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장 (1) (55/187)

20장. 가신 구출(1)

경기도의 어느 폐교.

탈해의 가신들이 갇혀 있다는 던전의 입구였다.

녹슨 교문 너머로 칠이 벗겨진 낡은 본관이 보였다.

운동장에는 부러진 철봉 밑으로 바람 빠진 공 따위가 굴러다녔다.

“던전을 조작해서 감옥으로 만들다니.”

나는 폐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흑탑이 시스템을 조작하는 데 도가 텄군요.”

전에 저승 던전을 점거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폐교 던전을 지들 멋대로 쓰고 있었다.

“뭐, 그래도 던전의 공략법은 탈해가 말해줬으니까요.”

가신들은 일정한 조건을 충족해야 열리는 비밀의 방에 감금된 상태였다.

그곳에서 홀로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탈해는 공략법을 전하는 내내 죄책감을 숨기지 못했다.

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던전의 공략대로 비밀의 방을 열어 가신들을 구해 내는 것.

두 번째는 던전을 지키고 있을 흑탑의 간부를 쓰러트리는 것.

“그럼 들어가죠.”

지체할 것 없이 그대로 교문을 넘었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팝업창이 떴다.

[ ‘폐교’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던전의 등급은 ‘무용담’입니다.

- 클리어 조건 : 학교 7대 불가사의를 찾으시오.

그런데 팝업창만 뜬 것이 아니었다.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나와 삼차사의 복장이 저절로 바뀌었다.

“어라?”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야, 이거 교복이잖아!”

학교 던전에 들어와서일까?

우리는 어느새 교복 차림이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니트 조끼, 목에는 빨간 타이까지.

교복을 처음 입어 봤을 게 분명한 삼차사가 서로를 돌아봤다.

신들이라 다들 외모가 젊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복을 입을 정도로 앳되지는 않은지라 꼭 단체로 코스프레를 한 것 같았다.

“뭐, 그래도 넌 아직 잘 어울린다, 전하.”

붉은색 한복 치마 대신 새카만 교복 치마를 펄럭이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늙다리 둘은 주책이다 싶은데, 너는 일찍 죽어서 그나마 좀 낫네.”

“……그래요?”

뭔가 듣기 민망해서 코만 쓱 훔쳤다.

근 50년 만에 입는 교복이라 어색하긴 나도 마찬가지인데.

“흠, 이건 확실히 도깨비장난 같구나.”

자신의 교복 차림을 내려다본 사라가 재밌다며 웃고는 매듭을 당겨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대충 입은 듯한 모양새가 그의 나른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쓸데없이 답답하게 만드는군.”

반면 강림 형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버리더니 소매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결국 니트 조끼까지 벗어 던져서, 평범한 셔츠 차림과 다를 바 없어졌다.

……물론 저승 최고의 꼰대가 사라보다도 더 불량한 모습인 게 신선하기는 한데.

교복도 답답한 양반이 스리피스 정장은 어떻게 입고 다니는 거지?

[♪♬♩~♩♩♬~♪]

그때 어딘가에서 학교 종소리가 울렸다.

쿠우웅!

동시에 땅이 진동했다.

“그래, 이게 그 자정의 종소리구나.”

사라가 말했다.

탈해한테 미리 들었던 던전의 특징이었다.

[ (!) ‘폐교’의 첫 번째 불가사의와 마주칩니다. ]

그에 답하듯 팝업창이 떴다.

“네, 이제 시작이네요.”

검을 꺼내며 삼차사에게 말했다.

“계획대로 가죠.”

[ (!) 인연의 무용담 ‘세 명의 차사’의 효과로 삼차사의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

무용담이 발동되면서 삼차사의 스탯이 올랐다.

“이순신 장군을 맡아주세요!”

차사들을 뒤로하며 달려갔다.

“저는 세종대왕을 맡겠습니다!”

약 60년 전.

내가 초등학생일 때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이런 전설이 있었다.

밤 열두 시가 되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서로 싸운다는 전설이.

그래, 어느 학교든 꼭 있는 움직이는 동상에 관한 전설이.

쿠우웅!

쿠우우웅!

운동장 가득히 굉음이 울렸다.

던전에 깃든 괴담의 힘으로 두 위인의 동상이 깨어났다.

“이얏, 저거 진짜로 움직이네!”

호구별성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진짜 도깨비 장난 같다, 야!”

칼을 들고 돌진하는 장군상을 향해 그녀가 청옥선(靑玉扇)을 휘둘렀다.

촤르륵!

활짝 펼쳐진 접선에서 녹색의 독기가 흘러나왔다.

파아아앙!

뒤이어 강림 형의 검푸른 신성도 장군의 머리를 덮쳤다.

콰지직!

강력한 힘에 머리가 날아갔지만, 몸통만 남은 동상은 아무렇지 않게 또 칼을 휘둘러 왔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한 번 더 반짝였다.

발설지옥의 보이지 않는 주먹에 이번에는 동상의 두 팔이 날아갔다.

“……!”

