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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여우 같은 놈 (85/136)


85. 여우 같은 놈
2022.08.22.



 
황실 경비병이 식당으로 들어온 탓에, 데미안은 황급히 식사를 마무리하고 녹스를 이끌어 식당에서 나왔다.

레이나가 당황해하며 붙잡으려고 했으나, 몸을 숨기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주변의 아무 여관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창문 밖으로 골목 구석구석에 잠복해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아예 비스퇴르가를 뜨는 게 좋겠어.”

데미안이 커튼을 치려다가 멈칫했다. 밖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레이나가 눈에 띄었다.

데미안은 무심코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살펴보았다.

붉은 머리, 금색과 비슷한 호박색의 눈동자, 살짝 올라간 눈매와 눈 밑의 점.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얼굴도, 이름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누나가 있긴 했다.

어린 시절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진 않았다. 기억이 난다고 해도 힘들었던 기억만 생생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 탓도 있었다.
 


-오, 불쌍한 데미안. 알아보니 널 모른다고 하더구나. 그들은 널 버렸어.


-그냥 잊어. 이제 우리와 함께 사는 거란다. 우리는 널 버릴 일이 없어. 흑마법만 쓸 줄 알면 된단다. 넌 충분히 자질이 있어.

 
자신을 버렸다고 했으니까.

다만 잊으려고 해도 데미안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양 날개가 있는 한 필의 말.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 자신을 버렸던 가문의 문장과 닮았다.

데미안이 낮에 만났던 레이나와 손수건에 놓인 자수를 떠올리던 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길 떠나기 아쉽단 말이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던 녹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뒤늦게 레이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며 커튼을 쳤다.

그런 데미안을 녹스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바라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데미안, 내일 바로 떠날 거야? 조금만 더 머무는 건 어때?”

“수도에 경비가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해.”

“며칠만 더 미루자.”

이해할 수 없는 녹스의 말에 데미안이 눈가를 좁히자, 녹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오늘이든, 모레든 조심만 하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잖아?”

녹스의 말이 틀리진 않았으나 데미안은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물 이유가 있어?”

“여기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막 탐나는 몸이 생겼거든.”

“…….”

그 순간,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녹스가 탐난다고 할 몸은 딱 한 명뿐이었다.

바로, 오늘 낮에 만났던 레이나였다. 레이나가 제 누나인지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정말 친누나라고 한다고 해도 데미안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나를 버린 사람들이고, 나도 그들을 버리기로 했으니까.’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은 선대 공작 부부뿐인데 이상하게도 데미안은 망설여졌다.

데미안의 대답이 늦어지자 흥미로워진 듯 녹스가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데미안, 왜 그래?”

“……아니야.”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여전히 꺼림칙한 얼굴의 데미안을 보며 녹스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

리타의 방 앞에 선 나는 마지막까지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마음 놓고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마저 크게 느껴져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단숨에 내 손목을 잡은 손이 나를 끌어당겼다.


“……앗!”

몸이 그대로 끌려가 넓고 탄탄한 품에 꼭 안겼다.


“메이아.”

차분하고 낮은 울림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아, 라크하구나. 익숙한 향기와 목소리에 나는 경직된 몸을 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쌍둥이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쌍둥이들한테 문제가 있어서 온 건 아니야.”

“그럼…….”

쌍둥이들한테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면……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지?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자, 라크하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 가볍게 건드렸다.


“그대 때문에 온 거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살피자 라크하의 등 너머로 시롬이 보였다.


‘아, 시롬도 함께 왔다고 했었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라크하와 마주한 탓에 시롬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

시롬이 나와 라크하를 번갈아 보더니 무안한 듯 눈을 슬쩍 피했다.

그제야 나는 나와 라크하의 거리가 무척이나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아하하, 반가워요. 시롬.”

나는 멋쩍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 슬그머니 라크하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라크하가 내 팔을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시롬이 슬금슬금 우리 옆을 지나가더니 문 앞에 섰다.


“예, 반갑습니다. 시터님.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두 분께서 편히 대화하십시오.”

이대로 나가려는 듯 시롬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나가지 않고 문을 다시 닫더니 나를 바라보며 눈을 멀뚱거렸다.


“리타 양은 같이 안 왔습니까?”

“리타 씨는 제 방에 있어요. 누가 찾아왔을 때 방이 비어 있으면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아아…… 그렇군요.”

