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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최선의 방법 (98/136)


98. 최선의 방법
2022.10.07.



 


“어딜 다녀오는 거야?”

유독 일찍 여관으로 돌아온 녹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녹스는 여전히 테오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데미안은 녹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는 침대에 앉았다.


“뭔 상관이야.”

“평소엔 외출을 하지도 않던 사람이 나가니까 그렇지.”

녹스가 데미안의 옆에 앉더니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고 킁킁거렸다.


“향수 냄새가 나는데…… 여자를 만나고 온 거야?”

데미안은 녹스의 말을 무시하며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녹스는 포기하지 않고 데미안의 등 뒤로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레이나, 그 여자는 아니겠지?”

제 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데미안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녹스는 며칠째 지독하리만큼 레이나에게 집착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매번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로써 레이나에 대해서 알게 됐으니까. 데미안은 녹스를 밀어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평소처럼 사냥이나 하지 그래?”

“그 몸이 갖고 싶다니까? 그래서 일부러 이런 마음에 안 드는 몸에 들어와 있는 거잖아.”

“대체 그 여자의 몸은 왜 갖고 싶은 건데?”

데미안은 긴 한숨을 뱉으며 녹스를 흘겨보았으나 녹스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냥?”

“그 여자의 몸으로 날 유혹하면 내가 내 몸을 줄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니야?”

별안간 녹스의 입가에 맺혀 있던 잔잔한 미소가 걷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녹스는 다시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네 몸을 왜 차지하려고 하겠어.”

“그럼 밤마다 내게 접촉하는 이유가 뭔데?”

“편히 재워주려고 하는 거잖아.”

“뭐?”

“너, 요즘 잠을 잘 자잖아?”

데미안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반박하려다가 멈칫했다.

녹스의 말대로였다.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아도 망자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편히 잠들고 있었다.


“그거 내 덕분인 줄 알아. 네게 엉겨 붙는 잡것들을 매일 몰아내주고 있으니까.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비실거리는 몸이 되면 곤란하잖아?”

녹스가 씩 웃으며 데미안의 어깨를 꽉 쥐더니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허튼짓할 생각하지 말고 말해. 그 여자, 어디에 있어?”

녹스의 물음에 데미안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레이나와 만났다는 걸 알고 묻는 걸까. 혹은 떠보는 걸까.

하지만 뭐가 됐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레이나에 대해서 숨겨야 했다.

데미안은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식당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말을 걸길래 대화하고 왔을 뿐이야.”

녹스는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데미안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데미안은 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런 데미안을 보며 녹스는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떼어냈다.


“아쉽네. 그럼 귀찮은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어.”

“……귀찮은 방법?”

“테오라는 남자는 그 여자랑 친한 사이잖아? 이 몸이 죽은 채 발견되면 장례식에는 나타나겠지.”

데미안은 문득 심장이 서늘해졌다. 테오가 죽는다면 레이나가 슬퍼할 게 뻔했다.

데미안은 서둘러 녹스를 붙잡았다.


“잠깐.”

그 순간, 녹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



“피로가 많이 누적되신 탓에 코피가 나신 듯합니다.”

“아하하, 역시 그렇죠?”

나는 진찰을 끝낸 의원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민망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하지만 라크하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는지 험악한 얼굴로 의원을 몰아붙였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무, 물론입니다! 격렬한 운동을 하신다거나, 무리하시는 일 없이 안정을 취하시면 회복되실 겁니다.”

라크하는 그제야 의원을 놓아주고 내 곁으로 왔다.


“도착하자마자 쌍둥이들과 함께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불안하다고 했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지금은 너무 멀쩡해서 무안할 정도인걸요. 그냥 피로가 쌓인 것뿐이니 표정 풀어요.”

“애초에 피로가 쌓였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와 관련된 일에는 유독 예민하게 반응한다니까.

하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이 정도로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라크하의 어깨에 기대어 창문에 비친 아름다운 석양빛을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여유인지. 마음이 편안해서 눈이 감고 있자니 머리 위로 라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대는 스스로 몸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오늘 저녁 식사를 거른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라크하야말로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식사는 거르지 마세요.”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을 설쳐야 문제가 생기겠지. 그대처럼.”

정곡을 찌르는 말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모두 신전에서 지내는 동안 스트레스를 받고 무리한 탓이었다.

단순히 녹스를 없앨 방법을 알아오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계획은 예상보다 훨씬 고되었다. 신전은 사방에 적들이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나 혼자 힘든 건 아니었다.


