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장 (2) (56/187)

20장. 가신 구출(2)

화르륵!

새파란 도깨비불이 긴 복도를 메웠다.

스물세 번째 왕도깨비 함달파가 부리는 불이었다.

복도 끝에 선 함달파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화르륵!

화르르륵!

그의 손을 따라 주변의 도깨비불이 일제히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야씨, 저거 지금 우리 공격하는 거야?!”

거칠게 내뱉은 호구별성이 부채를 꺼내 들었다.

촤아아악!

청옥색 접선에서 암녹빛 독기가 번졌다.

날아오던 도깨비불은 호구별성의 독기에 꺼지는 듯 보였으나.

퍼어엉!

퍼어어엉!

일순 푸른빛과 함께 폭탄처럼 일제히 터져버렸다.

그러나 그뿐, 잇따른 폭발에도 아랑곳 않고 함달파는 다시금 팔을 휘둘렀다.

화르르륵!

더 많은 도깨비불이 몰아치듯 우릴 향해 달려들었다.

“계속할 셈인가?”

앞으로 나선 강림 형이 검푸른 신성을 빛냈다.

파아앙!

발설지옥의 염동력이 도깨비불을 날려버렸고.

퍼어엉!

퍼엉!

신성에 닿은 도깨비불이 재차 새파랗게 빛을 뿜으며 폭발했다.

“힘이 닿을 때마다 폭발하는군. 도깨비불에 주술을 불어넣었구나.”

지켜보던 사라가 말했다.

본래 도깨비불이란 파랗게 빛나기만 할 뿐 해를 끼치는 현상이 아니었다.

불을 부리는 본인에게 대상을 해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저렇게 폭발할 리 없었다.

“불이야 별성과 강림이 맡으면 되겠다만, 문제는 저걸 부리는 함달파인데.”

멀찍이 함달파를 노려보며 사라가 인상을 썼다.

“……저치가 우리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는 게 이상하구나.”

함달파는 이미 천 년 가까이 살아온 왕도깨비였다.

삼차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데도 기계적으로 도깨비불만 날리는 것은 분명 이상했다.

나는 복도 끝에 선 함달파를 살폈다.

“아.”

그러다가 문득 어둠 속의 함달파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실?”

복도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주변의 도깨비불이 빛날 때마다 언뜻 가느다란 무언가가 비쳤다 사라졌다.

“……실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알아챈 나는 검수엽을 꺼내 들었다.

“누나! 형!”

도깨비불을 처리하던 호구별성과 강림 형을 큰 소리로 불렀다.

“확인해 볼 게 있어요. 계속 도깨비불 좀 치워주세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함달파에게 달려들었다.

호구별성과 강림 형은 곧바로 한 몸처럼 손발을 맞추며 내 주변의 도깨비불을 쳐냈다.

파아앙!

화르르륵!

뒤이어 노란빛과 빨간빛이 연달아 번쩍였다.

파아앙!

파아아앙!

[ 피살이꽃과 살살이꽃이 피어납니다! ]

[ 두 꽃의 신성이 엮여 당신을 보호합니다! ]

[ 화상에 대한 방어력이 ‘200%’ 상승합니다! ]

사라의 화상 방어 버프였다.

처음 보는 버프였는데 그새 새로운 권능을 연구한 모양이었다.

15년 만에 자리를 내려놓은 게으름뱅이라지만 이럴 때는 분명 오래된 신의 연륜이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어떤 장해도 없이 금세 함달파에게 다다랐다.

가까이서 본 함달파는 유달리 창백한 낯빛을 한 채로 그 눈이 하얗게 뒤집혀 있었다.

“이건…… 확실히.”

나는 단숨에 그의 상태를 알아봤다.

“살아 있는 게 아니야.”

그 순간 함달파가 내게 팔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그대로 팔을 베어 내니 떨어져 나간 팔이 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인형?”

잘린 단면은 마치 인형처럼 속이 비어 있었다.

“역시 실이 조종하는 거였나?!”

정체를 눈치채자 비로소 함달파의 전신에 연결된 투명한 실이 눈에 들어왔다.

실의 끝은 천장을 향해 있었는데 위층으로 뚫고 들어간지라 인형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위에 숨어 있는 놈이 우리가 찾는 흑탑의 간부일 것이다.

