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더 절박해지도록
(82/136)
82. 더 절박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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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더 절박해지도록
2022.08.12.
식사 내내 이어지는 키레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고 나는 대신관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일단 키네스와 대신관의 사이에 무언가 있는 건 틀림없는데…….’
하지만 대신관과 키네스가 무척 친밀한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신관은 키네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점을 잘 생각하고 대화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신전으로 유도해야겠지.
다소 급하게 성사된 만남이었지만, 나는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했다.
내가 말없이 걷기만 하자 대신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메이아 님께서는 오랜만에 신전에 오시니 감회가 새롭겠군요.”
습관인 걸까. 그는 늘 날 보면서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네, 그렇죠. 다른 곳으로 잠시 떠나 있었다고 벌써 신전에 있는 건물들이 낯설게 느껴지네요.”
“아, 마침 키레타가 신전 안내를 못 해드렸다고 하더군요. 대신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매번 방에서만 지내신 터라 더 낯설 수밖에 없지요.”
이 정도쯤 되니 메이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대신관님께서 안내를 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저쪽을 못 둘러봐서 궁금했었어요.”
나는 일부러 내가 가고자 했던 건물이 있는 부근을 가리켰다.
대신관은 약간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그래도 나름 메이아의 과거 덕에 의심도 덜 사고, 일단 시작은 좋은 것 같네.’
대신관은 건물을 지나갈 때마다 차근차근 내게 설명해주었다.
사제들의 기도실, 일상생활 공간들, 사제들의 광장까지. 하나하나 소개를 받으며 은빛의 리본이 묶여진 체인을 넘어왔을 때였다.
나는 하늘과 가까이 맞닿은 신전을 가리키며 은근슬쩍 물었다.
“저곳은 왜 신성한 곳이라고 불리는지 궁금했었는데,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대신관이 일순 멈칫했다.
이번엔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나? 실수했나 싶어 불안하던 그때, 대신관이 입을 뗐다.
“……신전 본관은 과거 테리투스 님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셨던 곳이기 때문이지요.”
대답만 늦었을 뿐, 대신관의 표정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어느덧 가까워진 신전 본관을 바라보았다.
방금 대신관의 설명을 통해 확신이 생겼다.
‘저기에 가면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겠구나.’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신전 본관을 구경하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말을 꺼낼 수 있으려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데, 대신관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의아하게 쳐다보자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방금 보셨던 은색 리본이 기억나십니까?”
“아, 네. 그 체인에 묶여 있던 리본을 말씀하시는 거죠?”
“예, 그 리본이 묶인 곳 너머는 저와 고위 사제, 그리고 황제 폐하만 오갈 수 있습니다.”
어쩐지 여기 정원으로 들어온 이후로 조용하다고 했더니.
대신관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저는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가요?”
“저와 함께 계신다면 신전에서 못 가실 곳은 없지요. 메이아 님께서는 신의 딸이 아니십니까. 본래의 의무를 다하고, 앞으로도 신전에서 머무르신다면 저와 비슷한 권한을 갖게 되실 겁니다.”
본래의 의무라 하면, 축복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축복을 내리길 원하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그런데 신전에 머물기까지 원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대신관님은 제가 계속 신전에 머물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예. 방금도 말했지만, 메이아 님은 신의 딸이시니까요. 무엇보다 테리투스 님의 뜻에 따라 폐하께 축복을 내리러 오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또다시 축복을 강조하는 대신관의 말을 듣자마자, 식사 자리에서 했던 건배사가 떠올랐다.
-폐하께는 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대신관이 바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키네스의 눈치를 보던 모습이었지.
‘내가 영원한 잠에 드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키네스가 축복을 받길 원하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렇지 않아도 키네스의 속을 읽기 어려웠는데,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혹시…….”
나는 대신관에게 키네스에 대해 질문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옹기종기 모여앉아 짹짹거리는 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와 고위 사제, 그리고 대신관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했으니 황제의 보좌관 역시 들어오지 못할 테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신관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제가 축복을 내리도록 하라고 부탁하셨나요?”
“아뇨, 폐하께 축복을 내리는 건 신전에서 메이아 님께 바라는 겁니다. 메이아 님께서 폐하께 축복을 내리는 게 신탁이었고, 이는 곧 테리투스 님의 뜻이기도 하니까요.”
거짓말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대신관은 나와 대화를 하는 내내 ‘테리투스 님의 뜻’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 마음이 쓰였다.
‘테리투스에 대한 믿음이 강한 대신관이 내가 ‘영원한 잠’에 든다는 이유로 축복의 의식을 강행하지 않으려고 할까?’
아닐 것 같았다. 오히려 축복을 내리고 ‘영원한 잠’에 드는 게 내 사명이고 이 역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신전에서 도망친 걸 테리투스의 뜻이라고 하는 게 대신관을 설득하기 더 쉬울지도……. 잠깐.’
그래, 차라리 그렇게 둘러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대신관을 이용해 신전 본관에 가고, 테리투스와 소통을 하려면 차라리 그에게 알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대신 내가 테리투스와 대화할 줄 안다는 걸 알려야 하겠지만…….
대신관이나 되는 사람이라면, 신의 딸인 내가 신과 소통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아도 괜찮지 않을까?
대신관은 신전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만약 제가 축복을 내리는 게 테리투스 님의 뜻이 아니라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신관이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살짝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중대한 비밀인 만큼 쉽게 얘기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테리투스 님께 맹세를 해주세요. 심지어 황제 폐하께도요. 그럼 전부 말씀드릴게요.”
대신관이 신에게 맹세한다면, 완벽하게 비밀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신관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했다.