한데 놀랍게도 동상의 부서진 팔들은 곧바로 미사일처럼 형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흥.”

코웃음 친 그가 그것들을 다시 신성으로 쳐냈다.

파아앙!

검푸른 빛과 함께 완전히 부서진 팔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런데.

촤르륵!

더 잘게 부서진 그것들은 거듭 벌떼처럼 또 달려들었다.

“과연.”

강림 형이 말했다.

“더 부숴 봤자 성가시기만 하겠군.”

탈해가 말해준 그대로였다.

공략법을 몰랐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동상을 부수면 부술수록 잔해는 그만큼 수를 늘려 공격하니까.

이순신 장군상을 박살 내는 것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진짜 공략 대상은 세종대왕상이다.

나는 장군을 삼차사에게 맡기고 대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녕하셨습니까, 대왕님!”

책자를 펼친 세종대왕상이 날 보며 시뻘건 눈을 빛냈다.

“저도 대왕이랍니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넸더니.

촤르르르륵!

대답이라도 하듯 세종대왕상이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그런 전설도 있었던가.

열두 시마다 세종대왕의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가는데, 마지막 장이 넘어가면 학교가 무너진다고.

쿠우웅!

쿠우우웅!

그 전설이 여기에도 있었는지 동상이 책장을 넘기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운동장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 또한 속임수일 것이다.

부술수록 귀찮아지는 이순신 장군상처럼 말이지.

“실례 좀 하겠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세종대왕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거 한 장만 주세요!”

그러고는 동상이 넘기던 책을 한 장 찢어버렸다.

부우욱!

책은 진짜 종이처럼 쉽게 찢어졌다.

[ (!) ‘폐교’의 첫 번째 불가사의를 찾아냈습니다. ]

팝업창이 뜨면서 운동장을 울리던 진동이 순식간에 멈췄다.

드르륵!

공격적으로 날뛰던 이순신 장군도, 위협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세종대왕도 순식간에 ‘동상’으로 돌아갔다.

이순신 장군의 부서진 팔과 머리가 멀쩡하게 돌아오고, 세종대왕의 찢어진 책장 역시 온전해진 모습이었다.

[ 첫 번째 불가사의(D) ]

- 나랏말ᄊᆞ미 듕긕에 달아.

- 열두 시가 되면 움직이는 세종대왕상의 훈민정음에서 찢어 낸 종이.

인벤토리에 들어온 아이템의 등급은 D(Dungeon).

이 던전에서만 사용 가능한 아이템임을 뜻하는 특수 등급이었다.

이런 식으로 폐교의 불가사의 여섯 개를 모아 마지막 일곱 번째 불가사의, 비밀의 방을 여는 것이 던전의 공략법이었다.

“탈해가 공략법을 알려준 덕에 쉽게 끝나겠군요.”

뜯어 낸 종이를 팔랑이며 삼차사에게 말했다.

어쨌든 공략법을 아는 터라 폐교를 헤맬 일은 없게 됐다.

이대로 불가사의를 모아 가신들을 구출하면 될 것이다.

***

두 번째 불가사의는 미술실이었다.

“들어가서 빨간 펜을 찾아오면 됩니다!”

나는 삼차사에게 다시 한번 공략법을 말하며 미술실 문을 열었다.

“아, 저기 바로 있네요.”

빨간 펜은 찾을 것 없이 바로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응?”

그런데 미술실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나 혼자밖에 없었다.

“다 어디 가셨어요?”

두리번거리며 차사들을 찾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음산하게 전시된 아그리파와 줄리아노의 석고상뿐.

그리고.

“아, 깜짝이야.”

그에 더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거울이 있었다.

시선을 돌리려는데 문득 목덜미 부근에서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거……알아?

색색 바람이 새는 목소리로, 거울에 비친 내가 말을 걸었다.

-미……술실……에는 거울……이 없……어.

교복 차림의 나를 보니 새삼스러운 한편 괜히 호구별성의 말이 떠올랐다.

많이 어려 보이나?

그래도 스물은 넘어서 죽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동상들과 대치하느라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갈색인 터라 살짝 불량해 보여서 머리칼을 정돈했지만, 거울 속 나는 그런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별안간 흰자위가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럼 넌 귀신이야?”

마치 그 자리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기이해진 얼굴을 보며 나는 물었다.

-이히……키히,히……히……히,히힛!

내 물음에 거울 속의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웃기 시작했다.

뻥 뚫린 듯 검어진 눈에 이어 입이 쭉 찢어졌다.

창백한 살결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맞……아……귀,신……이야…히…이,히잇,히,힛!

금세 흉측하게 변한 그것이 머리를 흔들며 기괴하게 웃어 젖혔다.

“그래? 반가워, 난 저승사자야!”

촤아아악!

더 볼 것 없이 검수엽으로 거울을 베었다.

“거 돌아가셨으면 빨리 성불 좀 합시다. 지박령 돼서 진상 부리지 말고!”

미술실에는 거울이 없다더니, 말마따나 거울을 베고 나온 것은 빨간 펜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펜은 속임수고 이쪽이 진짜일 터.