촤아아악!

일단 함달파를 조종하던 실부터 끊어 냈다.

실이 끊어진 함달파는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관절이 이리저리 꺾인 모습이 정말로 ‘인형’과 같았다.

“그래, 이렇게 된 거였군.”

어느새 다가온 사라가 옅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감도는 기운은 분명 도깨비의 기운입니다. 불도 마찬가지였고요.”

강림 형이 한마디 보탰다.

“맞아, 그냥 껍데기만 흉내 낸 건 아닌 것 같은데.”

호구별성도 쓰러진 함달파를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화르르륵!

쓰러진 함달파의 몸에 도깨비불처럼 파란색 불이 붙더니 그대로 전소되어버렸다.

“…….”

나는 함달파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봤다.

재만 남은 자리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인형사가 회수한 것 같군요. 태우는 건 눈속임이고.”

그래, 왕도깨비 정도면 무척 귀한 인형일 텐데.

그냥 태워버리는 짓을 하진 않겠지.

“일단 불가사의부터 마저 찾죠.”

나는 더 볼 것 없이 돌아섰다.

우리가 도깨비들을 구출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상 어차피 놈과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리는 음악실.

모아 온 여섯 개의 불가사의를 제물로 분신사바를 했다.

[ (!) ‘폐교’의 일곱 번째 불가사의를 찾아냈습니다. ]

[ (!) 일곱 번째 불가사의 ‘어디에도 없는 방’에 입장하셨습니다. ]

음악실이 무너져 내리면서 순식간에 공간이 바뀌었다.

강당이라고 불러도 될 크기의 몹시 넓은 방.

나는 문도, 창문도 없이 온통 벽뿐인 공간을 둘러보았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뜻일 터.

“야, 여기는 뭔 흑마술사 방이냐?”

주변을 둘러본 호구별성이 한마디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벽은 무언가 주문이라도 걸어놓은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문자들로 가득했다.

또한 곳곳에는 기이한 흙덩이가 놓인 제단까지 여럿 있었는데.

흙덩이 주변에 기묘한 주구(呪具)들이 널려 있는 광경이 딱 봐도 범상치 않았다.

흙덩이.

그게 뭔가 눈에 익어 나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진짜 내가 아는 물건이었다.

“……가짜 몸?”

우주질서보존회에서 유통하는 빙의체.

혼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대충 빚은 진흙 인형같이 생긴 물건.

그게 제단마다 널려 있다는 건…….

“여기서 가짜 몸을 만들었던 건가?”

문득 바리네 조부모를 해쳤던 도사가 떠올랐다.

그때 놈이 점거했던 마을에도 가짜 몸이 여럿 있었지.

나를 제물로 삼아 힌두교의 염라 ‘야마라자’를 깨우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결국 그놈도 흑탑과 관련되었던 것이다.

“주의해야겠습니다. 방에 가득한 주술이 무엇인지 모르니.”

강림 형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주술이라.

그 말에 문득 바리가 잠들기 직전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오빠에게 말씀드리게 될 미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2주 뒤, 내가 또 한 번 염라의 이름을 드러내리라 예언했던 바리는.

예언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이미 단군, 그 사람에게 한 번 졌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이에게 설계한 미래를 빼앗길지도 모르죠.

그때 바리는 말했다.

단군을 비롯한 한반도의 전설급 각성자들은 모두 ‘도사’들이라고.

이제부터는 모두가 바리와 똑같이, 미래를 설계하고 우주에게 청하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다시 말해, 미래를 보는 자들이 모두 자신들이 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지금껏 나는 그저 바리의 예언대로 그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믿고 움직여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바리의 예언을 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내가 맞서야 할 적들 역시 각자 설계한 미래가 있을 테니까.

-오빠는 분명 2주 뒤 흑탑을 치게 되실 거예요.

그리하여 바리는 말했다.

-하지만 흑탑의 주인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겠죠.

결국 나와 흑탑주 중 누가 미래를 실현하는 데 성공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첫 번째 분기점이 찾아왔을 때, 오빠는 분명 그것을 알아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첫 번째 분기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신도깨비들을 구출해 새 업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업이 산처럼 쌓인 흑탑주를 훨씬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흑탑주는, 그것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일 것이다.

“대왕님.”

