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정산! 260 >
그리고 수일 후, 정산의 시간.
병원에서 퇴원한 리슐리에가 공방의 작업장에 자리 잡은 채 챙겨온 배낭에서 돈 자루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던전 의뢰 완수비, 500만.”
“오!”
“기념품으로 고대인의 비상식량, 10상자.”
“오오!”
“고대인의 병기 반납 비용, 1,000만.”
“오오오!”
“길드 특별 위로금, 120만.”
“에에?”
그녀의 앞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고대인의 비상식량을 까먹으며 낮은 환호성을 올렸다.
수첩을 펼친 리슐리에는 소모 비용도 함께 계산했다.
“스크롤, 포션 값 등등으로 지출 비용이, 마이너스 약 800만.”
“컥!”
모두가 떫은 표정이 되었고,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덧붙였다.
“고립된 상태에서 가진 포션을 다 사용해서 그래요. 그리고······.”
딱!
손가락을 튕기자 로테가 가방 하나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그걸 앞에 놓은 리슐리에의 눈빛이 빛난다.
“뒤로 빼돌린 고대인의 알 수 없는 병기 1정.”
언제?
모두 눈빛이 흔들린다.
배에 구멍까지 났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리슐리에는 날 선 표정을 지었다.
“보세요들, 고대인의 병기라니, 군침 돌지 않나요? 정 못 쓸 것 같으면 나중에 반납하면 될 일이에요.”
“언니, 용의주도해요.”
비타의 칭찬에 머리카락을 멋지게 귀 뒤로 넘긴 그녀는 이제 투나를 보았다.
“그래서 어때요?”
“어, 나, 나 잘 모르겠는데. 이, 이게 진짜 무기라면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크, 크랭크에게 보여줘 보자.”
리슐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자, 여러분. 오늘부터 3일간 요양합시다. 부상자가 많으니 한동안 쉬어야겠어요.”
근처에서 함께 고대인의 비상식량을 까먹던 투나가 빵빵해진 볼을 한 채 말했다.
“옴뇸뇸. 그, 그래도 살아와서 다, 다행이야. 흐히히.”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지 짧은 한숨으로 심정을 대신했다.
어쨌든 투나는 기뻤다.
그녀의 좁은 인간관계망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었기에.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모를 건조식량을 연이어 쩝쩝 씹어대던 코비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보리스가 안 보이네?”
갑자기 뭔가를 눈치챈 비타가 고개를 숙이더니 두 손을 모았다.
“우리 모두 그를 위해 기도합시다.”
“어? 왜?”
“하여튼 기도합시다.”
비타의 걱정과는 다르게 보리스와 모르핀은 가을에 접어든 도시를 거닐며 정말로 한가로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주변 상가 건물을 소개하던 보리스가 말했다.
“여기가 길드 건물.”
좀 전의 시장에서 그가 골라준 큼직한 빵모자를 눌러쓴 모르핀이 고개를 든다.
“호오, 멋지구나. 어떻게 이렇게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지?”
“몇 층 안되는 건물인데. 저쪽에는 없어요?”
거주 구역의 판잣집을 떠올린 모르핀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더니 고개를 저었다.
“없어. 적당히 나무를 엮어서 판잣집을 만들어 쓸 뿐이다. 비바람을 겨우 피할 정도지.”
“안타깝네요. 목수 같은 기술자가 없어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모르핀은 인간들의 도시 광경을 한동안 두 눈에 담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슬슬 점심시간이긴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리아의 여관이 보인다.
보리스가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며 모르핀을 보았다.
“갑시다. 밥 한 끼 살게요.”
“케케! 밥을 사 먹는 거냐? 역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은 풍족하구나.”
앞서서 걷던 보리스가 중얼거렸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다들 먹고살려고 힘내서 그런 거지.”
딸랑-!
“실례합니다.”
“오! 잘생긴 총각 아닌가?”
