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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왔구나 (88/136)


88. 왔구나
2022.09.02.


키네스와 대화를 끝냈을 땐, 이미 라크하는 떠난 뒤였다.

아쉬운 마음이 큰 탓일까. 키네스와 별 탈 없이 대화를 끝냈는데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내 표정이 어두운지 리타는 침구를 정리하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신전에서 지내는 건 이틀밖에 안 남았네요.”

“그러게요. 얼른 이틀 뒤가 됐으면 좋겠어요.”

얼른 쌍둥이들도 보고 싶고, 사제들의 눈총을 받는 신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리타가 정리해 준 침대에 앉았다. 내 한숨 소리에 리타가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흘긋거렸다.


“혹시 황제 폐하와 얘기하면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조금 지쳐서요.”

내일이면, 모든 일이 해결될 텐데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자니 피로한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얼른 지나갈 거예요. 그리고 제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고마워요, 리타 씨.”

“별말씀을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좋은 꿈 꾸세요.”

인사를 하고 나가는 리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나마 리타가 함께 신전을 와서 다행이었다.

레이나를 부를 수 있었고, 라크하와도 무사히 만날 수 있었으니까. 리타는 신전에서도 내게 버팀목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내일도 차를 함께 마시자는 키네스의 제안에 흔쾌히 응할 수 있었다.


‘내일 티타임에는 레이나가 낄 테니까.’

대신 이번에는 키네스의 깜짝 방문을 방지하기 위해 내가 먼저 시간을 제안했다. 오전에는 대신관과 만날 걸 생각해서 점심 이후쯤으로.

레이나와는 오후 12시에 ‘현자의 눈’이라는 광장에서 만나기로 한 참이었다.


“그만 생각하고 잠이나 자자.”

지금 당장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냈으니까. 그저 내일이 오길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

드디어 대망의 날이 찾아왔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혹을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날이!

혹시나 키레타가 손을 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대신관이 보낸 사제는 이른 아침부터 무사히 나를 찾아왔다.

나는 기분 좋게 내 방을 찾아온 사제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의구심이 들었다.


‘이 길로 가는 게 맞아?’

사제가 인적이 드문 길로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분명 대신관님의 명령으로 온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 대신관님께 가는 게 맞나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사제를 바라보았다. 키레타에게 당한 게 한두 번이어야지.

내 시선이 따가웠던 걸까, 사제가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대신관님께서 이 길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말입니다.”

굳이 한 번 더 강조해서 말하는 사제의 태도에 나는 의심을 거뒀다.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는 건 아닌 듯했다. 점점 신전 본관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사제는 은색 리본이 묶인 체인 앞에서 멈춰 섰다.


‘은색 리본이 묶인 곳부터 고위 사제나 대신관, 그리고 황제만 다닐 수 있는 길이라고 했었지?’

대신관의 허락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고. 나는 이전에 대신관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며 안쪽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저 혼자 가면 되죠?”

“예, 쭉 걸어가시면 대신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길을 막고 있는 체인을 넘어갔다. 작은 정원처럼 되어 있는 곳이었다.

앞으로 쭉 걸어가던 나는 이내 나무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대신관을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대신관은 늘 그렇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대신관님.”

“예, 좋은 아침입니다. 메이아 님.”

대신관과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한 순간이었다.

바스락.

불현듯 들려온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에 나는 곧바로 뒤돌았다.

덩달아 내가 바라본 곳으로 시선을 돌린 대신관이 의아해하며 내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메이아 님?”

“잠시만요.”

바스락 소리가 들렸던 수풀로 다가가 확인해 보았으나, 수풀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불어서 난 소리였나?’

나는 수풀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대신관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너무 예민했나 봐요.”

“아닙니다. 조심하는 게 좋긴 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게 신전 본관의 뒷문으로 갈 생각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제야 왜 사제가 인적이 드문 길목으로 안내했는지 이해가 됐다. 키네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신전 본관에 가는 걸 키네스나 그의 사람이 목격하게 된다면, 무엇을 하러 갔냐고 추궁할 것이었다.

신성한 장소로 알려진 만큼, 추궁했을 때 핑계를 대기 어려웠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대신관이 내게 눈짓하더니 앞장서서 걸었다.

***

와아. 나는 입을 벌리고 신전 본관 복도를 훑어보았다.

새하얀 대리석이 깔린 바닥. 높은 아치형 천장과 맞닿은 거대한 기둥들. 아름다운 조각상과 푸른 보석까지.

무엇 하나 웅장하고 고귀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없었다.


“메이아 님도 축복의 의식을 치르던 날에 한 번 와 보셨으니 완전히 낯선 곳은 아니지요?”

“아, 그렇죠. 그날 그대로네요.”

대신관의 물음에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척이나 낯설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이런 복도가 아니었으니까.


‘그땐 분명 늑대 동상이 있었지.’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것 같은 푸른 눈의 늑대 동상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제단과 늑대 동상만큼은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 사제가 한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축복을 내리기 전에 기도실에서 기도를 할 거라고 했었던가?

곰곰이 생각하며 걷는데, 대신관이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무엇을요?”

“혼자 열기엔 기도실 문은 생각보다 무겁거든요.”

혼자 열기엔 문이 상당히 웅장하고 커 보이긴 했다.

축복의 의식을 치렀던 날에 문이 닫혀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아마 문도 못 열고 영락없이 붙잡혔을 것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문을 닫아두나요?”

