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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거든 (99/136)


99.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거든
2022.10.10.


언제 잠들었던 거지?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며, 곤히 잠들어 있는 라크하가 보였다.

매번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업무를 하러 나가더니, 잠이 많이 부족했던 걸까?

아직 내 옆에 잠들어 있는 라크하가 신기했다.

나는 물끄러미 잠든 라크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잠들어 있으니 마냥 순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라크하의 눈꼬리를 슬쩍 올려보았다.


‘그래, 이게 평소 라크하의 얼굴이지.’

어쩐지 그 얼굴이 웃겨서 숨죽여 웃고 있는데, 라크하가 눈을 번쩍 떴다.

나는 서둘러 손을 거두며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일어났어요?”

“덕분에. 그런데……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날 괴롭힌 걸까.”

“괴롭히다뇨. 일어날 시간이어서 깨운 것뿐인걸요.”

천연덕스럽게 둘러대자, 라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어날 시간이어서 깨운 것뿐이다?”

“네, 물론이죠.”

“그렇단 말이지?”

불안한 예감에 상체를 일으켜 도망가려고 했으나, 라크하가 조금 더 빨랐다.

라크하가 내 손목을 붙잡더니 침대로 당겼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진다 싶을 때 즈음, 그가 내 머리를 살짝 받쳐 주었다.

푹신한 감촉이 등 뒤에 닿았다. 다시 침대에 눕게 된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라크하가 입술 끝을 끌어당기더니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를 깨우려면 고작 그 정도로는 안 되는데.”

“그, 그럼요?”

나를 내려다보는 뇌쇄적인 시선에 꼴깍,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내 눈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내 이목구비를 덧그리며 입술까지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고작 눈길만 닿았을 뿐인데, 입이라도 맞춘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입술에 닿았을 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이어질 단계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흘러도 입술 위로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해서 눈을 뜨자, 긴 한숨을 내뱉으며 물러나는 라크하가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라크하를 붙잡았다. 아쉬운 마음에 충동적으로 손이 먼저 나가버렸다.

내가 잡을 줄은 몰랐는지 라크하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게……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키스할 줄 알았는데, 이대로 끝나버려서 아쉽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멋쩍게 웃으며 라크하를 놓은 그 순간이었다.

덥석. 커다란 손이 다시 내 팔을 붙잡더니 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라크하와 바짝 가까워졌다.


“그렇게 아쉬운 눈을 하고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귓가에 낮게 잠긴 목소리가 울리더니 그가 내 귀를 살짝 베어 물었다.

동시에 등 뒤로 묶여 있는 잠옷 끈이 스르륵 풀리며 상의가 느슨해졌다.


“헉!”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내 잠옷을 붙잡았다.

그런 나를 보며 라크하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곤 내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내가 물러날 때는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

라크하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를 쓸어내리다가 어느 한 부분을 꾹 눌렀다. 그의 흔적이 붉게 남아 있는 위치였다.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거든.”

욕망으로 일렁거리는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나는 굶주린 포식자 앞에 선 사냥감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멍하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리타가 방을 정리하러 오며 라크하는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리타는 라크하의 뒷모습을 힐끔 살피더니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작님께서 아직 방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설마 제가 두 분 사이를 방해한 건 아니겠죠?”

이걸 방해했다고 해야 할까. 곤란한 상황에서 꺼내줬다고 해야 할까.

무어라 콕 짚어 말해야 할지 애매해서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


“아뇨, 이제 막 일어났던 참이었어요.”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리타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리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혔다. 요즘 들어 자주 라크하와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질 줄이야. 아마 리타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심코 다음 단계를 떠올린 나는 손바닥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묻었다.

지금까지 매번 주변 상황을 탓하며 변명하거나,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밀어낼 수는 없겠지. 나 역시 라크하를 원하고 있고, 싫지 않으니까.

라크하의 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때, 리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시터님, 내일부터는 저 대신 다른 친구가 올 거예요.”

“리타 씨는요?”

설마 잘린 건 아니죠? 나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대신 눈빛으로 물었다.

내 눈빛을 읽은 리타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삼 일간 휴가를 받았는데, 비스퇴르가가 잠잠할 때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비스퇴르가가 잠잠하다고요?”

나는 처음 듣는 소식에 의아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스퇴르가가 잠잠하다는 건 녹스가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네, 예전처럼 실종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이럴 때 얼른 휴가를 다녀와야죠. 범인이 언제 또 활개를 치고 돌아다닐지 모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어쩐지 찜찜했다.


‘왜 갑자기 잠적한 거지?’

라크하 말대로 데미안과 레이나가 만난 거라면, 녹스도 여전히 비스퇴르가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데미안이 녹스 소환자이자, 녹스 본인의 목숨줄이라는 걸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테리투스는 녹스가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점점 강해지는 마물이라고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멈칫했다.


“리타 씨, 혹시 비스퇴르가가 잠잠해진 지 얼마나 됐는지 아시나요?”

“사흘에서 나흘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어요.”

녹스가 사람을 잡아먹지 않은 지 나흘 정도 됐다는 것이다.

나는 테리투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녹스는 원래 인간을 잡아먹던 마물이 아니라고 했어.’

