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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3) (57/187)

20장. 가신 구출(3)

“불태워버려라, 도깨비들이여!”

인형사가 양팔을 위로 쭉 뻗었다.

위로 뻗친 열 개의 손가락 끝에서 은색의 실이 반짝였다.

함달파를 비롯한 모든 도깨비 인형에 놈의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그 많은 도깨비들이 일제히 도깨비불을 날리는 순간.

“……!”

사방에 어지러이 적혀 있던 붉은색 문자들이 불길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주술이다!”

사라가 외쳤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팝업창이 떴다.

[ ‘도깨비 터’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전설’입니다.

- 해체 조건 : 모든 도깨비를 성불시키시오.

인형사가 만든 필드였다.

나는 해체 조건을 읽고 멈칫했다.

모든 도깨비를 성불시키라고?

저 노인이 부리는 도깨비들은 이미 죽은 도깨비들일 텐데?

“이런!”

직후 깨달았다.

흑탑주가 필드에 심어둔 함정을.

“설마 탈해의 가신들을 성불시켜야 한단 건가?”

해체 조건대로 도깨비들을 성불시키지 않는 한, 저 노인이 부리는 죽은 도깨비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출해야 하는 탈해의 가신도깨비들을 성불시킬 수는 없다.

그들을 성불시키지 않는 한 필드를 해체할 수 없다고 해도.

방 안 가득한 주술은 아마 이런 식으로 필드의 법칙을 조작하기 위한 안배일 것이다.

그들은 이전부터 멋대로 시스템을 조작해 왔으니까.

이대로 필드에 영영 갇혀버리든가.

아니면 왕도깨비와 함께 업경을 만들 가신도깨비들을 잃든가.

이것이 ‘염라의 업경에 당하는’ 미래를 본 흑탑주의 수.

“……곤란하게 됐군.”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하냐. 도깨비불이야 당장은 나랑 강림이 날려버리면 되지만, 우리 마력이 무한한 것도 아니잖아.”

“설마 이런 식으로 수를 썼을 줄은 몰랐구나.”

앓는 소리를 내는 호구별성에 이어 사라도 혀를 찼다.

“네, 이런 함정이 있었네요.”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만요.”

삼차사가 무슨 뜻이냐는 듯 나를 돌아봤다.

“여유가 넘치십니다, 대왕님?”

내 말을 들었는지 인형사가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자, 그 여유가 얼마나 가는지 볼까요?”

화르르륵!

도깨비불이 일제히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나는 약속된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삐요요요용.

어딘가에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다.

허공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거한들이 튀어나왔다.

“이제연 씨.”

삼차사가 가신들을 찾는 사이 내가 미리 불러둔.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입니다.”

시스템을 뛰어넘어 해체되지 않은 필드에도 강림할 수 있는 자들.

“대체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장 조금희가 까만 선글라스를 빛내며 내게 물었다.

“우주질서보존회?”

먼저 반응한 것은 도깨비 인형을 부리던 흑탑의 인형사였다.

“말도 안 돼! 당신들이 어째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노인이 안보팀장을 돌아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인형을 조종하는 것도 잊어버린 듯 무서운 기세로 도깨비불을 쏘아 대던 인형들이 작동을 멈췄다.

안보팀장은 늙은 인형사를 일별하고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게,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만.”

낮게 뇌까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설마 당신들의 사소한 다툼에 저희 안보팀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시겠지요.”

말하는 것을 보니, 역시 잘못하면 그대로 삭제당할 분위기였다.

뭐,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은 했다만.

내게 가해지는 안보팀장의 압박에 삼차사가 표정을 굳혔다.

아무런 언질을 안 해줬으니, 그들도 내 생각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함부로 끼어들 수 없어 나만을 바라보는 차사들을 향해 나는 옅게 웃어주었다.

표정이 굳은 얼굴은 다 다른데도 하나같이 눈에서 걱정이 읽힌다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꺼워서.

“아뇨, 팀장님. 전 그냥 버그 신고를 했을 뿐입니다만.”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팀장의 시선을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전에 불법 빙의체를 만드는 마을을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았었잖아요? 그래서 또 신고를 했을 뿐인데…… 안보팀을 기다리는 사이에 저자가 나타났네요.”

이 방에 들어와서, 제단에 놓인 가짜 몸을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명분을.

“…….”

예상대로 안보팀장은 곧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속이야 훤히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꼬투리를 잡을 만한 건 마땅치 않겠지.

표면상으로는 무당들의 마을에서 가짜 몸을 발견해 신고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규정에 따라 신고자의 신변 보호도 부탁드립니다.”

이 역시 이미 무당 마을에서 확인했던 것이다.

안보팀은 규정에 따라 버그 신고자를 보호해줘야 한다.

지금 같은 경우라면, 그래, 가짜 몸을 만들던 저 인형사에게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냥 버그 신고를 했는데 저자가 튀어나온 거예요.”

정리하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니 제가 잘못한 건 없는 거죠?”

물론 진짜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뭐, 나도 이건 반칙이라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반칙을 먼저 저지른 건 시스템을 조작한 흑탑 쪽이다.

“…….”

잠깐의 침묵.

나를 내려다보던 안보팀장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씰룩였다.

아, 저 양반 빡쳤네.

