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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어떤 죗값이든 (100/136)


100. 어떤 죗값이든
2022.10.14.



“저번에 절 두고 혼자 갔던 일이 신경 쓰였던 거예요?”

데미안의 대답이 늦어지자, 레이나가 혼자 지레짐작하며 물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여전히 말발굽 소리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레이나와 만난 마구간은 주변을 숲이 둘러싸고 있는 탓에 누가 올 법한 곳이 아니었다.

아마 외부인보다는 레이나나 제 뒤를 미행한 사람이리라.


‘녹스인가? 혹은 아인티아 공작가의 기사들?’

데미안은 말발굽 소리에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한 걸 보아하니 수가 여럿인 듯했다.

녹스가 누군가와 함께 다닐 일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아인티아 쪽 사람들이구나.’

데미안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결국은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레이나를 미행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노리는 사람은 레이나가 아니라 자신일 테니까.

이대로 혼자 도망을 치는 게 좋을까?

데미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뒤이어 들려온 레이나의 말에 생각을 바꾸었다.


“아! 그때 왜 쪽지에 그런 말을 남겼는지 알려주려고 온 거죠? 안 그래도 저도 오늘 데미안을 만나면 그걸 물어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레이나에게 녹스에 대해 알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장소가 발각된 이상 여기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대화해요.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들킨 것 같아요.”

“네? 대체 누구한테…… 어어?”

데미안은 레이나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녀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문밖으로 나온 데미안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디로 몸을 피해야 할까?

가장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은 비스퇴르가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들면, 기사들이 수색하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아인티아 기사들이 비스퇴르가와 이어진 길목으로 올 확률이 높았다.


“데, 데미안! 어딜 가려고요?”

“저쪽 숲을 통해 돌아서 비스퇴르가로 갈 거예요.”

그 길이 안전할 거라고 판단한 데미안은 곧바로 레이나를 이끌고 숲으로 달렸다.

하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숲이어서 지형이 거칠고, 나뭇가지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나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조금!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요?”

체력이 동난 레이나가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몹시 지친 듯한 레이나의 모습에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기사들이 아직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못한 건지 숲은 조용했다.

나무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누가 쫓아오길래 이렇게 도망쳐야 하는 거예요?”

“아인티아 공작가의 기사들이 쫓아오고 있을 거예요.”

“그럼 도망칠 필요가 없지 않나요?”

“네, 당신은 도망가지 않아도 돼요.”

“후,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레이나가 뒤늦게 이상한 점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미안은 왜 도망쳐야 하는 거예요? 데미안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레이나의 눈빛에 데미안이 어깨를 움찔했다.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저를 쫓는 이유는 간단했다.

선대 아인티아 공작 부부를 구하기 위해 라크하의 주변인이라면 습격도, 납치도 서슴지 않고 행했으니까.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아인티아 공작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데미안은 레이나의 시선을 피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라크하 아인티아. 금기의 흑마법으로 선대 공작 부부의 정신을 망가뜨려서 북쪽 숲의 별장에 가둬놓은 장본인.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장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선대 공작 부부야말로 제 구원자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분들을 구하기 위해 악행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하지만 레이나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나 원래 가족들이 저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만 알았다면,

녹스를 소환하는 일도, 라크하의 주변인들도 건드리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고 지금쯤 누나의 곁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겠지.

데미안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레이나가 뼈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꽉 주먹을 쥐고 있는 데미안의 손을 펴 주었다.


“데미안,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미안해요, 제가 너무 개인적인 걸 물었어요.”

“……제가 더 미안해요.”

못난 짓을 저지른 동생이라서. 데미안은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하고 삼켜냈다.


“데미안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자, 이만 푹 쉬었으니 얼른 움직여 봐요.”

레이나가 힘차게 허리를 세우더니 데미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미안은 문득 이대로 따스한 저 손을 잡고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제 욕심이었다. 이미 자신은 도망자 신세이니까. 레이나를 힘들게 할 순 없었다.


‘차라리 지금 녹스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좋을까?’

울퉁불퉁한 숲길은 레이나에게 버거워 보였다.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힘들어하지 않았던가.

설상가상으로 날씨는 비라도 올 것처럼 우중충했다.


“데미안?”

데미안이 반응이 없자 레이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지금 얘기하자.

어차피 레이나는 아인티아 기사들에게 발각이 되어도 상관이 없지 않은가.


“제가 숨을 생각 없냐고 물었던 이유가 궁금하다고 하셨죠.”

“하지만…… 지금은 도망치는 게 우선이지 않나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지.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녹스……라고,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이 있는데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테오의 몸에 있고요.”

“에이, 지금 장난치는 거죠?”

레이나가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데미안을 쿡 찔렀다. 하지만 데미안은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테오의 몸으로 당신에게 접근하려고 할 테니 당분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테오와 만나지 마요. 설령, 그 어떤 일이 죽음과 관련 있을지라도.”

심각성을 느낀 레이나가 표정을 굳혔다.


“……데미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모든 걸 알게 된다면, 레이나는 자신을 경멸과 증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 마물을 소환한 건 자신이니까.

끝까지 악행을 숨기려는 저를 향해 누군가가 욕을 퍼부어도,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천벌을 받아도 좋았다.

어떤 죗값이든 달게 받을 테니, 레이나에게만큼은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레이나는 유일하게 어떤 조건도 없이 제 행복을 빌어준 누나니까.


“알려줘요. 누가 죽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레이나가 데미안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테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레이나에 대해 아직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테오를 소중히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다.

