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못된 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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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못된 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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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못된 심보
2022.08.08.
사제를 따라 도착한 식사 장소에는 긴 테이블에 6자리가 세팅되어 있었다.
대신관과 키네스만 함께하는 점심 식사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올 사람이 더 있는 건가?
“메이아 님께서는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은 나는 빳빳하게 허리를 세운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신관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이니 아마도 지위가 높거나 불편한 사람들로 채워질 듯했다.
생각보다 중요한 식사 자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긴장되었다.
내가 신전에서 지냈을 때 이미지도 안 좋았던 것 같고, 신전에서 도망친 입장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렇게 큰 자리가 아니면 신전에서 대신관을 만날 기회는 잘 없을 테니까.’
내 목표만 생각하자. 나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대신관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을까.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테이블 위로 세팅된 식기들을 보면 이상한 곳에 데려온 건 아닌 것 같은데…….’
긴장한 채 앉아 있는 것도 슬슬 힘들어질 때 즈음, 나는 나를 데려온 사제를 불렀다.
“저기요, 사제님.”
“네?”
“다른 분들은 언제 오시나요?”
“어…… 곧 오시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그 ‘곧’이 언제인 거냐는 말이지. 체감상 1시간은 기다린 것 같았다. 내가 불만스럽게 뚱한 표정을 짓자 사제가 당황한 듯 눈을 바쁘게 굴렸다.
“주,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곧 오실 겁니다.”
“시간은 안내받지 못하셨나요?”
“아, 예. 저도 갑자기 명령을 받은 터라…… 잘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주방으로 가서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아뇨, 잠시만요.”
갑자기 명령을 받았다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나는 사제를 붙잡았다.
“누구에게 명령을 받았나요?”
“그게…… 키레타 님께서 늦지 않게 얼른 메이아 님을 여기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어제 비꼬듯이 이야기하던 여자가 시켰구나. 날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더니…….
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한숨 소리에 사제가 어깨를 움츠렸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계속해서 저 죄 없는 사제만 내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다.
‘보아하니 멋도 모르고 그냥 키레타가 시킨 대로 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키레타의 눈빛과 말투가 심상치 않아 피하려고 했는데 또 이렇게 먼저 시비를 걸 줄은 몰랐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어.’
속으로 대신관과 어떻게든 친해져서 키레타의 유치한 만행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였다.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며 대신관이 들어왔다.
대신관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전에도 그랬듯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메이아 님,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예, 대신관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던 나는 대신관 뒤에 있는 보라색 머리의 여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키레타였다.
‘저 여자도 식사 자리에 오는 거였어……?’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키레타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못된 심보에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신관은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아채고, 짧게 탄성을 터트리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오늘 식사를 함께할 고위 사제들입니다.”
키레타가 고위 사제였을 줄이야. 나를 비웃고, 비아냥거렸던 자신감은 고위 사제라는 신분에서 나온 듯했다.
나는 순간 흐트러질 뻔한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위 사제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아…… 고위 사제님들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신의 은총과 축복이 충만하기를.”
키레타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의 고위 사제도 나에게 좋은 감정은 없는지 번지르르한 말과 달리 표정은 떨떠름했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네.’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고 했으나, 키레타가 말을 걸어왔다.
“이 자리에서 또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메이아 님.”
또 어떤 시비를 걸고 싶어서 말을 거는 건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기분 나쁜 티를 내거나 동요하면 오히려 키레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반응을 보일수록 저 여자는 쾌감을 느낄 테니까.
나는 들끓는 속을 겨우 억눌러내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어제 함께 신전을 둘러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여기서라도 뵙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지 일순간 키레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키레타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비틀어 올렸다.
“이렇게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을 줄은 몰랐는데, 저라도 일찍 올 걸 그랬어요.”
본인이 사람을 시켜 일찍 오게 만들어서 기다리게 했으면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결국, 나는 좋게 넘어가려던 생각을 바꿨다. 나도 그쪽처럼 티 안 나게 돌려 못 까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뻔뻔함으로는 나도 뒤지지 않았다. 내가 흑막 라크하의 곁에서 지내면서 얼굴에 쌓아온 철판 두께로만 빌딩 한 채를 지을 수 있다고.
“예, 대신관님께서 초대해주신 자리이니 미리 참석해야 하지 않겠어요? 마침 어느 귀하신 분께서 제 마음을 읽었는지 사람을 1시간이나 일찍 보내주셨더라고요.”
그 순간, 당당하게 웃고 있던 키레타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메이아 님께서 1시간이나 일찍 오셨단 말입니까?”
대신관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문이 열리며 키네스가 들어오며 사람들의 시선이 키네스에게 쏠렸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대신관에게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리는 정도로 충분했다.
나는 은근슬쩍 키레타를 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
인사치레 같은 형식적이고 지루한 대화만 지속됐다.
종종 대신관이 내게 말을 걸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형식상의 대답만 할 뿐.
식사 시간의 대부분은 그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배 속에 음식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면서 식사 분위기를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신관님은 나한테 악의가 없는 게 확실하고, 키네스는 의외로 나한테 관심이 없어 보이네.’
지금 같은 분위기로만 흘러간다면, 식사가 끝날 때 즈음 대신관에게 따로 대화하자는 말을 할 수 있겠는데?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연신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키네스가 별안간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입맛에 매우 잘 맞는가 보군.”