인간과 어울려 살았고, 사랑에 빠졌다는 건 적어도 인간성이 있다는 것이다.


‘녹스가 더 이상 인간을 죽이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다면…… 데미안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

데미안이라면 녹스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름 녹스의 소환자가 아니던가.

사실 데미안과 녹스가 저지른 죄에 비해 무척이나 평화롭고 이상적인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죗값을 치르는 방법이 꼭 죽음이어야 할까?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했다. 내가 메이아가 되기 전에 살던 세계에서도 늘 논쟁이 되었던 주제였으니까.

그러나 피를 보는 일 없이 일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 방법을 먼저 시도해 보고 싶었다.

결심이 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터님?”

“레이나를 만나 봐야겠어요.”

일단 레이나를 만나서 데미안의 정체에 대해 알리고, 데미안의 위험한 악행을 막을 계획을 짜야겠다.

하지만 나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리타에게 가로막혔다.


“안 돼요! 며칠간은 외출을 자제하시고 푹 쉬셔야 해요!”

“이제 멀쩡하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공작님께서도 그렇게 명령을 내리셨는걸요.”

라크하는 또 언제 그런 명령을 내린 거야.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레이나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라크하는 한사코 말릴 게 분명했다.

내 안전을 우선시하는 라크하라면 내가 이 일에 얽히지 않길 바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원작에 개입해서 생긴 일이니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나는 곧장 편지지와 펜을 꺼내 들어 아인티아 저택으로 초대한다는 쪽지를 작성했다.

***

데미안은 허름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장에 쳐진 거미줄이 창문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에 반짝였다.


“여기에 다시 올 생각은 없었는데…….”

여관에만 있기 답답하고 심란해서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을 뿐이었다.

레이나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전에 그녀와 만났던 마구간에 와 있었다.

데미안은 새하얀 안개꽃을 오크통 위에 올려두었다. 걸어오는 길에 무심코 눈에 띄어서 꺾어온 꽃이었다.


“오늘은 꼭 얘기하자.”

만약 레이나가 이곳에 온다면, 이 꽃을 주면서 얘기하는 거야. 레이나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허름한 옷차림에 불쌍해 보이는 자신이 생각 날 리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제 녹스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 사실 레비탄이라는 식당에서 그 여자를 봤어! 거기 자주 오는 것 같더라고.

 
그렇게 테오를 죽이려던 녹스의 행포를 막을 수 있었지만, 녹스는 금세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챌 것이다.

데미안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전에 앉았던 자리에 앉아 지푸라기 위에 올려져 있는 지도를 펼쳤다.

자신을 찾기 위해 테오와 함께 만들었던 지도라고 했다.


‘누나에게 소중한 사람이겠지.’

지도 외에도 곳곳에 테오와 함께 지냈던 흔적들이 있었다.

데미안은 손끝으로 벽에 얕게 파인 흔적을 쓸어보았다.

무릎 높이부터 차곡차곡 위로 파여 있는 벽에는 레이나 혹은 테오라고 새겨져 있었다.

키를 잰 흔적인 것 같았다.


“엄청 작았네.”

데미안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벽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데미안은 화들짝 놀라며 오크통 뒤로 숨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데미안? 혹시 거기 있어?”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데미안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데미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좋아할 일이 아니야. 무슨 일로 온 건지도 모르잖아.’

데미안은 자꾸만 기대로 들뜨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헉, 진짜 있었어요? 지도를 챙기고 싶어서 다시 들렀는데, 웬 꽃이 있어서 한 번 불러본 거였는데!”

데미안은 오크통 위에 있는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급하게 숨느라 안개꽃을 챙길 생각도 못 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는 길에 많이 있길래…….”

데미안은 당황해서 허둥거리며 안개꽃을 챙겨 등 뒤로 숨겼다.

꽃다발이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막 꺾은 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살풋 웃었다.


“설마 절 위해서 깜짝 선물을 준비한 거예요?”

직설적인 레이나의 물음에 데미안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꽃을 내밀었다.

레이나가 생각나서 꺾었던 꽃이긴 하니까.

꽃을 받은 레이나가 봄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데미안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정말 예쁜 안개꽃이네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기뻐하는 레이나의 모습에 데미안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 그렇지! 잠시만 기다려 봐요.”

그때, 레이나가 무언가 생각난 듯 짧게 탄성을 터트리더니 받은 안개꽃 중 하나를 빼내었다.

그러고는 안개꽃 줄기를 톡, 짧게 끊어 데미안의 귀 뒤로 꽂아주고는 해맑게 웃었다.


 


“제가 어렸을 때 동생한테 이렇게 해줬거든요. 데미안도 잘 어울리네요.”

레이나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데미안은 손을 들어 제 귀 뒤에 꽂힌 안개꽃을 만져보았다.

마음속 어느 한 곳이 간질간질하고 따뜻한 기분이 낯설고, 이상했다.

계속해서 이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레이나에게 목숨이 위험하다고 경고해야 했다. 자신이 만든 위험으로부터.


“그런데 데미안은 어쩐 일로 다시 여기에 온 거예요?”

레이나의 물음에 데미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데미안이 대답을 머뭇거리느라 조용한 침묵이 흐른 그 순간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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