“리타 씨와 할 얘기가 있는 건가요?”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시롬이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저는 한 시간 정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시롬이 나가니 분위기가 어색해지며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앉을까요?”

“그래.”

작은 방에 앉을 곳이라곤 침대밖에 없기에 나와 라크하는 나란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괜히 앉자고 했나?’

함께 침대에 앉아 있자니 어색하다 못해 묘한 기류까지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라크하에게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그러니까…… 저 때문에 신전에 오셨다고요?”

“응, 황제가 신전에 일찍 방문했다고 들었어. 지금까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제야 나 때문에 왔다던 라크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라크하는 황제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나만큼이나 예민하게 신경 쓰곤 했으니까.

황제가 내게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한 듯했다.


“네, 제가 신전에 온 날에 딱 방문하셨더라고요.”

“……여우 같은 놈.”

필터링 하나 없는 라크하의 말에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키네스에 대한 라크하의 적나라한 평가에 내가 더 속이 시원했다.

속이 확 트인 나는 혼자 끙끙 앓으며 묵혀놨던 마음을 뱉어냈다.


“맞아요,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머리 아파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정말 여우 같은 놈이에요. 참 마음에 안 들어요.”

“그대도 그놈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군.”

내가 한술 더 떠서 말하자 라크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라크하는 불안감이 덜 가신 건지 그 뒤로도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만에 하나 신전에서 축복의 의식을 강행하려고 한다면, 하녀를 시켜서 연락하도록 하고.”

“……네, 그럴게요.”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오늘만 해도 신전에서 축복의 의식을 원한다는 의사를 보였으니까.


‘이 사실을 말했다간 어떻게든 나를 신전에서 빼내려고 하겠지.’

하지만 내가 잠시 망설였던 걸 눈치를 챈 걸까, 라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일부러 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쌍둥이들은 사고를 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나요?”

“그대가 없는데 잘 지낼 리가.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더군.”

“아아…….”

신전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울먹이고 기운이 없더니……. 우울해하고 있을 쌍둥이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루 정도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건만, 아직 기운이 없을 줄은 몰랐다.


‘쌍둥이들에게 편지라도 보내는 게 좋겠네.’

저택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쌍둥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걸로는 문제 될 일도 없을 테니 사제들을 통해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라크하가 바짝 내 앞으로 몸을 숙이더니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라크하의 눈가가 거뭇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거뭇한 라크하의 눈가를 쓸었다.


“……많이 힘드시죠?”

라크하는 대답보다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

하루 사이에 피로가 쌓인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시간만 괜찮다면 잠시라도 주무시고 갈래요?”

내 물음에 라크하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것도 좋지만, 그보단 그대와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를테면…….”

라크하가 말끝을 흐리더니 내 허리를 더 가까이 끌어왔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가볍게 감싸 쥐며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이런 거?”

예상치 못한 라크하의 행동에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라크하가 짓궂게 입매를 당겨 웃었다.


 
라크하의 시선이 천천히 내 입술로 향했다. 그 시선이 담고 있는 의미가 명확해 긴장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내 뒷덜미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가 실리며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

한편, 시롬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며 건물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빨래방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시롬은 기분 좋게 사제들의 옷을 하나 챙겨 입었다.


‘이러면 눈에 덜 띄긴 하겠네.’

이참에 시롬은 밖으로 나가 쓸 만한 정보가 있진 않을까, 사제들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사제들이 하는 얘기는 별다를 게 없었다.

오늘 저녁은 어땠다, 저녁을 먹었더니 졸리다는 둥, 일상적인 대화뿐이었다.

시큰둥하게 사제들의 말을 들으며 걷던 시롬은 큰 등나무를 발견했다.


“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시롬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걷던 사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헉, 저기 대신관님이랑 황제 폐하가 아니신가?”

“어디, 어디?”

시롬은 깜짝 놀라 사제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대신관과 황제가 등나무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혹시 들키진 않겠지?’

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탓에 불안해졌다.

시롬은 새하얀 장옷을 더욱 깊이 당긴 뒤 긴장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대신관과 황제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덕분에 즐거웠네.”

“사제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아아, 지금 메이아 양을 만나러 갈 생각이라서. 어차피 바로 옆 건물이지 않나.”

두 사람의 곁을 몰래 지나가려던 시롬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지금 시터님을 만나러 가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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