하필 입 양쪽에 키조개구이를 가득 넣고 있던 참이라 민망했다. 나는 다급히 입안에 있는 음식을 삼킨 뒤 헛기침을 했다.
“네, 신전에서 극진하게 대접해주신 것 같습니다.”
“메이아 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대접해드릴 수 있답니다.”
그저 신전에 대한 아부 차원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대신관이 환하게 웃으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을 베풀었다.
이렇게 상냥하고 선한 사람이어야 대신관이 될 수 있는 거구나.
나는 그를 따라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아요.”
“그럼 기도의 날이 끝나고 한 번 더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이번에는 대신관의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했다.
기도의 날에 치르는 관례가 끝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미루자 키레타가 ‘어머’ 하고 가식적인 탄성을 터트렸다.
“설마 메이아 님께서는 기도의 날이 끝나면 곧장 돌아가실 생각이셨나요?”
“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당황해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자니, 키레타가 애처롭게 눈꼬리를 축 떨구었다.
“축복의 의식을 거절했던 것에 대한 책임을 지시려고 기도의 날보다 훨씬 일찍 신전에 방문하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축복의 의식을 다시 치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왜 도망가셨던 겁니까?”
줄곧 잠자코 있던 다른 고위 사제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들에 머릿속이 혼란했다.
대신관 역시 궁금했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러 개의 눈이 오로지 내게 쏠리자 꼭 대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저는…….”
압박감에 나도 모르게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말을 꺼내다가 키레타의 미소를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굳이 고위 사제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다 대답해줘야 하는 걸까?
내가 신전에서 도망친 일 외에도 키레타가 사적으로 나에게 나쁜 감정이 있다는 건 이미 파악했다.
아마 키레타와 가까운 다른 고위 사제들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결국,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저들은 또다시 나를 잡아 뜯을 생각밖에 하지 않을 테지.
내 침묵이 길어지자 대신관이 상냥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말씀해 주시기 어려운 일일까요?”
하지만, 대신관은 고위 사제들과 달리 내게 개인적인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대신관과는 따로 대화하고 싶기도 했으니까…….
“네, 그래서 대신관님과 먼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대신관은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 나는 이상한 광경을 포착했다. 대신관이 주춤하더니 슬그머니 키네스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마치 키네스의 눈치를 보듯이.
‘갑자기 왜 저러지?’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키네스가 대신관에게 훈수를 두었다.
“대신관, 메이아 양이 묻지 않나.”
“아아, 네. 좋습니다. 그럼 식사를 마치고 함께 걸을까요?”
“네, 좋아요.”
내가 바라던 바였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전과 달리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괜히 눈치가 보여 옆에 있는 와인잔을 들어 홀짝이던 때였다.
“이런 자리가 흔치 않으니 화합을 위해서 건배사라도 하는 건 어떻겠나?”
키네스가 수저를 내려놓더니 와인잔을 만지작거렸다.
대신관은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장소가 장소이니 대신관에게 건배사를 맡기고 싶군.”
“아…… 예, 제가 하도록 하지요.”
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키네스가 와인잔을 가볍게 들었다.
갑자기 건배사라고 하니 당황스럽긴 하지만, 나는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덩달아 와인잔을 들었다.
그리고 대신관의 건배사가 시작되었다.
“귀하신 분들께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쭉 이런 자리가 이어졌으면 하는군요. 그리고.”
대신관의 시선이 키네스를 향했다.
“폐하께는 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군.”
‘뭔가 이상한데…….’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메이아가 떠난 아인티아 저택. 라크하는 이른 아침부터 생각에 잠긴 채 제 손목에 있는 생화 팔찌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아가 신전에는 잘 도착했을까. 끼니는 잘 챙겨 먹고 있을까. 신전에서 괴롭힘은 당하고 있지 않을까.
메이아와 관련된 거라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이 쓰였다.
“그때 아가씨한테 받았던 머리카락에도 샤키르의 꽃 능력이 담겨 있더라고? 미약하지만 그 능력을 추출하고 증폭시켜서 향초로 만들어 봤는데 한두 시간 정도는 편안하게 잠을…… 라크하, 내 말 듣고 있지?”
펠리르는 자신이 만든 향초를 설명하다가 눈살을 찡그렸다.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 밤을 새우면서까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준비했더니만, 라크하는 집중은커녕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펠리르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메이아가 신전으로 떠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인티아 저택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쌍둥이들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라크하 역시 온종일 집무실에 박혀 있었다.
사용인들도 다들 제 주인들의 눈치만 보기 바빴다. 숨 쉬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것 같은 조용한 저택 분위기에 펠리르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쿵쿵쿵, 조용하던 저택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득 울렸다.
그리고 집무실 문이 열리며 시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저…… 공작님.”
펠리르의 부름에는 반응이 없던 라크하가 시롬의 보고에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시롬이 메이아와 관련된 보고를 들고 왔을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지?”
“황제 폐하께서 신전에 일찍 방문하셨다고 합니…… 히익!”
바사삭. 라크하가 쥐고 있던 소파 팔 받침대가 부서졌다.
너덜너덜해진 팔 받침대를 보며 시롬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하지만 라크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간다.”
“고, 공작님! 안 됩니다!”
다분히 충동적인 라크하의 행동에 시롬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붙잡았다.
메이아와 관련된 소식 하나에 조용하던 저택이 다시 떠들썩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