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희미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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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희미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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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희미한 기억
2022.08.19.
리타가 메이아를 부르러 간 시각, 리타의 방에는 건장한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바로, 시롬과 라크하였다.
‘기어코 신전에 오게 됐구나.’
시롬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로브를 쓴 라크하를 흘긋거렸다.
라크하는 메이아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유독 예민했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썼고, 하던 일도 미룰 만큼 그녀를 1순위로 여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라크하는 황제가 메이아에게 몹쓸 짓이나 협박은 하지 않았는지, 꼭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서 강경하게 나섰다.
시롬이 홀로 잠입해서 알아오겠다고 했으나, 라크하는 단호했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롬은 라크하와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리타 양을 만난 건 행운이었지. 덕분에 수월하게 메이아 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신전에 잠입하는 것까지는 시롬과 라크하에게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타의 도움이 없었으면, 메이아를 찾아다니다가 발각됐을 가능성이 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11시가 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합니다.”
시롬은 염려되는 마음에 신전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시간을 재차 강조했다.
오후 11시.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경비들의 하루 중 마지막 교대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는 아침까지 교대하지 않고 불침번을 서니 말이다.
라크하가 샤키르의 꽃을 채취하러 신전 주변을 종종 들린 탓에 알고 있는 정보들이었다.
“알고 있으니 그만 얘기하지 그래. 벌써 세 번째군.”
“불안해서 그럽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혼자 올 걸 그랬어.”
“그래도 제가 리타 양을 알아본 덕분에 사제들의 눈을 피해서 쉽게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시롬은 신전으로 오는 길에 만났던 리타를 떠올리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
자랑스럽게 제 성과를 늘어놓는 시롬과 달리 라크하의 표정은 짐짓 심각해졌다.
시롬이 하녀를 붙잡았을 때, 하녀가 했던 말이 얼핏 머릿속을 스쳤다.
-사, 살려주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고작 팔을 잡은 것뿐이었는데, 반응이 제법 과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무슨 일이라도 겪은 건가?’
라크하는 턱을 매만지며 눈가를 좁혔다. 하녀가 무슨 일을 겪든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하녀가 비스퇴르가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면 말이 달랐다.
최근에 비스퇴르가에는 녹스가 설치고 있으니까. 녹스와 관련된 일일지도 몰랐다.
녹스의 뒤를 쫓기 힘든 지금, 조그마한 단서 하나라도 소중했다.
아무래도 하녀의 반응이 거슬렸던 라크하는 시롬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메이아가 오면, 넌 그 하녀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도록 해.”
“리타 양을 말입니까?”
“그래,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
“아아…… 예, 알겠습니다.”
시롬은 한 박자 늦게 리타의 반응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한편, 리타가 떠난 그 시각.
레이나는 테오로 둔갑한 녹스와 데미안과 함께 다마시스 식당으로 와서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요즘 수도가 흉흉해서 바쁠 텐데, 용케 휴가를 냈네.”
“좀 쉬고 싶긴 했거든.”
“그런데 나랑 만나자고 했으면서 왜 다른 사람이랑 있었던 거야?”
“아아, 이 친구가 급하게 나를 찾았지 뭐야.”
“나보다 새로운 친구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레이나가 장난스럽게 눈을 치켜뜨자, 녹스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럴 리가 있겠어.”
녹스는 자연스럽게 레이나와 어울려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그런 녹스를 보며 데미안은 신경질적으로 수프를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다마시스 식당까지 따라와 식사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녹스가 함께 가자며 이끈 탓에 따라온 것이었다. 여관을 옮기려면 녹스와 함께 움직이긴 해야 하니까.
‘도대체 어떤 생각인 거야?’
저 여자를 ‘사냥감’, 혹은 몸을 차지할 대상으로 지정한 건 확실했다. 밤에는 매번 여자의 몸으로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자신을 데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녹스는 틈틈이 데미안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저 여자에게 마음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레이나가 태양 아래 반짝이는 붉은 장미처럼 아름다운 여자이긴 했다.
데미안 역시 처음 마주친 순간, 넋을 놓고 바라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이었다.
데미안이 건너편에 앉은 레이나를 흘긋대던 그때, 눈이 마주쳤다.
“우리 아직 통성명도 못 했네요. 저는 레이나라고 해요.”
레이나가 예쁘게 눈을 접어 웃으며 제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데미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이나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푸석푸석한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과 달리 탐스럽고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
같은 색의 머리카락 때문일까, 유독 대비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 여자는 잘난 귀족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덕이겠지.’
데미안은 괜히 레이나가 부러워져 선대 공작 부부가 떠올랐다.
새로운 흑마법을 성공할 때마다 새로운 옷과 따뜻한 음식을 주던 그분들이.
“저기요?”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레이나가 의아하게 데미안을 불렀다.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데미안은 레이나가 한 말을 잊고 되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죠?”
“통성명하자고 했어요. 전 레이나인데, 그쪽 이름은요?”
레이나. 이미 다른 사람의 이름을 통해 얼핏 들은 터라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입을 통해 그 이름을 듣자, 유독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데미안.”
“데미안이라, 예쁜 이름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분들이 지어준 이름을 칭찬해주는 사람은 레이나가 처음이었다.
비록 형식적으로 하는 말일지라도 데미안은 그분들과 관련된 칭찬은 뭐든 좋았다.
괜히 기분이 좋아 슬그머니 웃는데, 옆에서 녹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또 저 시선이다.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눈빛.