생각에 잠겼을 때 강림 형이 불렀다.

“아무래도 저쪽에 가신들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여러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다.

도자기나 비녀 같은 오래된 물건과 재봉틀 혹은 전자레인지 같은 전자 제품들이 한데 섞인 채였다.

저것들 가운데 탈해의 가신들이 있을 것이다.

도깨비들의 혼이 잠들어 있는 본체가.

“그냥 봐도 무엇이 탈해의 가신들인지 알겠군요.”

왕도깨비의 첫 번째 가신들은 태자도깨비와 함께 선대 왕도깨비의 손에서 태어난다.

태자도깨비 탈해를 노트북으로 만든 함달파는 탈해의 가신들도 그에 어울리는 물건들로 탄생시켰을 것이다.

“세 분이 먼저 가신들을 찾아주시겠어요?”

나는 삼차사에게 말했다.

“응? 넌 안 하고?”

잡동사니들로 향하던 호구별성이 멈칫하며 물었다.

“……네, 저는.”

나는 그녀를 뒤로하며 대답했다.

“미리…… 해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변에 널린 가짜 몸들, 방 안에 가득한 주술, 그리고 바리의 조언을 곱씹으면서.

흑탑주.

당신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또한, 안다고 막을 수 있을까?

***

잠시 뒤.

나는 가신들을 찾고 있는 삼차사에게 돌아왔다.

탈해의 말에 따르면 사로잡힌 탈해의 가신들은 모두 스물넷.

나머지 도깨비들…… 그러니까 선대 왕도깨비 함달파의 가신들은 안타깝게도 이미 육체가 훼손되어 죽었다고 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바라봤다.

탈해의 가신들 외에 다른 낡은 물건들은 모두 죽은 도깨비들의 본체일 것이다.

“이것 봐라, 전하!”

그때 열심히 탈해의 가신들을 찾던 호구별성이 말했다.

“이건 탈해네 가신일까, 아닐까?”

“……!”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3.5 플로피디스크였다.

“…….”

나는 잠시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을 흐렸다.

“음, 그거 진짜 애매하네요. 그래도 이제 골동품이 맞긴 한데.”

“그치? 그래도 작으니까 일단 챙길까?”

뿐만이 아니었다.

“대왕님.”

이번에는 강림 형이 불렀다.

“이건 어떡해야겠습니까?”

“……!”

형의 손에 들린 것은, 성냥갑만 한 무선호출기…… 통칭 ‘삐삐’였다.

와, 저거 나도 실물은 처음 봤다.

“어…… 그것도 일단 챙기죠.”

좀 수상하지만 혹시라도 빼놨다가 진짜 가신이면 큰일이니까.

“대왕!”

다음은 사라였다.

“둘 중에 어떤 걸 챙겨야겠느냐?”

양손에 무전기만 한 벽돌폰과 얇은 스마트폰을 든 그가 물었다.

“……음, 그것도 일단 두 개 다 챙기죠.”

……이거, 의외로 가신도깨비들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날 수 있겠는걸.

새삼 21세기가 참 빨리 변하긴 했구나 싶다.

아무튼 그렇게 가신들의 본체 후보군을 추려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을 때였다.

화르르륵!

불현듯 방 안 가득히 새파란 도깨비불이 나타났다.

나와 삼차사는 재빨리 전투 자세를 취했다.

“아까 그놈인가?”

강림 형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런, 함달파가 다시 왔구나!”

사라도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중앙에는 어느새 함달파가 도깨비불을 거느린 채 서 있었다.

한데 이번에는 함달파뿐만이 아니었다.

“어? 쟤네 다 죽은 거 아니었어?!”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방구석을 가리켰다.

“……!”

쌓여 있던 잡동사니에서 죽었다던 옛 가신도깨비들이 좀비처럼 일어섰다.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그들이 일제히 도깨비불을 날려 왔다.

화르륵!

화르르륵!

방 안 가득히 새파랗게 타오르는 도깨비불.

그리고 그 속에서.

“으하하하하!”

노인의 광소가 울려 퍼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왕이시여!”

백발에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몸에 걸친 검은 도포에는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저승 던전에서 봤던 흑탑의 문양을 떠올리며 담담히 그를 응시했다.

숨어 있던 흑탑의 간부, 인형사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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