[ (!) ‘폐교’의 두 번째 불가사의를 찾아냈습니다. ]

팝업창이 떴다.

[ 두 번째 불가사의(D) ]

- 미술실에는 거울이 없는데 어째 빨간 펜은 있더라.

펜을 들고 나왔더니, 삼차사도 마침 차례로 나오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미술실에 들어가면 각자 따로 이공간과 연결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갑자기 혼자가 됐는데 나랑 똑같이 생긴 귀신까지 나오면 많이 무섭겠지.

들어간 게 귀신 잡아가는 저승차사가 아니라면 말이야.

“뭐야, 네 명 다 챙겨주는 거야? 인심도 좋네!”

마지막으로 나온 호구별성이 펜을 뱅뱅 돌리며 말했다.

역시 다들 저승차사들인지라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였다.

“다음은 과학실입니다.”

과학실도 싱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인체모형을 목도한 일직차사 사라도령께서는.

“호오, 저기다 살살이꽃을 피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라며 흥미를 가지셨고.

“야, 얘는 왜 손톱 같은 걸 먹고 그러냐, 맛없게.”

손톱을 문 개구리 표본을 발견한 월직차사 호구별성께서는 그것의 뒷다리를 쥐고 흔들어 대셨으며.

“…….”

원래도 현대 문물을 싫어하는 강림차사께서는 그냥 과학실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램프며, 현미경, 모든 문명의 흔적들을 일일이 쏘아보았다.

[ (!) ‘폐교’의 세 번째 불가사의를 찾아냈습니다. ]

그리하여 과학실 공략도 금방이었다.

[ 세 번째 불가사의(D) ]

- 과학실 개구리 표본은 가끔씩 정체불명의 손톱을 물고 있다는데.

“생각보다 금방 끝나겠네요.”

과학실을 나서며 삼차사에게 말했다.

“이제 3학년 7반으로 가서 졸업 앨범 챙겨 와야 하는데.”

매년 같은 얼굴이 있다는 졸업 앨범의 마지막 장이 네 번째 불가사의였다.

“중간에 콩콩이 귀신 나오면 책상 위로 숨는 것 잊지 마시고요.”

앨범 자체는 쉽게 얻는데, 콩콩이 귀신이랑 눈이 마주치면 스턴이 걸린다나?

이게 되게 골치 아픈 저주라며 탈해가 당부했었다.

“그다음에는 2층 화장실 가서 빨간 휴지랑 파란 휴지를 받아 와야 하는데……아, 중복되면 안 되니까 미리 정하고 가죠?”

빨간 휴지를 선택하면 출혈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사라의 피살이꽃으로 해결 가능했으며.

파란 휴지를 선택하면 숨이 막혀 죽는다지만, 그것도 사라의 숨살이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새삼 서천꽃밭이 한반도 최강의 사기템이라는 게 느껴졌다.

오색꽃만이 아니라 천계도 쓸어버렸다는 수레멸망악심꽃 같은 것도 쓸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말이지.

어쨌든 그렇게 졸업 앨범과 휴지를 무사히 챙긴 후에는.

마지막으로 아무도 없는데 엘리제를 위하여가 들린다는 음악실에 들어가, 모아온 불가사의들로 분신사바를 하면 끝이었다.

귀신을 불러서 비밀의 방이 어딘지 물어보면 가신들이 갇혀 있는 비밀의 방을 알려준다나?

“좀 귀찮아서 그렇지 공략은 간단하네요.”

문제는 역시 어딘가에 숨어 있을 흑탑의 간부겠지만.

“그럼 우선 3학년 7반 교실로 가죠.”

한데 불가사의를 찾아 다시 이동할 때였다.

“잠깐만, 저거 뭐지?”

어둠에 잠식된 복도에 뜻밖에도 뭔가가 시퍼렇게 번쩍거렸다.

“저거…… 도깨비불 아니야?!”

호구별성이 파란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리서 번쩍이던 파란빛은 우리의 시선에 반응하듯 돌연 수십 개로 증식해 복도를 가득 채웠다.

“도깨비불이라니, 여기 도깨비가 있단 건가?”

인상을 쓴 강림 형이 주변을 살폈다.

……당연히 도깨비가 있기야 있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도 가신도깨비들을 구출하기 위해 왔으니까.

그런데 도깨비불이 복도에 나타났다고?

그렇다면 비밀의 방에 갇힌 도깨비 외에 또 다른 도깨비가 있다는 뜻이 된다.

“잠깐, 저기 뭔가 있다!”

사라가 가리킨 곳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

그의 말대로 시퍼런 도깨비불 사이로 누군가의 신형이 보였다.

현대의 차림새와는 조금 다른, 흡사 모던보이처럼 중절모와 스리피스 정장을 말쑥하게 갖춰 입은 남자였다.

“죽었던 게 아니었나?”

그를 알아본 강림 형이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함달파.”

수많은 도깨비불 가운데 선 남자.

그는 살해당했다던 탈해의 아버지, 23대 왕도깨비 함달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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