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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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2022.08.29.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비스퇴르가의 술집들은 12시가 되기도 전에 문을 닫기 시작했다.
평소 새벽까지 운영하던 술집들마저도 새벽이 되기 전에 문을 닫고 있었다.
수도를 휘젓는 실종 사건 때문에 다들 늦게까지 영업하는 걸 꺼리기 때문이었다.
건물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갈 때 즈음.
턱.
마지막으로 문을 닫던 술집 문틈 사이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끼어들었다.
술집 주인은 화들짝 놀랐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은 영업 종료했습니다.”
“한 가지만 물어보려고 하는데.”
어둠 속에서 보라색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득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눈빛에 술집 주인은 얼음처럼 굳었다.
‘요즘 기승을 부린다던 실종 사건의 용의자인가?’
다행히 그가 운영하는 술집은 작은 여관을 겸한 곳이었다.
최근에 황실 기사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서 불침번을 교대하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 쓰기도 했다.
범상치 않은 남자의 분위기에 신고하려고 술집 주인이 뒤돌려던 찰나.
커다란 남자의 손이 술집 주인의 팔목을 움켜쥐더니 주머니를 들이밀었다.
“돈은 이 정도면 되려나?”
“……?”
돈? 술집 주인은 의아해하며 묵직한 주머니를 받았다. 주머니를 열자 금화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 정도 돈이라면…… 몇 달은 놀아도 되는 돈이잖아?’
술집 주인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등불에 언뜻 비치는 남자의 모습은 범죄자는커녕 우아한 귀족 같았다.
로브를 쓰고 있지만, 장갑과 신발, 그리고 그 안으로 얼핏 보이는 옷은 일개 평민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자신한테 얻을 정보가 뭐가 있다고 이만한 돈을 지불한단 말인가.
남자가 미심쩍었던 술집 주인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테오 네리스, 그 기사가 이곳에 종종 묵는다던데 지금 여기에 있나?”
테오 네리스라면 싹싹하고 쾌활한 성격 덕에 술집 주인이 기억하고 있는 기사였다.
테오의 행방을 왜 묻는 거냐고 되물으려던 술집 주인은 남자의 살벌한 눈빛에 위축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돈도 받았고, 그냥 우리 가게에 있는지 확인만 하는 건데.’
겁이 많은 술집 주인은 합리화를 하며 입을 열었다.
“테오 님이라면 불침번을 선다면서 어제까지는 저희 여관에 머물렀습니다. 오늘은 휴가여서 낮에 잠시 외출을 했다가 저녁에는 술을 마시러 오시겠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군요.”
그때, 안쪽에서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술집 주인의 아내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문 앞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대치하고 있는 남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보, 가게 문 안 닫고 거기서 뭐 해?”
술집 주인은 아내를 보고 짧게 탄성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오늘 외출했을 때 테오 님을 봤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맞아. 다마시스 식당에서 봤지. 그런데 왜?”
“그게…….”
술집 주인은 제 앞에 있는 남자를 눈짓하며 아내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확인한 아내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술집 주인을 붙잡고 속닥거렸다.
“여보, 이게 무슨 돈이에요?”
“아니, 테오 님에 대해서 묻더니 이 정도로 돈을 주잖아.”
술집 주인의 아내는 탐욕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쓱 훑어보았다.
술집 주인보다 간이 조금 더 큰 아내는 헛기침하더니 도도하게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테, 테오 님은 저희와 친분이 있는 사이라서요. 함부로 말하긴 그렇네요.”
“…….”
남자, 라크하는 게슴츠레 술집 주인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만 봐도 속내가 뻔했다.
하지만 아직 캐낼 정보가 더 있기에 라크하는 순순히 돈주머니를 하나 더 건넸다.
신전에서 나오자마자 시롬과 갈라져서 조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약간의 단서를 잡았을 때 정보를 최대한 얻어야 했다.
“테오 네리스가 누구와 함께 있었지? 자세히 얘기해 봐.”
돈주머니를 하나 더 받은 술집 주인 아내의 입은 술술 열렸다.
“붉은 머리의 여자와 남자랑 함께 있었어요. 여자는 귀족 집안 여식 같았고, 남자 쪽은 굉장히 꼬질꼬질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던데…… 나중에 테오 님이랑 따로 나가는 걸 보아하니 두 사람 꽤 친한 사이인 것 같더라고요? 어울리지 않게.”
귀족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레이나 아드리엔일 터.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남자 쪽은 더 특이한 점은 없었나?”
“글쎄요, 저도 자세히 보지는 못해서…… 아, 아니지. 눈 밑에 점이 있었어요. 어쨌든, 제가 본 건 그게 다예요.”
허름한 복장에 눈 밑의 점, 그리고 붉은 머리. 세 가지를 종합해 봤을 때 라크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데미안……?’
***
집무실로 돌아온 라크하는 시롬이 돌아왔는지부터 확인했다.
하지만 시롬은 네리스 자작가와 아드리엔 남작가까지 둘러보고 오느라 늦는 듯했다.
“……역시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
라크하는 시롬을 기다리면서 지금까지 조사해온 정보들을 정리하기 위해 관련 서류들을 책상 위로 펼쳤다.
데미안과 녹스, 테오, 그리고 레이나.
어쩌면 네 사람 사이에 관계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라크하는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조금씩 걸러냈다.
“이건 아니야. 이것도. 이것도.”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서류를 거르는 라크하의 손짓은 거칠어졌다.
쾅!
이내 라크하는 이를 악물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 거지?”
테오와 레이나가 소꿉친구인 것 외에는 연관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리타의 증언으로 녹스가 테오의 몸을 차지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다만, 테오로 둔갑한 녹스가 왜 데미안과 레이나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크하는 긴 한숨을 뱉으며 얼굴을 감싼 채 의자에 앉았다.