“그건 라크하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내게 기대서 눈을 감자마자 잠들지 않았던가.

아마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저 업무에 매진했던 거겠지.

그래서 녹스에 대한 얘기도 아직 해주지 못했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얘기해주는 게 좋겠지?

내가 녹스를 없앨 다른 방법을 찾아오겠다며 떠났으니 라크하도 내가 언제 말해줄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신전에 있는 동안 녹스를 없앨 다른 방법을 알아냈어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라크하의 손길이 멈췄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가?”

나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기대로 들어차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답했다.


“네, 있어요.”

그 방법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 아니었다면, 라크하의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어주었을 것이다. 내가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니까.


“무엇이지?”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녹스를 소환한 사람을 죽이면 돼요. 그리고 그 사람은 데미안이고요.”

라크하가 쯧, 하고 혀를 짧게 찼다.


“어쩌면 녹스가 금기의 흑마법과 관련 있는 마물일지도 모르겠군.”

“금기의 흑마법이 연관되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크하가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금기의 흑마법을 푸는 방법과 유사하니까. 시전자의 죽음.”

시전자의 죽음으로써 금기의 흑마법을 풀 수 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럼 데미안은 금기의 흑마법을 푸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건가?’

데미안은 선대 공작 부부에게 걸린 금기의 흑마법을 풀기 위해 지금까지 라크하를 죽이려는 시도보다 협박을 해왔었다.


“어쨌든, 그렇다면 조만간 해결할 수 있겠어.”

조만간이라고?


“데미안이 어디에 있는지 단서라도 찾은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최근에 아드리엔 영애가 수상한 차림으로 외출했다가 돌아왔다는 보고를 들었어.”

“그게 데미안과 무슨 상관이…….”

나는 말하다가 멈칫했다. 신전에서 레이나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그분이랑 친해지고 싶긴 해요. 보고 있으면, 제 동생 단테가 떠올라서요. 괜히 챙겨주고 싶지 뭐예요.

 
레이나가 데미안과 따로 약속을 잡은 건가? 하지만 대체 어떻게?


“아드리엔 남작가의 사용인을 조사해 보니 수상한 전서구가 왔었고, 레이나의 방에서 데미안이 보낸 쪽지가 발견됐어.”

라크하가 정확히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무어라 적혀 있었나요?”

“숨어 지낼 생각은 없냐고 적혀 있더군.”

데미안이 레이나에게 그런 쪽지를 보냈다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데미안이 레이나가 누나라는 걸 알아챈 걸까요?”

“더 조사해봐야 알겠다만…… 그대는 둘의 관계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사실 오늘 본관에 있는 작은 서재에서 데미안의 일기를 보고 알게 됐어요.”

“본관 서재에 데미안의 일기가 있었다고?”

라크하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나를 보았다.


“네, 거기에 단테라고, 데미안의 본명이 적혀 있었어요. 일기를 읽어보니 어렸을 적, 가족에게 버림받은 상처로 애정결핍이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레이나는 진심으로 제 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드리엔 영애를 이용해서 데미안을 꾀어낼 생각인 거지.”

가슴에 무거운 돌이 얹힌 것만 같았다. 데미안을 죽여야 녹스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레이나를 이용하기까지 한다니. 레이나가 직접 제 동생을 사지로 몰게끔 하는 것과 다름없는 방법이었다.


“……꼭 그 방법밖에 없을까요?”

“지금까지 데미안의 뒤를 쫓았지만,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어.”

결국, 레이나를 이용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거구나. 머리로는 이해가 갔지만,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원작을 뒤틀어서 생긴 일처럼 느껴졌다.


“메이아.”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라크하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더니 몸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드리엔 영애가 신경 쓰이는 마음은 알아. 하지만 녹스가 언제 습격해올지 모르는데,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나 역시 알고 있었다. 녹스는 이미 과거에도 한차례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존재였으니까.

만약 또다시 그 일이 반복된다면, 키네스는 황제로서 제국의 안위를 위해 신력을 쓸 것이다.


‘그럼 축복의 의식도 불가피한 일이 되겠지.’

제국을 구하고 쓰러진 황제에게 축복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도망자 신세가 될 테니까.


“그리고 내겐 그대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끌어안은 라크하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 행복을 유지하자고 레이나가 불행해질 걸 알고 놔두는 게 맞는 걸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더욱더 머리만 아파져 왔다.

나는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말없이 그저 라크하의 등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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