49년의 저승 공무원 경력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얼굴.

저 버러지 보듯 하는 눈.

진상 혼놈을 만난 나와 똑같지 않은가.

하지만 어쩌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무조건 버그를 발생시킨 쪽이 잘못한 건데.

게다가 저 인형사는 실시간으로 필드의 법칙도 조작하고 있는 상태였다.

우주강도단이 아무리 대충 일한다 하더라도, 떡하니 현행범이 나타났는데 그냥 둘 수는 없을 것이다.

흑탑이 버그로 던전과 필드를 조작하는 것을 지금껏 눈감아 줬을지라도 말이다.

“자, 잠깐.”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인형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 이봐, 당신…… 저 헛소릴 들어줄 생각은 아니지?”

노인이 안보팀장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응? 당신은 우리, 커헉……!”

한데 말을 잇던 그가 별안간 숨을 삼켰다.

“커, 커흑, 커허헉!”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호흡이 불가해진 사람처럼 꺽꺽 소리를 내면서.

“……!”

진짜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두두두!

두두두두두!

두두!

불현듯 기관총을 쏘는 듯한 소리가 울리더니, 놀랍게도 안보팀장의 양팔에 족히 스무 개가 넘는 구멍이 뚫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와 차사들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인형사와 안보팀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크, 커, 커흐으으, 으!”

창백하게 질린 인형사가 계속해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팔에 구멍이 뚫린 안보팀장은 그쪽에 시선을 두지 않고 태연히 나를 응시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저 구멍, 설마 안보팀장이 직접 인형사를 건드려서 생긴 건가?

“버그 신고 접수되었습니다, 이제연 씨.”

안보팀장이 다시 말했다.

“그래요. 당연히 신변도 보호해드려야지요.”

그러고는 순식간에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라고 말하면.”

몸을 숙인 그녀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신 뜻대로 되는 것 같습니까?”

위협하듯 낮게 깔린 목소리.

나는 동요하지 않고 그녀의 시선을 받아냈다.

여차하면 나도 저 알 수 없는 힘에 당할지도 모른다.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여기서 내가 어설프게 굴면 나 하나만 다치는 게 아니니까.

그녀가 저렇게 나올 것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변함없이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오갔을 때였다.

“뭐, 됐습니다.”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몸을 물렸다.

“신고해 주신 대로 안보팀은 버그 제거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더니 딱 소리 나게 손가락을 부딪쳤다.

일렬로 서 있던 다른 안보팀 요원들이 일제히 방 안에 폴리스 라인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팀장이 다시 나를 돌아봤다.

“이제연 씨, 당신의 일도 끝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글라스로 가려진 눈이 나를 향했다.

“죽여.”

으르렁대듯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정해진 순리대로, 지금 당장.”

그 순간.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안보팀장의 몸에 다시금 구멍이 뚫렸다.

“커, 커흐흑, 커흑!”

직후 바닥을 구르던 인형사가 다시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도, 크, 크헉, 도깨비들,의, 모, 크윽, 몸으로.”

괴롭게 신음하던 노인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시작했다.

“도깨,비, 몸,으로, 이, 인형을, 마, 마만들, 저,저를, 벌하여, 커흐흐극!”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인형사를 보다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저자를, 당신이…….”

내 생각이 맞다면 그녀는 지금 인형사를 조종하고 있었다.

온몸에 구멍이 뚫리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 받는 우주의 심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제연 씨, 당신이 처리했어야 할 업이지요.”

안보팀장이 대꾸했다.

“뭐 하고 계십니까. 빨리 처리하지 않고.”

상처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한층 위협적인 목소리로.

“징악의 신. 그게 이 우주의 변방에 당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닙니까.”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그녀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그냥 받아들이기엔 안보팀장의 짓거리가 너무 당혹스러웠다.

순식간에 그녀를 너덜너덜하게 만든 저 구멍들은, 분명 그녀가 우주가 허락하지 않은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내려진 심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구멍이 뚫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과연, 저것을 제대로 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까짓 작은 구멍 몇 번.

그냥 뚫려줄 테니 뜻대로 다 부숴버리겠다는 것 아닌가.

“…….”

하지만 동시에 나는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 수십 발의 구멍이 제대로 된 심판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녀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심판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진짜 심판은, 대체 어떤 짓을 저질렀을 때 내려지는 걸까.

“……처음부터 이상했어, 당신들.”

일련의 일을 곱씹으며 나는 팀장에게 말했다.

“신고된 버그는 처리하되, 정작 버그를 만들어 낸 자들은 그냥 방치했지.”

저승 던전에서 흑탑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던전을 관리하는 우주질서보존회가 버그의 존재를 모를 리 없다.

그것을 이용해 던전을 점거한 흑탑의 존재 또한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흑탑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처럼 간단히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데도.

대체 왜 그랬을까.

그냥 대충 일해서?

아니면.

“당신들은 결국, 지구인한테 직접 손을 댈 수가 없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버그를 발생시킨 저 인형사마저도, 사실은 당신이 직접 처리할 수 없어서 내게 떠맡기는 거야.”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당신들이 직접 지구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이, 우주의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느낀 바를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뻐어어엉!

전에 없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안보팀장의 몸통 한가운데가 사라졌다.

마치 내가 그 말을 하게 만든 그녀를 심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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