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던전! (4) 259 >
주머니를 뒤진 커스가 스크롤을 꺼내 찢으려는데 통로 저편에서 뭔가가 휙 날아와 그것을 낚아채 버렸다.
탁!
“어랍쇼?”
키이이이잉!
뭔가가 다시 되감기는 소리와 함께 다시 뒤로 날아가는 것은 스크롤을 손에 쥔 팔뚝이었다.
그리고 휙휙 던져지는 연막탄.
땡그랑, 땡그랑, 푸쉬이이이익!
“이거 뭐야?!”
통로 전체가 순식간에 연막으로 채워졌다.
스멀스멀 연기가 넘어오자 놀란 모험가들도 교전을 일시 중단하고 상황을 살피는데 커스의 도적단 앞으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롱코트에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남자였는데 곁의 오토마톤도 같은 걸 쓰고 있었다.
잘 다듬은 턱수염에 인자한 인상의 사내가 도적단을 살피며 물었다.
“이보게, 사람을 찾고 있는데. 누가 커스지?”
이 어이없는 상황, 뒤를 돌아본 커스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한참 후 연막이 사라지자 대치 중인 모험가 쪽에서 오토마톤들이 방패를 들고 상대측 진지로 돌입했으나 반격은 없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뭣!?”
모험가들이 후다닥 달려와서 도적단이 있었던 곳을 살폈으나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모두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 자식들이!!”
“찾아! 던전은 넓어! 샅샅이 뒤져! 생존자도 같이!”
다들 용기의 물약을 마신 덕분에 분기탱천의 지속 시간 동안 미친 듯한 활동량을 선보였으나 애초에 지친 자들이 대다수, 약빨은 오래가지 못했다.
도중에 픽픽 쓰러지는 모험가들을 보고 모르핀이 킬킬 웃는다.
“자기 상황은 안중에도 없구나. 너희들, 이 녀석들을 데리고 나가라. 나머지는 날 따라와.”
해가 뜨고 다시 가라앉을 시간 동안 내부를 돌아다니며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과 운 없이 명을 다한 사람들의 유체까지 모두 회수한 모르핀이 마지막으로 던전에서 빠져나왔다.
“더는 없어. 이거 내부 지도, 밖으로 나가는 통로도 발견했다. 멀리까지 이어져 있더군.”
임시 지휘 중인 게토가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활약에 감사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이름도 듣지 못했군요.”
“됐다. 나는 정식 모험가도 아니야.”
쿨하게 몸을 돌린 후드의 여자는 구출해 놓은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차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보리스의 얼굴 옆에 부츠를 턱 올리고 허리를 숙인 모르핀이 잠든 그를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상어 이빨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침이 줄줄 흐르고 눈빛은 잔뜩 충혈되어 갔다.
그녀는 기어코 고립되어 있던 코비를 찾아내 버렸다. 이로써 내기는 그녀의 승리.
“풀 코스 데이트 확정이다. 케케케!”
“와, 좀 무서워요.”
우연히 그걸 보고 있던 비타가 질겁한 얼굴을 하자 모르핀이 금세 원래 얼굴로 돌아오더니 헛기침을 좀 하면서 말했다.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확인은 필요해. 비타, 이 자식 결혼했나? 여자 친구 같은 건?”
“어, 없을 걸요? 와! 모르핀 설마 보리스르으으을!”
그저 달콤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비타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을 끌어 버렸다.
모르핀이 아까 그 사나운 표정을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얼굴이라서 살짝 겁났지만 그래도 구해준 은인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료를 팔기로 결심했다.
“미안해요! 보리스! 당신의 희생은 잊지 않겠어요!”
“어, 음, 응?”
깜짝 놀란 보리스가 잠에서 깨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비타는 어디론가 호다닥 뛰어가고 있었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모르핀만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 음, 왔어요?”
“그래. 잊지 마라. 데이트다, 데이트.”
고개를 슬쩍 돌리니 바닥에 천 하나 깔고 죽은 듯이 잠든 코비가 보인다.
머리를 긁적인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몸은 괜찮고?”
“음, 물론이다. 아니, 갑자기 좀 피곤하긴 해.”
모르핀은 보리스의 곁에 넉살 좋게 주저앉더니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였다.
그들의 정면으로 때마침 해가 떨어지면서 멋진 석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 좋은 수컷과 같이 앉으면 이런 기분인가?”