끼이익,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라크하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시롬.”
이제 막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그래서 새벽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시롬인 줄 알았건만.
“오빠.”
“형, 뭐 해?”
아이샤와 델카인이 라크하의 눈치를 보며 집무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틀 만에 보는 아이들이었다.
“아이샤, 델카인?”
“오빠, 언니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라크하의 부름에 아이샤가 라크하에게 안기며 어리광을 부렸다.
유독 메이아에게 의지를 많이 하는 아이니, 많이 그리울 것이었다. 그리고 요즘 쌍둥이들에게 무심하긴 했지.
라크하는 제 품에 안긴 아이샤의 등을 토닥여주며 아이샤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며칠 뒤면 올 거야.”
“언니가 없으니까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 차라리 언니가 우리를 불렀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그럼 바로 신전으로 달려갈 텐데.”
쌍둥이들의 말에 라크하는 무심코 리타의 말을 떠올렸다. 메이아가 레이나를 신전으로 초대했다고 했었지.
-레이나 님이 기도의 날이 되기 전에 꼭 오길 바라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누가 보지 않도록 몰래 다녀오라고…… 헉, 설마 공작님께도 숨겨야 했던 일은 아니겠죠?
참 비밀이 많은 여자다.
메이아는 숨기는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알면 알수록 어려운 여자였다.
제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으나, 신전으로 떠나가 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얻었다고 생각했으나, 아름다운 웃음 속에 감추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 모습이 얄밉고, 심술이 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에 대한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그때, 책상 앞을 기웃대던 델카인이 중얼거렸다.
“녹스? 으음…… 그 전설 속의 마물인가?”
“마물?”
마물이라는 소리에 아이샤가 관심을 보이며 델카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응, 구비전설 선집이라는 책이 있는데…….”
“내가 책 이름을 물었어? 핵심만 좀 말하라고.”
델카인은 아이샤를 쏘아봤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대화하기 참 어려운 타입이었다.
“어쨌든,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녹스가 흑마법의 기원지에서 태어난 마물인데, 신이랑 맞먹을 정도로 강했대.”
“헉! 엄청 멋있어! 아직도 살아 있어? 한번 보고 싶다!”
“절대 못 볼걸? 신한테 봉인을 당했대.”
“아니지! 봉인을 풀면 되잖아! 흑마법의 기원지에서 태어났으면 흑마법으로 봉인을 풀 수 있지 않을까?”
가만히 아이샤와 델카인의 대화를 듣던 라크하가 멈칫했다.
지금껏 녹스가 어떻게 봉인을 풀고 나타났는지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갑자기 북쪽 숲에서 발견했다는…… 잠깐.’
라크하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의 서류 중에서 몇 개 골라냈다.
북쪽 숲에서 녹스와 데미안을 목격했던 기사들의 증언이 적힌 서류였다.
녹스에 대한 첫 목격담이 나온 시기는 탄신연회 전.
그 당시에 데미안을 북쪽 숲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게 우연일까?’
금기의 흑마법까지 익혔다는 건, 흑마법과 관련된 서적은 다 뒤져봤다는 의미일 터.
만약 아이샤의 말대로 흑마법으로 녹스의 봉인을 풀 수 있던 거였다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녹스는 흑마법과 관련된 존재이다.
절박하게 흑마법과 관련된 서적을 뒤져봤다면, 녹스에 대해서도 접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녹스가 메이아를 공격했던 날도 델카인이 납치됐던 날과 겹쳤다. 리베르탄이라는 장소도.
“그럼 아드리엔 남작 영애는……?”
테오의 몸은 녹스가 차지했다고 쳐도, 아드리엔 남작 영애는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라크하가 의아한 눈으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때였다. 시롬이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롬! 지각했대요!”
아이샤가 깔깔 웃으며 시롬을 놀려댔지만, 라크하의 시선에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다물었다.
시롬은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숨을 헐떡이며 라크하에게 다가갔다.
“보고해.”
“테오 네리스는 자작가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드리엔 남작 영애는 잠들어 있었고요.”
“내가 갔던 곳에도 테오 네리스는 없었어.”
“그럼…….”
시롬이 말끝을 흐리며 침을 꿀떡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실종 사건에 연루되었거나…….”
“그 녀석이 몸을 차지한 거겠지.”
시롬이 녹스의 이름을 말하려던 찰나, 라크하가 시롬의 말을 채갔다.
시롬이 의아해하자 라크하는 쌍둥이들 쪽을 눈짓하며 신호를 보냈다. 입조심을 하라는 것이었다.
시롬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조금 의아하긴 합니다.”
“무엇이?”
“실종자의 7할이 여자이기에 그 녀석이 여자의 몸을 선호하는 줄 알았거든요. 물론 그 녀석에게 호감이나 감정 같은 건 없겠…… 공작님?”
시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크하가 벌떡 일어났다.
“아드리엔 남작 영애의 저택으로 가 봐야겠군.”
“또, 또 말입니까? 방금 다녀왔는데…….”
“넌 쌍둥이들을 돌보고 있어.”
“저, 잠은 언제 잡니까……?”
뒤에서 시롬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라크하는 살포시 무시하고 곧장 발걸음을 밖으로 옮겼다.
만약 시롬의 추측대로 녹스가 여자의 몸을 선호하는 게 맞는다면 확인해야 했다.
녹스가 레이나의 몸으로 옮겨갔는지, 아닌지.
만에 하나 레이나의 몸에 녹스가 있는 거라면, 레이나를 초대한 메이아가 위험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