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저주! 83
“어? 어! 어어! 크랭크? 크랭크!”
맞은편에 서서 주인의 기행을 지켜보던 캐롯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크랭크가 투구를 벗었다.
딱히 꼭꼭 숨기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보는 사람들이 발작을 일으켜서 쓰고 다닐 뿐,
크랭크가 사람들 앞에서 맨 얼굴이 드러났다.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 같던 마족수비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급기야 잔뜩 찌푸린 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으우으···.”
“아, 아으아···! 마, 마왕님?”
“어, 엄마···? 엄마가 왜 여기 있어···?”
“스파크···? 어? 하하! 다, 당신 죽은 거 아니었어?”
“테네? 테네! 내 딸이야! 죽은 내 딸이야! 테네! 엄마야! 엄마가 여기···! 으흐흑···!”
현실 속에 피어난 환상향을 맞이한 마족 수비대원들은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나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내 가슴 속에 담아오던 누군가를 만나고 기쁘게 오열하고 있었다.
상황을 신기하게 여긴 캐롯이 뒷짐을 진 채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 주저앉은 마족들은 하나 같이 울면서 웃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간 쪽에는 운 없이, 혹은 호기심에 그의 얼굴을 보고만 헤리슨과 그녀의 부관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 당신이 어, 어떻게···? 애들? 애들은 잘 지내고 있어. 응, 나, 나도 잘 지내···?”
“에나! 모, 몸은 괜찮으냐? 처남이 잘 돌봐주고 있고? 그래! 부모님도 잘 계신다! 으흐흑···! 이, 이게 몇 년 만이냐···!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호, 대참사네.
그에 반에 오토마톤들은 멀쩡했다. 캐롯이나 다른 오토마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서있을 뿐이었다.
“헤리슨?!”
”사령관님! 무슨 일입니까?!”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멀리서 보고 있던 호위병들이 뛰어오며 외쳤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찌푸려 질끈 눈물을 쥐어짠 헤리슨이 다시 크랭크의 옆얼굴을 보았다.
잠깐이지만 어떤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가 다시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환상을 자각한 그녀의 가슴과 머리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헤리슨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오지 마! 오면 안 돼! 크랭크! 그걸 써! 다시 쓰라고! 빨리 이 새끼야!”
마녀에게 저주를 받아 투구를 쓰고 다니는 젊은이의 이야기가 항상 궁금했다. 대체 무슨 저주를 받았기에 저러고 다닌다는 말인가? 하지만 지금 알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해놓은 거냐! 고르곤!
크랭크가 다시 투구를 썼지만 사람들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마족 수비대원들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었고, 헤리슨은 소매로 눈가를 비비며 하드스킨 오토마톤들에게 그들의 감시를 명령한 다음 모두를 데리고 마을로 복귀했다.
“헤리슨!”
“사령관님!”
휘하 모험가들과 경비대원들이 다가와 그녀를 걱정했다. 헤리슨은 눈물을 닦으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몸을 돌리고 크랭크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다.
퍽!
엉거주춤한 크랭크가 투구를 돌리자 무서운 얼굴이 된 헤리슨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내가 뭘 봤는지 나도 믿을 수 없으니 입을 다물겠다! 그러니 너는 절대로 그걸 벗지 마라. 알았냐!”
“알겠습니다.”
“어서 오토마톤들을 데리고 돌아가!”
총책임자의 지시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지 못했다. 크랭크는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시한 다음 타고 온 마차에 오토마톤들을 태우고 총총 돌아갔다.
마차의 짐칸에 앉아 멀어지는 휴전선 마을을 돌아보면서 캐롯이 말했다.
“주인님 대단하네. 그걸 벗을 생각을 하다니.”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닳는 것도 아닌데 아낄 필요가 있나.”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캐롯이 되물었다.
“혹시 너 일부러 저주 안 풀고 있는 거 아냐?”
크랭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손을 들어 캐롯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한바탕 소란이 있은 다음, 양측의 책임자가 휴전선을 사이에 놓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고 섰다. 둘 다 아직 얼굴이 시원찮았다.
큼직한 수건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코마저 거창하게 푼 푸시케 경비대장이 낄낄 웃으며 손가락을 든다.