“동물 아니니 남자라고 해줘요. 남자.”
“크크케케! 아까 눈알이 뒤집힌 네 모습도 나쁘진 않았다.”
보리스는 피식 웃었고, 용의주도한 모르핀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 차례 소란이 있긴 했으나 던전 자체는 진짜여서 내부에서 발견된 보물이 밖으로 옮겨졌다.
이전 세기의 방공호로 쓰였던 것인지 안에는 비축 식량 같은 것이 잔뜩 쌓여 있었다.
금은보화를 기대했다가 이상한 건조 식량 같은 것만 잔뜩 나오자 사람들의 얼굴로 실망이 번졌다.
몇몇은 그걸 까먹으며 중얼거렸다.
“음냠냠, 자식들이 이거 때문에 빡쳐서 강도로 돌변했나?”
“그럴지도 모르겠네. 칫! 하여튼 돌아가면 바로 현상금이다. 얼굴 봐뒀어.”
그러다 사단이 났다.
던전 내부에 쌓인 물건을 옮기던 자들이 이상한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어후, 묵직해. 안에 뭐가 든 거야?”
딸깍!
큼직한 상자를 열자 뭔가 길쭉하고 멋진 물건이 나왔다.
“손잡이와 방아쇠가 달린 것을 보니 무기 같지 않아?”
“오오! 돈 되는 거야?”
함께 고대인의 비상식량을 까먹던 엘프들이 구경하러 왔다가 입안의 것을 뱉어내고는 소리쳤다.
“으악! 야! 다들 물러서!”
빨간 머리 포니테일 엘프 스틸레인이었다.
험악한 얼굴이 된 그녀가 상자를 다시 닫더니 통신 장치로 지원 요청을 해댔다.
그러자 모험가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아! 또 뭐요! 뭔데 또 독점질이야! 이 엘프 아줌마야!”
“인마들아! 이건 위험해! 돈? 돈이 필요하면 그걸로 바꿔줄게! 발견하는 대로 가져와! 상자당 1,000만 쳐준다!”
1,000만!
당장 모험가들의 눈에 불꽃이 튀더니 너 나 할 것 없이 던전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수거된 상자가 20여 개.
“더 없냐? 따로 가져갈 생각 마. 지금 기술로는 작동시킬 수도 없어. 혹시 꼬불쳐 놓은 애들은 나중에라도 아르곤의 엘프 커뮤니티로 가져와라. 바로 현금으로 바꿔준다.”
“그래서 그게 뭔데 그래요? 이유나 좀 압시다.”
비상식량은 같이 까먹으면서 상자 속의 물건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그들을 보고 모험가들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스틸레인이 대답했다.
“병기다. 이전 세기를 말아먹은 자들의.”
가만히 듣고 있던 게토가 손을 든다.
“마냥 숨기려고 하지만 말고 어느 정도는 정보 공유해 주십쇼. 당신네 전함의 마력포쯤 되는 겁니까? 그 뭐냐, 에너지 병기?”
“비슷한 거다. 너희들! 마력석 만들어 보겠답시고 건드렸다가 대폭발 일어났던 거 기억하지? 잘못 건드리면 터진다? 애들이 가지고 놀아도 될 물건이 아냐! 어서 어른들에게 맡겨!”
스틸레인의 호들갑을 보면서 혀를 좀 찬 게토가 손짓하자 장갑차량에 서 있던 토스트가 묵직한 가방을 꺼내왔다.
스틸레인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야! 너 대머리!”
게토가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난 또, 고대인의 개인화기쯤 되는 줄 알았지 뭐요. 써먹을 수는 없겠구만, 1,000만 잊지 말아주십쇼.”
“알았다. 자식아!”
그를 시작으로 꼬불쳐 놓은 걸 내놓는 자들이 몇 명 더 있었다.
한참 후 연락을 받은 수송선이 모습을 드러냈고, 엘프들이 손수 고대인의 병기를 옮겨 싣더니 급한 환자들도 함께 실어서 아르곤으로 향했다.
쿠르프도 그 편으로 돌아갔다.
“내가 만든 거지만 허리가 아파서 못 타겠다.”
“나이가 든 걸 인정하라고 영감.”
모르핀에게 주먹을 좀 휘둘러 준 쿠르프가 수송선에 오르기 전에 모험가들의 얼굴을 두루 살폈다.
