느냐?”
“호오옥! 진짜요?! 팬? 팬이세요?”
몸을 돌린 마왕이 그대로 꽃밭 사이를 걸어가자 에탕다르는 본의 아니게 그대로 캐롯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와! 마왕성을 구경하다니! 멋져! 예뻐! 최고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캐롯의 감탄과는 별개로 에탕다르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말씀하신 대로 전달하였소. 그 무슨 특구인지 하는 시장 바닥 이야기를 했더니 오히려 좋아들 하더군. 선의 확장은 어쩌시겠소? 엘프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실 거요?”
“그것도 네게 일임하지. 대신 영토는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해라.”
우거지상이 된 에탕다르가 혀를 찼다.
“쯧, 내 마왕님 생각해서 하는 소린데. 반감을 품은 녀석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마시오.”
마왕은 원래 마족의 총대표 같은 것으로, 가끔 모습을 드러내 깽판을 부리는 드래곤에게 대항하기 위해 규합한 일족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하는 자리였다.
그 제9대 마왕의 이름은 티르피즈, 얼마나 오래 살아온 것인지 뿔마저 하얗게 탈색된 그녀가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싱긋 웃는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상식이지 않느냐. 싫어할 테면 하라지. 마왕은 나다. 내가 법이다.”
아직은 말이지.
코를 벌렁거리는 에탕다르에게 캐롯이 고개를 돌렸다.
“보세요, 늑대 아저씨. 이제 좀 내려주면 안돼요?”
“안된다. 마왕성에 외부인이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어.”
그 소릴 들은 마왕이 거창하게 웃었다.
“대충대충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천왕 중에서 에탕다르만큼 꼼꼼한 녀석도 없을 거다.”
“칭찬해도 나오는 건 없소.”
마왕을 따라 거창한 성 내부를 신나게 구경하게 된 캐롯은 곧 어떤 방으로 안내되었다.
“여기가 내 서재다.”
“후와아!”
매달린 캐롯이 볼때기에 두 손을 대고 눈을 반짝였다.
도서실을 방불케 하는 넓은 방에는 커다란 책장과 대량의 장서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 앞에서 두 팔을 벌린 마왕이 말했다.
“어떠냐? 나의 수집품이다. 너를 포함한 발칙한 모험가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전략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단다.”
“와아! 정말 대단해! 대체 어디서 이만큼 모았어요? 마족은 기본 인간이랑 담쌓고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
몸을 돌린 마왕은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뽑더니 그걸 파라락 넘겼다.
“피아노가 가끔 너희 쪽으로 가서 모아오고 있다. 각 휴전선의 수비대원과 내통하는 인간들도 제법 되고. 봐라, 나는 이걸 보고 너를 알게 되었다.”
마왕이 내민 것은 언젠가 캐롯이 초보 모험가들을 위해 만든 안내서로, 모험가로 먹고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초 지식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흥미로운 지식이 잔뜩 실려 있더구나. 멍청한 마족의 삶에 퍽 도움이 되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에탕다르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멍청한 마족이라니, 거기 우리 일족도 포함이오?”
“저작권! 내 책을 허가 없이! 하지만 지금이라도 적절한 보상을 해주시면 용서해드릴게요.”
호하하 웃던 마왕이 매서운 눈으로 캐롯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대신 마왕성을 구경시켜 주고 있지 않으냐?”
“컥! 역시 마왕!”
그러고도 한참 동안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던 캐롯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마왕에게서 풀려났다.
하지만 그것도 비밀 엄수를 약속받은 후에야 내려갈 수 있었다.
“너 이 녀석, 오토마톤이지? 여기서 본 것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약속해라.”
“어, 으으으음, 조금도 안되나요? 마왕님이 사실은 내 팬이라던가?”
“마왕의 위신이 서실 않잖느냐. 안된다.”
수다쟁이 캐롯에겐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일 처리를 겸해 에탕다르가 캐롯을 데리고 내려갔다.
“기회가 되면 또 만나요! 마왕님!”