홀에서 음식을 나르던 마리아가 밝게 웃으며 바라보자 보리스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당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다른 여급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보리스가! 보리스가 여자를 데려왔어!”
곧이어 주방에서도 여자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 여자! 보리스가? 코비랑 사귀는 게 아니라?”
“으아아악! 누구랑 엮으려고 하는 거야!”
덜컹덜컹-!
도끼눈을 뜬 보리스가 반쯤 일어서더니 테이블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수틀리면 엎어 버리겠다는 위협이었으나 홀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웃기 바쁘다.
“하하하! 아니, 하도 사내자식들끼리 붙어 다니니 그런 줄 알았지 뭐야. 게다가 이쪽, 예쁘기까지 하고.”
자리에 앉은 모르핀마저 급실망한 얼굴로 바라본다.
“뭐냐. 그런 거였냐?”
뿌직!
이마에 핏대가 솟은 보리스가 다시 테이블을 붙잡고 들썩였다.
덜컹덜컹-!
“아니거든! 나는 건강한 남자거든! 20살이거든! 불끈불끈하거든! 평범하게 여자가 좋거든! 여자가!”
“오-! 그럼 우리도 기회가 있는 거야?”
“웃흥~! 보리스는 어떤 여자가 취향?”
모르핀 포함, 당장 혼기가 찬 아가씨들의 눈빛이 매섭게 번쩍인다.
하지만 다시 자리에 앉은 보리스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낮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누구냐, 어딘가의 푸근한 빵집 아가씨 같은?”
그러자 여급들이 한자리에 모여 쑥덕이기 시작한다.
가끔 보리스를 힐끔거리며.
“누구지? 빵집 처녀가 어디 한둘이야?”
“푸근하다니, 살집 있는 여자가 취향인가?”
그녀들을 보고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맥주잔을 들었다.
“맥주 더 줘! 그리고 저런 곱상한 친구 말고 우리는 어때?”
“엥? 아무리 급해도 유부남은 싫거든요?”
근처에서 집 짓다가 밥 먹으러 찾아온 목수들인 듯, 허리에 연장 벨트를 매단 남자들이 프하하 웃는다.
놀려대는 여급들에게 악을 쓰던 보리스가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저게 목수, 집 짓는 사람들요.”
“고급 인력이구나. 몇 명 잡아갈 수 없을까?”
“그 잡아가겠다는 사고방식부터 고쳐야겠는데.”
그러다 마리아가 웃으며 나타났다.
요리를 주문하는데 모르핀이 손을 번쩍 들고 코를 벌렁거렸다.
“맥주!”
“지금 가벼운 맥주는 다 나가고 진한 것들 뿐이야. 흑맥주 괜찮을까?”
“흑맥주? 검은색이란 말인가?”
급흥분하는 모르핀을 보고 보리스가 손가락을 펼쳤다.
“흑맥주 2잔 추가요.”
“음!”
타탕-!
곧바로 커다란 유리잔이 나왔다.
갈색 거품이 끓어오르는 시커먼 맥주잔을 보는 모르핀의 눈이 몹시 반짝거렸다.
“정말로 검은색이야.”
그 말을 끝으로 모르핀은 꿀꺽꿀꺽 시원하게도 마셔 버렸다.
마주 앉은 보리스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크하악-! 아주 진하구나! 맛있다. 쓰고 달아, 주인장! 한 잔 더!”
“거, 좀 천천히 마셔요.”
입맛을 쩝쩝 다시던 모르핀이 그의 잔을 보더니 말했다.
“응? 너는 뭘 그리 아껴가며 마시고 있지?”
가득 채운 맥주잔을 내려놓은 여급이 말했다.
“우리 가게 흑맥주는 좀 세게 말거든요? 보통 저런 사람들이 마시는 거라서.”
“오우예-! 맞아! 우리 같은!”
여급이 가리킨 곳에는 모험가 무리로 보이는 털북숭이들이 잔을 들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들을 보던 모르핀이 보리스를 가리키며 킬킬킬 웃어댔다.