데미안은 순간 미소를 거뒀다. 녹스에게 최대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녹스가 제 약점을 파악하려거나 들쑤시려는 듯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그나마 로브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녹스에게 덜 드러날 테니까.
데미안이 무심코 로브를 더욱 꾹 눌러쓰자,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로브를 쓰고 있어서 식사가 불편하시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데미안의 모습에 레이나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다.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녹스가 슬그머니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불편하잖아. 이왕 식사할 때는 편하게 먹는 게 좋지 않겠어?”
마침 주변에 기사들도 없고 말이야, 뒷말은 데미안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녹스의 물음에 데미안은 눈살을 찡그렸다.
저 여자의 기분을 맞추라는 건가? 아니면, 자신을 쉽게 관찰하기 위함인가?
녹스의 속내를 가늠해보려고 했으나, 역시나 어떤 생각으로 로브를 벗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응? 어서.”
녹스가 한 번 더 악마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녹스의 채근에 데미안은 마지못해 손을 들어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멍하니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레이나의 시선이 자신의 허름한 몰골 때문이라 생각한 데미안은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며칠간 도망자의 신세로 쫓기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까.
하필 저 여자와 닮은 색이어서 비교되는 것 같아, 유독 수치스러웠다.
“흐음.”
그 와중에 턱을 매만지며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듯한 녹스의 모습에 데미안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소환자는 자신인데 녹스의 손에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당에 온 것도, 로브를 벗게 된 것도, 밤마다 은근한 손길을 제게 뻗는 것도, 녹스가 선대 공작 부부를 구해줄지 초조해하는 것도.
속이 바짝 탄 데미안이 목을 축이려고 제 물잔을 잡은 순간이었다.
데미안의 손에 바로 옆에 있던 녹스의 물잔이 툭 쓰러졌다.
물이 순식간에 테이블 위로 쏟아져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어머나!”
레이나가 깜짝 놀라며 손수건을 꺼냈다.
“우, 우선 이걸로 닦으세요!”
레이나에게 손수건을 받은 데미안은 황급히 테이블을 닦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데미안의 행동이 우뚝 멈추었다.
데미안의 시선이 손수건 가장자리에 수놓아진 자수로 향해 있었다.
양 날개가 있는 한 필의 말.
별안간 어린 시절 잊고 지냈던 희미한 기억이 데미안의 머릿속에 떠오르려던 그때였다.
“어렵구나, 어려워. 목격자라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법도 하지.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는 놈이니.”
“그런데 아까 지나가다가 본 사람 말이야, 아인티아의 기사 맞지? 그쪽도 실종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건가?”
“모르지. 일단 간단히 식사나 하자. 배고프다.”
녹스의 얘기를 하며 식당으로 들어오는 여러 명의 황실 경비병들의 등장에 데미안의 생각은 뚝 멈추었다.
***
“……리타 씨의 방으로 가달라고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리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게 한 제안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네, 이건 제가 처음 신전에 들어왔을 때 받았던 의복인데, 이걸 입고 가시면 눈에 덜 띌 거예요.”
리타가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새하얀 장옷을 꺼냈다. 수습 사제들이나 신전으로 온 외부인들이 입고 다니던 옷이었다.
“아니, 잠시,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내게 수습 사제들이 입고 있던 옷을 내미는 리타를 말렸다.
급한 일이 있는 건 알겠다. 하지만 아직 리타가 편지를 레이나에게 제대로 전해주고 왔는지도 듣지 못한 참이었다.
“리타 씨, 우선 편지가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제야 리타가 정신이 들었는지 멈칫하더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머나, 죄송해요! 편지를 잘 전달했는지부터 말했어야 했는데, 제가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어요!”
“괜찮아요. 천천히 설명해줘요.”
“네, 네!”
리타는 제게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알려주었다. 레이나에게 편지는 잘 전달되었으며, 내일 방문한다고 했다는 것도.
계획대로 잘 흘러가서 다행이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리타의 얘기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신전으로 오는 길에 보좌관님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괴한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가 공작님도 함께 계신 걸 보고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고, 공작님이랑 보좌관님을 만났다고요?”
깜짝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네, 지금 제 방에 계셔요. 시터님을 뵈러 오셨다고 했는데, 시터님께서 머무시는 방은 주변에 사제들이 많아서 안내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지내는 건물에는 사제들보단 외부인이 더 많거든요.”
“아…….”
내 방이 있는 건물은 몇몇 사제들도 함께 쓰는 건물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면 키네스나 고위 사제들의 귀에 들어가겠지.’
리타가 일부러 옷을 준비해 온 이유가 이 때문인 듯했다. 내가 리타가 지내는 건물을 찾아갈 일은 없으니까.
애초에 리타가 주로 내 방에서 머물다가 잠을 잘 때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니 갈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나저나 시롬과 라크하가 왜 나를 만나러 온 거지?’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방문에 불현듯 불안해졌다. 혹시 쌍둥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와서 나를 찾을 일은 쌍둥이들의 일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얼른 리타 씨의 방에 가봐야겠네요.”
리타에게 받은 새하얀 장옷을 황급히 몸 위로 걸치고 나가려던 때였다.
내 뒤를 따르는 리타를 보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꽤 곤란해질 것이었다.
“혹시 누가 저를 찾을 수도 있으니 리타 씨는 제 방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위치만 알려줘요.”
라크하를 볼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