하지만 신의 뜻을 중시하는 대신관으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라고 나 역시 신의 뜻을 운운한 것이기도 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테리투스 님 앞에서 하비엘,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대신관의 맹세까지 들은 후에야 나는 한결 마음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저는 테리투스 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
놀랄 줄 알았는데, 대신관의 반응은 생각보다 밋밋했다. 아니, 오히려 화난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험악한 표정을 짓지 않았던 대신관이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정도가 지나치십니다.”
“예?”
“축복의 의식에서 도망치시더니 이젠, 폐하께 축복을 내리지 않는 이유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거짓말을 하십니까?”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자, 대신관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메이아 님께서 강경하게 말씀하셔도 믿기 힘든 건 매한가지입니다.”
“…….”
신전에 온 이후로 줄곧 내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대신관이 단호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제 입장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한 번 신의 뜻을 배반하고 나가신 분을 믿기란 어렵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대신관은 특유의 온화한 성품 때문에 나를 포용한 것이지, 내게 좋은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걸.
이미 내가 신전에서 도망친 이상, 나에 대한 대신관의 신뢰는 떨어져 있었다.
‘말로는 설득할 수 없어.’
내가 테리투스와 대화를 할 줄 안다는 걸 대신관에게 증명을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테리투스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초조한 마음에 두 손을 매만지던 그때,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약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성물이었다.
-성물을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조심해야 한다. 강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탓에 근방에서는 모두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문득 테리투스가 내게 성물을 줬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네, 제 말을 믿기 힘드시다는 점은 이해해요. 하지만 대신관님이 테리투스 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저와 함께 저곳에 가면 증명해드릴 수 있어요.”
나는 신전 본관을 가리키며 대신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나요?”
***
대신관은 메이아와 나눴던 충격적인 대화를 믿을 수 없었다. 늘 습관처럼 짓는 상냥한 미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관은 눈가를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축복을 내리고 신전을 머물기를 바란다는 말을 직접 꺼낸다면 메이아가 알아서 움츠러들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제 방에만 콕 박혀 잘 돌아다니지 않고 자신이 말을 걸기라도 하면 울거나 숨던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한 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예전에 봤던 메이아와 전혀 달랐다.
지금의 메이아는 울지도, 숨지도 않고 당당하게 제 눈을 보고 말했다.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건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한 것이었다.
‘정말 테리투스 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메이아에게 그렇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신을 배반하고 신전에서 도망쳤기에 단번에 메이아를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만나지요. 제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결국, 대신관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결정을 내일로 미루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바로 메이아와 신전에 향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줄곧 머릿속이 복잡해서 어떤 것에도 집중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대신관이 착잡한 기분으로 회랑을 걸어가던 때였다.
“대신관.”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있던 키네스가 조용히 대신관을 불렀다.
대신관은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키네스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대가 여기 기도실을 자주 들린다기에 나 역시 들러보았지. 메이아 양과 대화를 하고 돌아오는 길인가?”
“아…… 예, 그렇습니다.”
“어떤 대화를 했는지 궁금하군.”
키네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신전에 남아달라고도, 축복을 내려달라고도 부탁했지만, 거부하시더군요.”
“이런, 아쉽군.”
키네스는 혀를 끌끌 차며 아쉬움을 표했으나, 속으로는 안도했다.
사실 키네스는 메이아가 대신관의 제안을 거부하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이 치고 들어갈 틈이 생긴다. 축복을 내리라는 신전의 압박을 없애 줄 테니 황궁으로 오라고.
“어떻게 말하면서 거절하던가?”
“제대로 둘러대지도 않더군요. 아직은 제가 어렵나 봅니다.”
거짓말이었으나, 대신관에게는 신의 맹세를 어기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키네스의 예리한 시선이 대신관을 훑었다.
대신관은 신의 뜻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니, 메이아가 축복을 내리지 않는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더라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이를 이용해서 메이아를 더 압박해야 했다. 메이아가 더 절박해지도록.
“그래도 자네는 성녀를 포기할 수 없지 않나? 성녀가 신전에서 지낸다면, 신전의 권위가 더 높아질 테고, 성녀의 존재가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 테니까.”
“네, 아무래도 그렇지요.”
대신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맹세를 했기에 황제에게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겠지만, 대신관 역시 메이아를 신전에서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오늘 메이아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신과 소통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메이아가 신전 본관에서만 신과 소통이 가능한 거라면, 신께서도 그녀가 신전에 있길 바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대신관은 제 가슴 위로 손을 가볍게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저희는 신의 뜻을 따르는 자이니까요.”
***
메이아가 대신관과 대화를 하던 그 시각.
메이아의 심부름을 하러 아드리엔 남작가를 방문한 리타는 난관에 부딪힌 상태였다.
“레이나 님께서 외출하셨다고요?”
“네, 괜찮으시다면 제가 레이나 님께 대신 전달해드릴까요?”
리타는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신전에서 나올 때도 신중을 기하면서 편지를 보내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맡긴다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 아시나요?”
“음, 테오 님을 만나러 비스퇴르가로 가신다고 하셨으니 적어도 저녁이 되어야 돌아오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녁이 되어야 돌아온다니. 레이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결국, 고민하던 리타는 아드리엔 남작가의 사용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테오, 라는 분과는 어디서 만나시는지 아시나요?”
“음…… 다마시스 식당이라고 아시나요? 이번에도 거기서 만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그곳에서 테오 님과 만나시는 것 같긴 해요.”
비스퇴르가, 다마시스 식당. 리타는 속으로 들은 정보를 되새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빠르게 다마시스 식당으로 가기 위해 골목길을 지나가던 때였다.
“으, 으아악!”
어둑한 골목길 안쪽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