“그렇군. 너, 술이 약한가 보군. 그럴 수 있다. 천천히 마셔라. 우리는 밥을 먹으러 온 거지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니까. 하지만 맛있구나. 나는 몇 잔 더 마셔야겠다.”
빠직!
다시 핏대가 솟은 보리스가 잔을 번쩍 들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부어 댔다.
“아무렴 당신보다는 잘 마시거든!”
한 젊은이의 호쾌한 원샷에 대낮부터 모여 있던 주당들이 그를 응원하기 시작하고, 난데없이 맥주 많이 마시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숟가락을 입 앞에 세운 털북숭이 모험가가 중계방송을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아르곤 시민 여러분. 맥주 많이 마시기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는 8번가 맛집 마리아의 여관에 나와 있습니다. 아앗! 지금 막 보리스 군이 3잔째를 들이부었습니다!”
탕-!
“끄으어억! 밥 먹으러 와서 이게 뭐 하는 거지!”
탕-!
“크아악하하하! 신나는구나! 즐겁구나!”
철푸덕-!
“으어억, 더, 더는 못 먹겠어······.”
재미있겠다고 끼어들었던 참가자가 속속 쓰러지자 여관에 모여 있던 주당들이 웃기 바쁘다.
즐기고 떠들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맥주잔을 든 모르핀은 바로 오늘을 위해 127년 동안 웃음을 아껴놓았다는 듯 정말 신나게 웃어댔다.
철퍼덕-!
결국 보리스도 기절했다.
텅-! 빈 맥주잔을 내려놓은 모르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 팔을 힘차게 들었고, 구경하던 주당들에게 열화와 같은 성화를 받았다.
“우오오오!”
“술의 신 박커스의 화신이 등장했다!”
“찬양하라!”
“오오오! 우오오!”
절하는 남자들을 앞에 놓고 한참 깔깔거리던 모르핀은 기절한 보리스를 들쳐 매고 손을 흔들었다.
“벌써 오후로군. 가봐야겠다. 밥은 내일 다시 오지.”
“덕분에 재고 소진이 이어지고 있으니 언제든 환영이야.”
손을 흔드는 마리아의 곁으로 여급들도 나와 중얼거렸다.
“와, 힘도 좋네. 저걸 그냥 들고 가.”
“보리스 정도면 나도 온 힘을 다해서 들고 갈 거야.”
서로의 눈치를 보던 여급들이 히죽히죽 웃는다.
마리아가 몸을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징그러운 소리는 그만하고 주문받아. 이참에 매상 잔뜩 올려보자고.”
“옙! 마스터!”
축제 분위기의 여관에서 떨어진 골목길, 모르핀은 웅얼웅얼대는 보리스를 추궁해 기숙사의 호실을 알아내고는 그의 숙소로 향했다.
술기운이 잔뜩 올라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지나치던 사람들이 흠칫 뒤를 돌아볼 정도로 가관이었다.
침이 줄줄 흐르는 상어 이빨을 드러낸 모르핀은 짊어진 보리스의 엉덩이를 더듬으며 아주 괴상하게 웃기 시작했다.
“으히히흐흐헤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보리스는 침대에 두 팔이 묶여 있는 자기 꼴을 보고는 그만 진짜 여자처럼 비명을 질러 버렸다.
“꺄아아악-!”
“우으음! 시끄럽다!”
상의가 홀딱 벗겨진 보리스가 악을 쓰며 버둥거렸다.
“이거 당장 풀어! 빨리 풀어달라고!”
그의 가슴팍에 쓰러져 있다가 얼굴을 든 모르핀은 눈을 좀 비비더니 하품을 하며 목을 벅벅 긁어댔다. 그러고는 내심 불만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제기! 상의까지 벗기고 겉만 핥아대다가 잠들어 버렸나?”
“하! 핱!? 핥았다고? 핥았다고!”