“예, 기도실이 신전 본관의 중심이니까요. 특별한 의식을 치르기 전날에 고위 사제들을 불러 문을 열죠.”

의식을 치르기 전날이면, 기도의 날이 모레니까…….


“그럼 내일이면 고위 사제님들도 신전 본관에 출입할 수 있는 건가요?”

“오늘부터 출입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오후부터 저녁까지 고위 사제들이 신전 본관 주변에 정화와 축복 작업을 하거든요.”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대신관이 나를 오후까지 붙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큰 문을 나랑 대신관 둘이서 열 수 있으려나?

대신관 옆에 서서 문 위로 손을 갖다 대자, 대신관도 덩달아 문 위로 손을 올렸다.

대신관의 눈짓에 따라 나는 문 위로 힘을 주었다.

끼이익.

문이 땅에 긁히는 소리가 나며 커다란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봤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 눈의 늑대 동상도, 제단도, 몇백 명이 들어와도 될 정도로 웅장한 기도실도. 모두 그대로였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올 줄이야.’

어쩐지 감회가 새로워 멍하니 넓은 기도실을 둘러보고 있자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대신관의 시선이 느껴졌다.


‘맞다,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지……?’

나는 뒤늦게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곤 작게 테리투스를 불렀다.


“테리투스 님?”

반응이 없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문득 불안감이 치솟았으나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 늑대 동상 앞에 가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주로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던 테리투스를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나는 대신관을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제단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제발, 제발. 나는 미심쩍은 눈을 한 대신관을 데리고 늑대 동상이 있는 제단 앞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염원을 담아 테리투스를 부른 그 순간이었다.

삐이-. 귀에 이명이 울리더니 익숙하고 그토록 고대했던 음성이 들려왔다.


[왔구나.]

 

 

***

밤새 잠을 설친 키레타는 은색 리본이 묶여 있는 구역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한 탓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조용한 곳을 걷고 싶었다.

어제 나눴던 대신관의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었다.


-축복의 의식을 다시 치르기로 했나요?


-키레타, 축복의 의식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구나.


-하지만 분명 축복의 의식을 거부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신다고 하셨잖아요!


-…….

 
그 이후로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신관의 모습에 키레타의 속은 타들어 갔다.

신의 뜻을 배반한 여자. 성녀라는 제 위치를 버리고 신전을 떠난 여자.

메이아가 신전을 방문한 날은 날씨도 흐렸다. 신께서 그녀의 방문을 꺼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사실 키레타는 어렸을 적부터 메이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이아는 다 같이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도 사람들이 많은 곳은 무섭다며 방에만 숨어 있었다.

그리고 메이아가 온 이후로 늘 자신에게만 향하던 대신관의 특별한 관심도 그녀에게 향했다.

대신관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면 기분이라도 덜 나빴을 것이다.

하지만 제 소임을 제대로 하지도 않는 메이아에게 대신관은 특별한 정성을 베풀었다.

메이아가 기도를 빼먹어도 이해해 주었고, 매일 아침 메이아의 방을 찾아갔다. 메이아가 방문을 열지 않고 대신관을 무시해도 말이다.


“……역시 짜증 나.”

키레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상쾌한 아침 바람을 쐬면서 걸어도 울분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차라리 기도실에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키레타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였다.

나무 뒤로 숨어 있는 한 남자가 키레타의 눈을 사로잡았다. 키레타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보좌관 비에고 세르비아.

하지만 황제의 보좌관이라고 할지라도 이 정원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무어라 하려고 가까이 다가간 순간, 비에고가 뒤돌더니 키레타의 입을 막으며 나무 뒤로 당겼다.


“……!”

키레타가 발버둥을 치며 바스락, 바로 옆에 있던 수풀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메이아와 대신관이었다.

키레타는 비에고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도 잊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대신관과 메이아의 대화를 듣던 키레타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졌다.


‘저 여자랑 신전 본관에 간다고?’

그것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어째서? 문득 드는 의구심에 눈살을 찡그리던 키레타는 저를 붙잡고 있는 비에고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황제의 보좌관이 움직이는 건 오직 황제의 명령이 있을 때였다.


‘대신관님과 저 여자를 염탐하고 있었던 건가?’

키레타는 비에고가 놓아주자마자 구겨진 옷을 펴며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여기서는 뭘 하고 있었던 거고요?”

“죄송합니다, 키레타 사제님. 방금 전 일은 못 본 척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비에고의 요청에 키레타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어쩌면 대신관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걸 황제가 눈치챈 걸지도 몰랐다.

메이아와 단둘이 만난 이후로 대신관은 축복의 의식을 보류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까.


‘저 여자가 대신관님을 어떻게 꾀어낸 건지는 몰라도.’

그래서 황제가 사람을 붙여 두 사람을 염탐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다른 의미로는…….


‘황제 폐하께서는 축복의 의식을 원하신다는 거겠지.’

키레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키레타 님?”

“……네, 못 본 척해드릴게요.”

적어도 일단은. 키레타는 뒷말을 삼킨 뒤 곧장 몸을 돌려 신전 본관으로 향했다.

대체 저 여자가 어떤 달콤한 말로 대신관님을 꾀어내는 건지 알아내야겠다.

그리고 대신관님이 저 여자의 말에 회유되기라도 한다면……. 키레타는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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