“헤리슨, 너 지금이라면 마족이라도 해도 믿겠다. 눈이 아주 빨간데.”
“코맹맹이 소리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서로 좀 낄낄 거린 다음 푸시케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자식 뭐야?”
짧은 한숨을 내쉰 헤리슨이 사정을 설명했다. 푸시케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졌다. 덩달아 눈도 커졌다.
“마녀 고르곤의 저주? 와! 세상에, 우린 지금 그거에 걸린 거였어?”
“그렇지. 나도 말만 들었던 건데, 그 망할 녀석.”
팔짱을 하고 잠시 생각하던 푸시케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냐, 그 친구 나름의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해. 결과적으로 우리 쪽 멍청이들을 말리는 데는 성공했잖아.”
역시 짧은 한숨을 내쉰 푸시케가 고개를 든다.
“미안하다. 애들 단속이 미흡했어. 젊은 애들이 눈이 돌아가 있는 건 알았지만 저 정도 일 줄은 몰랐어.”
“괜찮아. 새로운 걸 알게 되었으니까. 얼굴만 가리면 될 줄 알았는데 마족은 의외로 커다란 것에도 관심이 많나봐?”
“흐흐흣, 황소에게 홀딱 빠진 어느 여편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크고 아름다운 것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넌 틀려?”
대단히 심각한 얼굴을 한 헤리슨이 머리를 흔든다.
“난 아냐. 저렇게 끔찍하게 큰 건 싫어. 이 정도면 좋겠네. 몸도 조금 마른 체형에···.”
자기 머리 한 뼘 위에 손을 올려보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푸시케가 슬쩍 웃는다.
“소박한 취향이네, 죽은 네 남편이 그 정도였어?”
“넌 딸이 있었어? 너 닮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허리를 꺾고 웃기 시작했다. 멀리 성벽 위에서 쳐다보던 경비병들이 중얼거렸다.
“요즘 자주 저렇게 만나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뭔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저 두 사람이 부임하고 많은 게 바뀌었지. 숨 돌릴 틈이 있어서 정말 좋아.”
비슷하게 마족 수비대원들도 목책 너머에 앉아서 날카로운 이빨과 붉은 안광을 드러내며 그들을 주시했다.
“확실히 서로 쌈질하던 그 시절 보다는 났지 않냐. 밥 먹는데 마력수정폭탄이 떨어지진 않잖아?”
“난 오히려 그때가 더 재미있었던 것 같은···.”
“쿠쿠! 쿠쿠! 뭘 봐? 나도 봐도 돼? 봐도 돼?”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사나운 표정을 하고 추억에 젖어있던 마족 경비병의 등에 조그만 소녀가 달라붙었다. 그림자 속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헤실헤실하는 얼굴로 바뀌어서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헤헤~! 그럼, 되고말고. 이 요망한 것!”
“야, 쿠쿠. 너 말하는 거랑 행동이 틀리지 않냐?”
“너도 이 얼굴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냐!”
쿠쿠가 마족소녀를 들어 올려서 들이댔다. 귀여운 소녀가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그 시선에 마족 경비병은 그만 녹아버렸다.
“꺄흐으응! 뭐냐! 이 귀여운 생물은! 나도 안아볼래!”
“너무 막 다루지마!”
“닥쳐! 쿠핀! 이건 우리의 보물이다!”
“내 딸이거든?!”
갑옷을 입은 마족 여자가 기가 찬 표정으로 버럭 외쳤다.
양측 책임자끼리의 회담으로 상황은 정리되었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의 밤이 찾아왔다. 양측 수비대원들은 넓은 휴전선의 할당 받은 위치로 가서 경계근무를 시작했다.
“이건 불공평해.”
밝은 달 아래, 바닥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을 내려다보며 모르핀이 낮게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다. 오로지 마족들만 휴전선을 넘어갈 수 없다. 인간들이나 동물들은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은 간단했다.
이 때문에 인간 측에서도 휴전선의 경계 근무에는 회의적이지만, 마족 영지에서만 자생하는 동식물이나 암염 같은 것을 노리고 밀렵꾼들이 자주 넘어갔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비명횡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나마 근무에 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지?