때마침 인기척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레이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미안해, 누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미안은 홀로 숲을 벗어났다.


 

***

레이나는 제 품에 있는 안개꽃을 내려다보았다. 데미안은 늘 그랬듯 순식간에 떠나갔다.

하지만 누나, 라고 자그맣게 말하던 데미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꿈결처럼 맴돌았다.

데미안이 단테를 닮은 탓일까. 무시하려고 해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냥 한 말이겠지.”

레이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데미안에 대한 생각을 떨쳐냈다.

그보다 더 시급하고 난감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과 테오였다.


‘테오의 몸에 마물이 들어가 있다고?’

레이나의 상식상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데미안이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데미안은 사실을 고하는 사람처럼 무척 진지하고 심각해 보였다.


“정말이라는 거야……?”

하지만 이상했다. 그게 전부 사실이라면, 데미안은 어떻게 알고 제게 알려주는 걸까?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테오를 찾아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테오와 만나지 마요. 설령, 그 어떤 일이 죽음과 관련 있을지라도.

 
하지만 데미안의 경고가 레이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뿐이면 다행이었다.

하필 메이아도 테오를 만나지 말라고 한 탓에 더 망설여졌다.

두 사람이 만나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다르지만…… 이게 우연일까?

최근에 연속으로 같은 말을 들으니 영 미심쩍었다.


“어쩌면 좋지?”

레이나가 답답한 마음에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민하던 그때였다.

톡, 톡.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안 되는데!”

레이나는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리며 급하게 나무 아래로 숨었다.

비가 많이 오는 건 아니겠지? 레이나는 초조하게 우거진 잎사귀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추적거리는 빗소리에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함께 섞여들었다.


“……아드리엔 영애?”

레이나는 눈을 멍하니 깜빡이며 저를 부른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에 안개꽃을 들고 있는 우람한 덩치의 남자가 보였다.


“누구……시죠?”

“아, 전 아인티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파트라슈 파블로프입니다.”

파트라슈의 소개에 어쩐지 레이나는 어쩐지 긴장이 돼서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추적하고 있을 거라는 데미안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곳에 어쩐 일이시죠?”

“주변을 수색하다가 떨어진 안개꽃을 발견하고 따라왔습니다.”

레이나는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보다 안개꽃 양이 줄어 있었다.

데미안과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꽃을 흘린 듯했다.


“그런데…… 아드리엔 영애는 이곳에 어쩐 일이신지요?”

“안개꽃이 예뻐서요. 꽃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들어오게 됐어요.”

레이나는 일부러 둘러 말했다. 친분이 없는 아인티아 공작보다는 동생 같은 데미안의 편에 서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인티아 공작에 관해 물었을 때 데미안의 얼굴이 무척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파트라슈의 질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혹시 붉은 머리에 여기, 눈 밑에 점이 있는 남자는 못 보셨습니까?”

“아뇨, 아무도 못 봤어요.”

레이나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미심쩍은 시선이 레이나의 얼굴을 훑었다.

이미 알고 묻는 거라면 어쩌지? 레이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행히 파트라슈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의심의 눈빛을 거두었다.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하십시오. 그럼 숲이 험해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저와 함께 가시죠.”

“마침 날이 우중충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레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파트라슈의 뒤를 따랐다.

데미안과 관련된 질문이 곤란하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 돌아갈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드리엔 남작가까지 모셔다드리면 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해주시면…….”

레이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던 말을 뚝 멈추었다. 어쩌면 메이아 님이라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메이아는 아인티아 공작의 약혼자인 데다가 신의 딸이다.

그러니 아인티아 공작과 척을 진 데미안에 대해서도, 어쩌면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침 아인티아의 기사들과 함께 있는 참이기도 했다.


“저, 혹시 아인티아 공작가로 함께 가도 될까요?”

 

***



“죄송해요, 메이아 님.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죠?”

“아, 아뇨, 괜찮아요.”

사실 많이 놀랐다. 벌써 레이나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나는 당황해서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 레이나에게 초대 편지를 보낸 지 고작 몇 시간도 채 안 됐다.

편지를 읽고 온 걸까? 혹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레이나가 충동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나에게 답장도 하지 않고 찾아올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아인티아의 기사들과 함께 왔다는 점이 의외였다.

그렇게 레이나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라크하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되어 동석하게 되었다.


 


“무슨 일 때문에 메이아를 만나고 싶다고 한 거지?”

라크하가 경계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레이나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멋쩍게 웃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메이아 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한테요?”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옆에 앉아 있는 라크하를 흘긋거렸다.

나와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듯했다.

마침 나도 레이나와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에 나는 흔쾌히 레이나의 의견을 따라주었다.


“라크하, 잠깐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나 님과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요.”

“…….”

하지만 라크하는 내 요청이 불만스러운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라크하, 아주 잠시만요. 응?

내가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내자,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얘기가 끝나면 불러.”

문이 탕 하고 닫혔다. 라크하가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레이나는 입을 열었다.


“우선, 사전에 약속도 잡지 않고 방문한 점 사과드려요.”

역시 레이나는 내 초대장을 보지 못하고 온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안 그래도 저도 레이나 님과 대화하고 싶어서 초대장을 보냈어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공작님께는 꼭 비밀로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레이나의 근엄한 표정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밀로 해드릴게요.”

“혹시 데미안을…….”

그때, 문밖이 굉장히 소란스러워지며 레이나가 말을 멈추고 의아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뭐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잠시만요. 확인만 해보고 올게요.”

나는 레이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때, 곧바로 들려오는 소식에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테, 테오 네리스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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