석양이 내리쬐는 마왕성의 공중 정원을 배경으로 마왕이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겨우 에탕다르의 손길에서 벗어난 캐롯은 지상으로 내려가는 부유섬 난간에 올라 먼 곳을 내다보다가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와, 마왕님 처음 봤어요. 그런데 갑자기 찾아오셔선 대체 무슨 생각이시래요? 원래 이쪽하고 사이 나빴잖아요.”
“글쎄다.”
캐롯은 그러고도 한참을 쉼 없이 떠들어댔으나 느긋하게 난간에 기댄 늑대인간은 그저 석양을 마주 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 마왕의 서재,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마왕은 나지막하게 피아노를 불렀다.
잠시 후 책장 사이에서 키가 큰 오토마톤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뜨린 방열 가발은 색이 화려한 금발로 죽은 용사가 남겨준 것이었다.
그의 유품이며 동시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말벗인지라 마왕은 피아노를 참 애지중지 여겼다.
“돌아와 있었구나. 어땠느냐?”
“엘프들의 공중 전함은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마 마왕성이 북상할 때까지 그대로 대기할 것입니다. 그 외엔 모두 순조롭습니다. 애초에 인간들도 이쪽의 천연자원을 원하던 상황이니까요.”
강아지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마왕이 두 팔을 벌렸다.
“자, 네 말대로 했으니 이제 보상을 다오.”
가까이 다가온 피아노가 마왕을 슬쩍 안아주었다. 키가 큰데다 가슴도 딱딱하건만 마왕은 몹시 포근한 표정이었다.
“목소리, 목소리도.”
“참 잘하셨습니다. 티르피.”
피아노가 용사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애칭으로 불러주자 눈을 감은 마왕은 슬그머니 웃음을 머금었다.
“용사가 바랐던 세상이 어떤 것인지 꼭 봐두고 싶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부유섬을 타고 지상에 도착한 에탕다르도 귀의 매달린 장식물을 떼어 주머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 * *
수일 후 공식 발표가 있었다.
방주 도시 아르곤, 그 영지 내의 마왕령 휴전선 마을에서 시험적으로 경제특별구역를 개방. 마족과의 제한적인 수출입 무역을 개시한다.
더불어 마족 측 경제특구 위원장은 이전 수비대장이었던 푸시케.
캐롯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말끔한 차림으로 돌아온 푸시케를 올려다보았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해요?”
“다리가 부러졌어!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고! 망할 마왕 놈! 하여튼 그렇게 됐어. 또 잘 부탁해. 헤리슨 구역장.”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부들부들 떨어대던 헤리슨은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그녀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지금 모인 자리는 휴전선을 옮기기 위해 양측은 물론 엘프 장로들도 꽤 모인 자리였다.
투기장에서 얻어맞아 멍든 눈을 가리려고 안대를 낀 스틸레인이 폭소를 터트렸다.
“내가 없는 사이에 이렇게 재미난 일을 벌이다니! 정신이 나갔구나! 마족은 뒤통수를 친다고? 그걸 알고서 이러는 거냐? 우린 모른다? 하하하!”
“누구야? 고춧가루 뿌리는 이 빨간 머리는? 아직 통수 안 쳤거든?”
그러자 엘프 측에서 항의했다.
“이분은 저희 대장로이십니다.”
푸시케가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뭐? 그런데 대장로치고는 엄청 젊네? 몇 살이냐?”
“600살이 좀 넘었지. 그러는 넌? 마족은 거꾸로 늙는다던데 사실이냐?”
600살?
식은땀을 좀 흘린 푸시케가 갑자기 헛기침하더니 말을 돌렸다.
“어어, 자! 얼른 시작하자! 하여튼 우리가 원하는 건 저쪽 담벼락까지야!”
“노! 웃기는 소리 마! 이 근육 돼지야! 성벽까지만이야!”
“애초에 마을 전체잖아!”
가슴에 쌓인 게 많은 헤리슨이 푸시케와 드잡이를 벌이며 영역을 정하는 사이, 에탕다르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건은 푸시케 위원장에게 일임하지. 가능한 넓은 구역을 확보할 것. 마왕님의 지시 사항이다.”
“오오! 맡겨둬라!”