“이놈들아, 죽을 뻔했지만 살았으니 목숨은 건진 거다. 그리 알고 정진하거라.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봐도 좋고, 일단 살고 봐야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덕담은 됐으니 빨리 가세요. 영감님 기다리잖아요.”
어른의 좋은 말씀도 통하지 않는 약아 빠진 모험가들의 성화에 혀를 좀 찬 쿠르프를 마지막으로 수송선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래에서 모두가 손을 흔든다.
비타가 외쳤다.
“리슈 언니! 우리도 금방 갈게요! 이따 봐요!”
지상에서 사태 수습과 정리가 이뤄지고 있는 동안, 지하 깊숙한 곳에서는 아직도 사투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숨겨진 던전의 지하 2층.
“크아아아!”
“캬오오오!”
던전에 돌아다니는 괴물을 다 끌고 온 것인지 사방에서 괴물들이 몰려든다.
뒷거래에 응하면 빼주겠다는 말을 듣고 카우보이 모자를 따라나섰던 커스의 패거리는 같은 방법으로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투투투투퉁! 철컥! 철컥!
자동 석궁을 난사하던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타, 탄통이 비었어! 화살통 남는 사람!”
손을 내밀고 외쳐댔지만 다들 바쁜지 대답이 없다.
다행히 데려온 오토마톤들이 전선을 형성해 주는 덕에 밀리지 않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느긋하게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 커스가 갑자기 낄낄 웃더니 중얼거렸다.
“원 제길슨! 여기까지인가?”
“두목! 포기하지 마!”
오토마톤 이식 팔로 몬스터를 두 쪽 내버린 뽀글머리 존슨은 그 말을 끝으로 떼로 덤벼든 놈들에게 파묻혔다.
기어코 뚫린 전선에서 몬스터 무리가 쏟아져 들어와 난동을 피우는데 막을 도리가 없다.
뒤통수를 후리는 데는 익숙했지만 그걸 얻어맞는 데는 그들도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디선가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게, 그 인형 어디서 찾았는지 알려주지 않겠나? 그러면 풀어주지.”
던전의 사방에서 울리는 목소리, 담배가 몹시 마렵다고 생각하는 커스의 귀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다.
“보, 보스의! 두목의 수첩에 있을 거요!”
쯧-!
혀를 찬 커스가 수다쟁이 부하를 노려보는데 갑자기 등 뒤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더니 정말로 통로가 나타났다.
다들 거기로 뛰어간다.
몬스터들이 쫓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동 인형들도 달려온다.
몸을 돌린 커스도 일단 살고 봐야겠다고 통로로 뛰어들었으나 그 안에서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괴물의 도가니였다.
“끄으으어어!”
“우으어억!”
던전 밖의 들판, 그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집단 최면 스크롤을 발동시킨 롱코트의 사내 로마니는 회수한 수첩을 살펴보다가 한 곳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쓰는 오토마톤, 이거로군.”
수첩을 품속에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곳곳에 쓰러져서 잠꼬대 마냥 헛소리를 지르거나 팔다리를 마구 휘젓는 자들이 즐비하다.
그걸 보는 로마니가 다시금 정신적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볼수록 놀랍군. 이거 정말 물건이로구나. 몇 장 더 사놓고 싶은데.”
“낭비는 금물, 그 공방의 물건은 너무 비싸다.”
때마침 울파가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의 뒤로는 폐품이 되어 버린 위법 인형들의 파편이 잔뜩 깔려 있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울파를 보던 로마니가 웃는다.
“그 팔, 참 잘 어울리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껴온 감상, 당신의 미적 취향은 잘못되었다.”
기이이잉! 기잉!
지금 울파의 한쪽 팔에는 흉측한 거대 드릴이 달려 매섭게 돌고 있다.
무슈 길드 마스터가 남자의 로망이 어쩌고 하면서 한쪽 팔을 교체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 포함된 옵션 중의 하나였다.
드릴 팔을 들고 회전시키던 울파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외견은 끔찍하지만, 공수 다방면에 유용함을 인정.”
고개를 숙이고 좀 웃던 로마니가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인근에 숨겨 놓았던 비행선이 그들의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스크롤 한 장으로 손쉽게 강도단을 제압한 로마니가 즐겁게 웃는다.
“현상금까지 받아 가려면 바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