인간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다. 이쪽의 몬스터는 저쪽의 것보다 더 강력하다. 그 기계인형들이 없으면 한낱 곤충만 못해, 누가 누구를 대체 왜?
한참 생각하던 모르핀이 강력한 호기심을 느끼고 발을 들어 휴전선 건너편의 땅을 밟았다.
“우우읍?!”
잠시 후 급격한 두통과 심한 구역질이 올라온다. 재빨리 뒤돌아온 모르핀은 바닥에 엎드려 한참 구토와 구역질을 하고는 입을 닦으며 사납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든다. 시선은 내놓은 토사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아깝게 시리···.”
모르핀이 자기 구역에서 이상한 실험을 해대는 동안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오랜만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근무를 마치고 숙소에서 잠이 들었어야 할 사내가 달빛에 의지해 숲속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낮에 성문 경비병 라이킨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한 사내였다.
때는 봄, 슬슬 몬스터가 올라와 돌아다니기 시작할 무렵이다.
한 손에 든 롱소드에는 비 반사 처리로 진흙을 잔뜩 발라놓았다.
“겔?”
어둠 속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남자가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경험으로 단련된 익숙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시 펴졌다. 남자는 휴전선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갔다.
“쿠핀!”
“멍청아···! 닥쳐···! 목소리 낮추라고···! 저쪽에 모르핀은 귀가 엄청 좋아···!”
머리를 틀어 올린 마족 여성 쿠핀이 그를 윽박지른다. 약간 찌그러진 투구에 마스크를 써서 눈만 드러냈지만 울 것 같은 얼굴은 여실이 드러났다. 후다닥 달려온 남자는 휴전선 앞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하, 하지만 일주일 만이라고···! 미노는 괜찮아? 아프다고···!”
“아빠?”
쿠핀의 다리 뒤에서 방한복을 껴입은 작은 소녀가 고개를 내민다. 마스크를 내리자 턱수염을 기른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마족 소녀 미노가 엄마 뒤에서 튀어나와 두 팔을 든다.
“아빠!”
“조용···!”
푹-!
더 이상 참지 못한 겔은 검을 바닥에 찍어놓고 휴전선을 뛰어 넘어가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아빠···! 아빠···!”
“미노···! 이 녀석···! 내가 안보는 데서 이렇게나 자라서는···!”
무릎을 꿇은 인간 경비병 겔이 딸을 끌어안고 턱수염을 마구 비볐다. 미노는 따갑다고 난리였다. 미안해진 겔이 턱을 만지며 말했다.
“급해서 면도도 못하고 왔어.”
“그러네, 난 네 얼굴이 취향이었는데. 이건 무슨 짐승이냐?”
“으음···. 자, 잠깐만···!”
주변을 두리번거린 겔은 주변에 남아있는 깨끗한 눈을 쓸어 담아와 얼굴에 마구 비비더니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면도를 시작했다.
삭삭···!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딸 미노를 무릎에 올린 쿠핀은 면도하는 사내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어, 어때?”
“입가에 하고 턱에 조금 남았어.”
“어, 음.”
끝끝내 마무리 하자 말쑥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쿠핀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지. 못 알아보기 전에 많이 봐둬야지. 너희는 빨리 늙으니까.”
겔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쿠핀과 미노를 덥석 끌어안았다.
“나는 오래 살 거야. 기필코 살아남아서 늙지 않는 마족 마누라와 예쁜 딸을 자랑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거야···! 제길···! 그때 그냥 죽일걸 그랬어···!”
겔에게 끌어 안겨 있던 쿠핀이 사납게 웃는다.
“케케케-! 나에게 굴욕을 안겨준 네게 비참함을 마주 안겨 주고 싶었거든, 작전 성공이지.”
“너는 그 입이···!”
“뽀뽀하기 좋은 입이지? 음? 쭙쭙~!”
입술을 오물거리며 쳐다보는 쿠핀을 보고 얼굴이 확 달아오른 겔이었지만 밑에서 올망졸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미노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쿠핀이 미노의 머리에 방한복의 후드를 덥혀 씌우고는 뜨거운 입술 박치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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