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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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드디어
2022.08.15.
데미안은 간소하게 짐을 챙겨 여관을 나왔다. 최근 아인티아 기사들의 수색망이 좁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는 위치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시간에 맞춰서 와야 하는데.’
데미안은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 녹스와 여관 옆 골목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녹스의 기운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낮에 녹스를 마주하는 건 드물었기에 더 불안했다.
주로 녹스는 ‘사냥’을 한다면서 오전에 나간 뒤 늘 늦은 밤이 되어야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밤마다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자신을 유혹하듯이 굴었다.
‘여전히 수상하단 말이지.’
매일 밤 녹스가 보내는 의미심장한 손길, 그리고 여전히 시간을 끄는 것 같은 행동까지.
한 번 녹스와 말씨름을 했으나, 데미안의 불안감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데미안에게 녹스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으음…….”
데미안은 미간을 좁혔다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녹스에 대한 생각에만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이럴 시간에 주변을 둘러봐야겠어.’
혹여나 누군가가 뒤를 밟고 있다면 곤란했다.
주변을 탐색하던 데미안은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멈춰 섰다.
체격이 건장한 갈색 머리의 남자의 등 뒤로 보이는 검은 기운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입 밖으로 작게 내뱉었다.
“……녹스?”
여관 앞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데미안이 인상을 찡그리며 녹스의 뒤로 천천히 걸어가려던 때였다.
“으, 으아악!”
갈색 머리 남자의 발밑에서 검은 생명체가 솟아오르더니 제 앞에 있는 어린아이를 단번에 삼켰다.
데미안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녹스가 말했던 ‘사냥’이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녹스에게 먹힌 사람은 어린아이였다.
“음? 뭐야, 언제 왔어? 이제 막 여관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데미안의 기척을 느낀 녹스가 뒤돌아 그를 반겼다. 능청스럽게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온 녹스가 생긋 웃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디로 옮기려고? 나는 좀 구석지고 어두운 여관이 좋은데, 그런 곳으로 알아보는 건 어때? 이왕이면 침대도 푹신푹신했으면 좋겠어.”
“…….”
“이봐, 데미안?”
데미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어떠한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조금의 죄책감도, 동정심도 하나 없었다.
데미안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매일 이렇게 사냥을 하는 거야?”
“아, 내가 사냥하는 걸 처음 봤던가? 힘을 길러야 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요즘은 거리에 기사들이 워낙 많아서 자제하고 있어. 많아 봤자…… 하루에 두세 명 정도려나?”
“어린아이들까지 사냥하는 줄은 몰랐는데.”
감정이 섞인 듯한 데미안의 말에 녹스가 목을 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이, 화내는 거야? 배가 너무 고파서 어쩌다 보니 그런 거야. 사실 애들은 별로 맛이 없거든.”
녹스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을 한 끼 식사처럼 말하는 태도였다.
일순간 데미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를 소환한 건지 실감이 났다.
데미안은 늦게나마 동요하는 감정을 억눌렀다.
녹스가 지금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지만 언제 돌변할지 몰랐다.
“화는 무슨, 그냥 충동적으로 사냥하는 일을 되도록 자제하라는 거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봤으면 어쩔 뻔했어.”
데미안은 녹스에게 등을 돌리며 앞서 걸었다.
“그럼 평소에 먹는 양보다 폭식하는 거지.”
녹스는 쫄래쫄래 데미안의 뒤를 따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대꾸할 필요성을 못 느낀 데미안은 묵묵히 걸었다.
녹스는 데미안의 몸을 천천히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 날’이 앞당겨지는 거고.”
“뭐?”
등 뒤로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시선과 정체 모를 녹스의 말에 데미안이 멈춰 섰다.
데미안의 옆에 선 녹스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아니야, 그래서 이번엔 어디로 가려고?”
“…….”
데미안이 의미심장하게 녹스를 바라보자, 녹스가 방긋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응? 내가 묻잖아?”
녹스의 재촉에 데미안이 작게 한숨을 흘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예 다른 지역으로…….”
“야! 너 여기서 뭐 해!”
그때, 우렁찬 여자의 목소리가 데미안의 말 틈 사이에 끼어들었다.
데미안과 녹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갔다.
허리께에서 찰랑거리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두 사람의 곁으로 온 여자는 금색 눈동자를 어여쁘게 접어 웃으며 녹스의 등을 퍽 때렸다.
“너, 잘 만났다! 다마시스 식당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길래 집에 갈 뻔했잖아!”
생각보다 강한 힘에 녹스가 비틀거리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이구? 있는 건 근육밖에 없으면서 이 정도로 비틀거리는 거야?”
그녀는 녹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 웃으며 녹스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럴 때마다 녹스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
얼떨결에 여자의 손에 맞은 녹스가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에 여자는 의아한 얼굴로 기웃거렸다.
“뭐야, 테오. 너답지 않게 왜 반응이 없어?”
녹스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레이나 님!”