애써서 시선을 내려보니 가슴팍에 키스 마크와 이빨 자국이 즐비.
보리스는 혼절하고 싶었다.
여전히 그의 배 위에 걸터앉은 모르핀은 머리가 아픈지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린다.
“잠시만 기다려 봐. 잠 좀 깨고 이어서 하자.”
“놀구 있네에!”
들썩들썩끼익끼익!
보리스의 발버둥에 모포 한 장 깔아놓은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들썩이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곧이어 그 소리에 반응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쾅-!
“시끄럽······!”
운동하다가 왔는지 옆방의 코비가 여전히 상의를 벗은 채 등장했다.
세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본다.
확 달아오른 코비가 먼저 슬그머니 문을 닫으며 말했다.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얄궂은 모양새는 20살 순정남에겐 아직 좀 이른 것이었다.
“어, 어어! 시, 실례했습니······.”
“야 이 자식아! 가지 마! 가지 마! 코비! 인마! 도와줘!”
반쯤 닫은 문에 달아오른 얼굴 절반만 드러내 코비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오우! 나, 나는 그런 사이인 줄 모르고. 어, 저기, 그런데 여기 방음이 별로라서요.”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코비의 조언에 모르핀이 아뿔싸 싶은 얼굴로 좁은 기숙사 방구석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면 안되겠군. 조용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단둘만의 공간이 필요해.”
“나는 필요 없거든! 이 겁탈마······ 우으읍?!”
얼굴을 쑥 들이밀고 보리스의 입술을 빼앗아 버린 모르핀은 한참 후 고개를 들더니 입가를 혀로 날름 핥으며 윙크를 찡긋해 주었다.
“너, 맛있구나.”
“호오오오오옥! 호오옥!”
영혼이 빠져나간 모양새로 축 늘어져 버린 보리스와 문 앞에 주저앉아 이상한 비명을 지르는 코비를 내버려 두고 겉옷을 챙겨 든 모르핀이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순순히 내 것이 되어라. 나는 계속해서 너를 노릴 거다.”
또르르.
침대에 묶인 보리스의 눈가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 시트를 적셔 버렸다.
먹이에 침을 발라놓은 상여자 모르핀이 자리를 떠나자, 오도카니 남겨진 코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보리스에게 달려갔다.
“정신 차려, 인마!”
침대에 묶여 있던 보리스는 억지로 입술을 빼앗긴 충격이 너무도 컸던 탓일까, 코비가 추슬러 올리는데도 시체처럼 늘어져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용히 좀 하고 삽시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앙칼진 목소리, 활짝 열린 방문으로 층간 소음을 항의하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이 그 꼴을 보고 말았다.
“꺄아악! 엄마야! 저것 좀 봐!”
“으허억!? 뭐, 뭐 하는 거예요! 둘이서!”
당황한 코비는 축 늘어진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어, 아니 보리스가!”
코비가 보리스의 상태를 걱정하는 모습은, 대다수 여성 모험가들의 눈에 붉은 장미로 장식된 침대 위에서 상의를 벗은 두 남자가 뜨겁게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림이 그러했고.
“어머나, 세상에!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려요. 으흐히히헤헤~!”
“소, 소문이 사실이었어!”
“크억! 이것은 예술! 예술이야! 기록으로 남겨야 해!”
어느새 문 앞에 장사진을 친 여성 모험가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아했는데 다들 눈빛이 정상인의 그것 같지 않았다.
덕분에 코비의 울화통이 터져 버렸다.
“소문이고 뭐고, 신관님! 어서 이 자식 좀 살펴봐 줘요!”
“왁! 나, 난 몰라요! 당신들은 천벌을 받을 거야! 어디 남자들끼리!”
질겁한 여신관 하나가 저주를 남기고 줄행랑을 쳐 버리자 코비는 그제야 이 여자들의 왜 이러는지 알게 되었다.
“으악! 그런 거 아니라고! 이 망할 꼬맹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