캐롯이 따라서 일어섰다.
“늑대 아저씨는 어디 가요?”
“오다 보니 벌써 건물이 들어섰더군. 시찰이다. 같이 갈 테냐?”
아는 사람이 많아서 얼떨결에 회의장에도 따라 들어왔던 캐롯이 발딱 일어나서 그를 쫓아 나갔다.
그걸 보고 스틸레인도 일어섰다가 붙들려서 다시 앉아 버렸다.
“사실은 나도 있을 필요 없잖아!”
“절차와 모양은 중요합니다. 옆에서 얌전히 숨만 쉬고 계십시오.”
“에잇! 쯧!”
당장 눈앞의 이득에 눈이 먼 인간 측도 그렇고, 사건을 간단하게 생각하는 스틸레인과는 다르게 다른 장로들은 마족과 마왕의 이와 같은 행보에 복잡한 심경이었다.
팔짱을 하고 다리를 꼰 스틸레인이 툴툴거렸다.
“뭐가 복잡하냐? 그날부터 100년 지났다. 증오의 골은 그대로지만 거기에 다리 정도는 놓아볼 수 있어. 부서지면 또 100년 버는 거고.”
“역시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게 아니군요.”
“어엉?”
누군가의 감탄에 스틸레인이 눈썹을 좁히는 사이, 그녀의 곁으로는 빨강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들이 지도를 펴놓고 낙서질에 한창이었다.
“여기까지다!”
“아니야! 여기까지!”
한심한 듯 고개를 돌리던 스틸레인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셋 다 빨강 머리네?”
“예?”
“엉?”
자리에 모인 엘프, 마족, 인간 측의 책임자들이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섬광이 터졌다.
번쩍-!
“으억?”
“눈이!”
“이 자식 뭐야?”
스사사사사사삭!
이윽고 테이블로 그림 한 장이 내밀어졌다.
쥬세페 공주의 그림쟁이 오토마톤 렌즈였다.
회의장에 난입한 공주가 색안경을 벗으며 흐뭇한 표정을 머금었다.
“오늘 같은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한 번 더 찍읍시다. 렌즈.”
“공주 전하?”
당황한 엘프들이 제지하려는데 화판을 든 오토마톤이 고개를 들었다.
번쩍!
섬광이 터지기 직전 밖으로 나온 에탕다르는 경비대 본부 건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거리를 앞에 두고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정식 발표가 있기 전부터 밤새도록 뚝딱뚝딱 건물을 올리더니 발표와 동시에 영업을 시작하는 것도 경이적인데, 거기에 경제특구란 것을 살피러 온 자들까지 몰려들어 거리는 가히 축제 분위기였다.
용사, 네놈은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그런 거리의 중앙에 선 고고한 늑대인간은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까부터 맛있어 보이는 냄새가 그의 코를 심하게 벌렁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 인간들의 맛깔나는 솜씨를 좀 구경해 볼까. 음? 너는?”
“허억! 에, 에탕다르?”
일찌감치 목 좋은 곳에 가게를 차리고 옥수수를 굽고 있던 마족 여자가 화들짝 놀라 버렸다.
숨어 있던 수비대원들이 모르핀과 남편들의 설득에 은근슬쩍 돌아와 가게를 연 것이다.
그녀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애들 아빠를 자처하는 남자들의 함께 행복해지자는 한마디.
떨떠름하게 시선을 피하려는데 그녀의 가게 앞으로 에탕다르가 다가섰다.
난폭하고 포악한 마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포심까지 옅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에탕다르는 사천왕, 거기에 남자 마족이었다.
가게 안 불판 앞에 앞치마를 두르고 서서 옥수수를 굽는 뿔 난 마족 여자를 한참 쳐다보는데 웬 인간 남자가 끼어들었다.
“저희 집사람에게 무슨 볼일이신지요?”
“바보야! 저리 가라고!”
“나도 말 정도는 할 수 있어!”
툭탁거리는 인마 부부를 쳐다보던 에탕다르가 시선을 내리깔더니 지글지글 구워지는 버터 옥수수를 가리켰다.
“이거 두 개 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