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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그저 그뿐이었다 (89/136)


89. 그저 그뿐이었다
2022.09.05.



 
테리투스의 음성이 들려오자마자, 나는 대신관을 돌아보았다.

대신관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얼빠진 얼굴로 늑대 동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 보는 대신관의 표정이었다. 대신관은 늘 온화하거나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다행히 성물 덕분에 테리투스의 음성이 들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하며 긴장을 풀었다.

대신관이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내가 테리투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증명되어야 대신관은 내가 했던 말을 전부 믿을 테니까.


“네, 테리투스 님이세요.”

“오, 테리투스 님이시여.”

대신관이 두 손을 모으며 신을 경배하는 구절을 읊었다. 성심성의껏 테리투스를 경배하는 대신관의 모습에 머쓱해졌다.


‘나름 신인데, 너무 동네 친구처럼 소개했나?’

하지만 이미 테리투스는 나한테 동네 친구처럼 친근했다.


[반갑구나, 하비엘. 네 신앙심은 내 각별하게 눈여겨보고 있다.]

나와 대화를 할 때와 달리 위엄 넘치는 목소리였다.


“신자로서 진심을 다해 테리투스 님을 모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대신관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듯 테리투스의 목소리가 한결 들떴다. 누가 아부를 좋아하는 신 아니랄까 봐.

이미 테리투스와 여러 번 대화해 본 나만 알아챌 수 있는 변화였다.


“모든 신자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지요. 지고하신 테리투스 님께서 하해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이 세계를 품어주시고…….”

테리투스를 향한 대신관의 찬양은 쭉 이어졌다.


“……제르디아에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 대신관님.”

나는 대신관의 말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잽싸게 그를 불렀다.

이러다가 대신관의 찬양만 듣다가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갈 것 같았다.

점심이 되면 레이나가 올 테니, 그 전에 테리투스와 모든 대화를 끝내야만 했다.


“혹시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하비엘, 내 딸과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데 잠시 물러나 줄 수 있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그럼 메이아 님, 저는 기도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행히 테리투스가 끼어들면서 대신관은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별말 없이 떠나갔다.

대신관과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테리투스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질릴 정도로 나를 부르더니 이제야 이곳에 왔구나.]

“이곳에서 테리투스 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몰랐어요. 매번 동물로 현신해서 오셨잖아요.”

[한동안 제약이 걸려 있었어.]

“제약이요?”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의아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래, 신들 사이에 정해놓은 약속 같은 것이지. 사실 지상의 일에 개입해서 신력을 사용하는 건 금제가 걸려 있어서 말이야.]

고작 습격당했을 때 키네스를 부르겠다고 신력을 써서 제약이 걸렸다니. 그 탓에 내가 테리투스를 만나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사제들의 눈총과 키레타의 농락, 그리고 키네스의 눈치를 보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온갖 고생을 한 걸 생각하니 울분이 치밀었다.


“그러게 왜 황제를……!”

욱해서 버럭 외치려던 나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분하긴 하지만, 아직 테리투스에게 얻어내야 할 정보가 있었다.

나는 긴 숨을 뱉어내며 들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결국, 당분간 여기서만 테리투스 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거네요.”

[이곳은 다른 신들도 범접할 수 없는 내 공간이거든. 네게 말을 걸 수 있는 매개체도 있고.]

“늑대 동상이 매개체인가요?”

테리투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제단 위에 있는 늑대 동상 앞에 섰을 때였다.


[그럼, 내가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의 모습이니까.]

지상에 내려올 때는 날렵한 늑대로 내려왔네. 매번 테리투스가 통통한 동물의 모습으로 현신한 걸 생각해 보면 의외의 모습이었다.


‘하긴 통통한 늑대는 조금…… 모양 빠지긴 하지?’

통통한 늑대를 떠올린 순간, 나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느냐?]

“으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내저은 나는 테리투스의 관심을 돌리려고 곧장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테리투스 님. 녹스라고 괴상한 마물 아시죠?”

[그래. 그놈이 또 날뛰더구나. 원래 그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지.]

“정신을 못 차렸다니요?”

테리투스는 세간에 알려진 전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녹스는 원래 사람을 잡아먹던 마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들과 공생하면서 살았지. 그땐 참 순수한 마물이었어. 인간과 사랑에 빠질 정도였으니까.]

“네에? 말도 안 돼요!”

녹스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니.

커다란 망치에 두 번 연속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얼빠진 내 모습이 웃긴지 테리투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녹스가 사랑하던 인간에게 배신을 당하기 전까지는.]