마침 주변을 지나치던 하녀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메이아의 직속 하녀, 리타였다.
리타는 다급한 나머지 레이나의 옷소매를 잡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놓았다.
하녀인 그녀가 귀족의 옷자락을 허락도 없이 잡는 일은 무례였다. 하지만 초조한 탓에 행동이 앞선 것이다.
‘저 사람이 그 골목에 있던 남자니까!’
어둑한 골목에서 들려온 아이의 비명과 그 근처에 서 있던 남자와 인상착의가 동일했다.
무서워서 용감하게 현장을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최근 수도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의 용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곧장 신고하러 가던 길이었다.
그러다가 레이나를 발견해서 황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누구세요?”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일전에 메이아의 편지를 가져다준 하녀였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하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편지를 전하려고 왔어요. 그런데…… 저쪽에서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리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레이나는 고민하다가 녹스의 등을 다시 가볍게 두드렸다.
“이번엔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리타가 이끄는 골목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걸 확인한 리타는 주섬주섬 편지를 꺼냈다.
“우선 이건 메이아 님께서 전해달라고 부탁하신 편지예요.”
“메이아 님께서?!”
레이나는 상기된 얼굴로 편지를 받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기도의 날이 되기 전에 신전에서 함께 기도도 하고 티 타임도 갖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메이아가 보낸 초대가 너무 기뻤던 레이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일 방문하겠다고 전해줄 수 있을까? 사실 당장 방문하고 싶긴 한데, 오늘은 친구와 선약이 있어서.”
“물론이죠. 그럼 내일 오신다고 전달 드릴게요.”
“고마워.”
레이나는 활짝 웃으며 메이아의 편지를 챙기다가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런데 따로 할 말이 더 있는 거야?”
이 편지를 주려고 구석진 곳까지 부를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계속해서 리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리타는 주춤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혹시 갈색 머리의 남자분과 친밀한 사이이신가요?”
“아, 테오? 내 소꿉친구인데…… 왜?”
“소꿉친구요……?”
리타는 자신이 봤던 것을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소꿉친구라면 그 누구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 영애가 악독한 실종 사건의 용의자와 친구일 리도 없었다.
리타는 고민하다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 음, 그냥 너무 멋있는 분이셔서요.”
***
해가 어슴푸레 진 저녁이 되었을 때 즈음, 리타는 신전 주변의 숲에 도착했다.
민간인이 다니는 출입구에 다다르기 전 지나치는 숲이었다.
이대로 쭉 빠르게 걸으면 10분 만에 신전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나오지만, 리타는 어쩐지 신경이 쓰여 뒤를 흘긋거렸다.
어둑한 골목길에서 들려왔던 남자아이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리타의 귓가에 맴돌았다.
홀로 그곳에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도.
레이나와 헤어진 이후로 계속해서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인상착의가 똑같았다.
“하아…… 그냥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나…….”
리타는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말했다면 오히려 어떻게 제 친구를 의심할 수가 있냐고 벌하셨을 수도 있어.’
레이나가 다른 귀족들보다 호탕하고 털털해 보이지만, 자신의 친구와 관련된 일에는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그리고 비슷하게 생긴 남자였을 수도 있잖아.”
리타는 애써 합리화하며 낮에 있었던 일을 떨쳐냈다.
낮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레이나의 소식을 먼저 전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게 자신의 임무였으니까.
심지어 레이나를 찾아다니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진 참이었다.
“얼른 가야지.”
시터님께서 걱정하시겠다.
리타가 생각하느라 늦어졌던 발걸음을 다시 빠르게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턱.
커다란 손이 리타의 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낮 내내 긴장을 하고 있었던 탓에 피로가 한 번에 밀려왔다.
하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일이 술술 풀리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진척되고 있으니 말이다.
“좋아, 메이아. 잘하고 있어.”
드디어 황제와 대신관만이 출입 가능한 신전 본관에 갈 수 있게 됐다.
“내일이면…….”
고대하던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녹스를 없앨 해결 방법 또한 알 수 있겠지.
분명 그곳에서는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신전에서 테리투스와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인 곳이 없었을뿐더러, 테리투스가 지상으로 내려왔던 곳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리타만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면 돼.’
곧 돌아올 리타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데도 리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하필 키네스도 잠자코 있는 탓에 더 불안했다.
‘티 타임을 갖자거나 저녁은 같이 먹자며 접근할 줄 알았는데…….’
키네스가 다 같이 점심식사를 한 걸로 넘어갈 위인은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굳이 나를 데려다주고 차까지 마시자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대신관과 따로 대화를 나눌 때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뒀던 게 이상했다.
‘역시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야.’
키네스의 생각에 초조하게 방을 서성거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키네스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나는 긴장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시터님, 저예요.”
리타의 목소리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리타 씨.”
반갑게 리타를 반겼으나, 리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리타가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주변을 훑더니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내게 속삭였다.
“지금 제 방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