테리투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게 모든 일의 시초였단다. 녹스가 처음으로 살생을 저지르더니 그때부터 계속해서 허기를 느끼면서 날뛰기 시작했지.]

“그래서 테리투스 님께서 봉인을 하신 건가요?”

[내가 아끼는 아이의 터전을 망치는데 어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느냐. 내 직접 지상으로 내려와서 녹스를 막으려고 했지. 지상에서의 힘이 반감되지만 않았더라도 봉인하는 데 그치지 않았을 거다.]

이때부터 테리투스의 편애가 시작됐구나. 오랜 역사에 걸쳐 지속된 테리투스의 편애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테리투스 님께서 아끼는 아이라면 제르디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가요?”

[리페타 제르디아. 그 당시에 내가 본 아이 중에 가장 선한 아이였지.]

잠자코 테리투스의 얘기를 듣던 나는 문득 드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상의 일에 개입해서 신력을 사용하는 건 금제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음…… 그게 말이다.]

테리투스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때 내가 지상의 일에 개입하면서부터 생긴 금제란다. 그래도 금제를 당하기 전에 리페타에게 신력의 일부를 줘서 다행이지. 덕분에 지금 녹스를 해결할 아주 쉬운 방법이 남아 있는 거고.]

제르디아 황가 대대로 내려온 신력. 그게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이라는 건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아온 이유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신력을 쓰면 제가 축복을 내려야 하잖아요. 다른 방법은 없나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축복을 내리는 것이 싫으냐?]

잊을 만하면 꼭 한 번씩 이 얘기를 꺼낸다니까. 예전의 메이아라면 모르겠으나,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겐 라크하와 쌍둥이들이 있으니까.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두고 희생하는 운명을 택하고 싶진 않았다.


“저는 죽고 싶지 않다니까요.”

[잠을 잘 뿐이지 죽는 것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란다.]

이 빌어먹을 신이 정말.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물끄러미 늑대 동상을 바라보았다.

테리투스는 다른 방법이 없냐는 말에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분명, 신력 말고 다른 방안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테리투스는 늘 다른 말로 둘러대거나 침묵으로 일관했으니까.


“다른 방법도 있는 거죠?”

[……예리하구나.]

“알려주기라도 해줘요. 다른 방법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볼게요.”

테리투스는 긴 한숨을 푹 내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녹스의 봉인을 풀고 소환한 인간의 생명을 거두면 되느니라.]

결국, 녹스를 없애기 위해서는 소환자 또는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속이 착잡했다.


“……녹스는 누가 소환했는지 아시나요?”

[금기의 흑마법을 사용한 인간.]

순간 라크하가 가장 먼저 떠올랐으나, 나는 금세 그 생각을 떨쳐냈다. 라크하가 소환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금기의 흑마법을 쓰는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데미안이 녹스를 소환했다고?’

 

***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데미안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문 앞으로 다가간 데미안은 커튼 사이를 살짝 들춰보았다. 아직 어둑한 새벽인데 골목 안쪽으로 걸어가는 녹스가 보였다.


‘레이나라는 여자에게 가는 건가? 혹은 그냥 사냥하러 건가?’

무심코 레이나를 떠올린 데미안은 멈칫하며 긴 한숨을 뱉으며 얼굴을 쓸었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탐나는 몸이 생겼다며 눈을 번뜩이던 녹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데미안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잠을 더 자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렴풋한 꿈속,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미소와 작지만 따뜻한 손. 그 따스함에 데미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평화롭고 온화한 기운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까맣고 수많은 인파와 함께 데미안은 하릴없이 파도에 휩쓸리는 조약돌처럼 쓸려갔다.
 


-단테!


-누나!

 
안 돼, 안 돼. 데미안은 저를 향해 뻗어진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은 가까워지기는커녕 멀어지기만 했다.

그와 동시에…… 펑-!

커다란 굉음과 함께 눈앞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헉!”

데미안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득한 과거에 빨려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꿈일까, 정말 과거에 있었던 일일까.’

데미안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어느새 해가 떴는지 살짝 가려진 커튼 사이로 실낱같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얼핏 손끝에 닿는 미약한 빛이 따스했다. 마치 꿈속에서 잡았던 누나의 손처럼.


 
데미안은 둥둥 떠다니는 먼지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역시 아니야.”

녹스가 레이나의 몸을 차지하게 둘 순 없었다. 그 여자를 도와주려고 하는 건 아니다.

친누나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몸을 녹스가 차지해서 나타난다고 하니 썩 내키지 않으니까.

그래, 그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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