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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사랑에 빠질 기회 (80/136)


80. 사랑에 빠질 기회
2022.08.05.



 


“어머, 시터님!”

내가 머무는 방으로 돌아가는 중에 리타와 마주쳤다. 나를 데리러 오려고 했는지 리타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비를 맞으신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다행히 누가 우산을 씌워줘서요.”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

그 좋으신 분이 키네스일 줄은 몰랐지만. 나는 뒷말은 삼키며 리타와 인사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키네스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신전에 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키네스를 만날 줄이야.’

테리투스랑도 아직 만나지 못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단서를 얻긴 했다.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던 신전.

키레타가 가장 신성한 곳이라고 했으니, 그곳에서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았다.


“알면 뭐 해, 가지를 못하는데…….”

키레타가 말하기론 대신관과 키네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었지.


‘이참에 키네스에게 부탁할까.’

나도 모르게 키네스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계산적이고 내 능력을 원하는 키네스가 쉽게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이유를 캐묻는 건 기본이고, 조건을 걸겠지.’

이유는 어찌저찌 둘러댄다고 쳐도, 키네스가 걸 조건은 뻔했다.

그의 목적은 내가 황궁으로 들어와서 그의 불면증을 해결해주는 걸 테니까.


‘차라리 대신관님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오늘 보니까, 굉장히 온화한 사람 같았다.

기도의 날을 앞두고 한번 그곳을 둘러보고 싶다고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몰랐다.

다만 대신관을 통해 테리투스와 만난다고 해도 기도의 날까지 키네스와 지낼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오늘처럼 키네스는 계속해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할 테니까. 보아하니, 나를 황궁으로 데려갈 생각도 여전한 듯했다.


‘신전에 일찍 올 시간에 레이나나 만나러 가지. 왜 나를 만나러 오냐고!’

레이나라는 운명의 여자가 있으면서! 이불을 키네스라고 생각하며 펑펑 차던 그때였다.


“잠깐.”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직접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원작에서 키네스는 레이나의 능력 때문에 호기심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능력을 떠나 레이나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가.

지금은 내 존재로 인해 키네스가 레이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기회가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두 사람의 연결고리만 만들어준다면, 원작대로 키네스와 레이나가 이어질지도 몰랐다.

나름 두 사람은 불꽃놀이도 보러 간 사이였다.


“그래, 레이나를 부르자.”

그런 다음에 우연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만남을 이어주는 거지!

언제까지 키네스를 피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일단 할 수 있는 선에서 키네스와 레이나를 이어 보려고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레이나라면 내가 불렀을 때 흔쾌히 응해줄 것이었다. 나와 꽤 친해지길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대신 편지를 몰래 보내야 할 텐데.’

신전의 사람에게 부탁해서 레이나에게 편지를 보냈다간 키네스의 귀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시터님, 저녁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래, 리타가 있었지! 나는 후다닥 문을 벌컥 열었다.


“리타 씨!”

“네, 네?”

내 부름에 리타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이렇게까지 반길 줄은 몰랐는지 얼떨떨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둘러본 뒤 리타를 내 방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편지를 보내고 싶은 곳이 있는데 혹시 전달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런데 어느 분께 편지를 보내시려고요?”

“아드리엔 남작가의 레이나 님께 보내려고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혹시 내일 오전 중에 다녀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야 모레쯤에는 레이나가 올 테니까. 다행히 리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오전 중에 다녀올게요.”

남은 건 레이나가 빠르게 신전에 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그 여자와 함께 식사해야 한다고요?”

대신관과 차를 마시던 키레타가 눈을 부릅떴다.

싫은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키레타의 행동에 대신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내일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했으니 참석하도록 하여라.”

나쁜 감정을 지워냈으면 해서 성녀에게 길 안내를 하라고 보낸 것이었다.

메이아가 악한 여인은 아니지 않던가. 소심하고, 겁이 많을 뿐이지.

그러니 직접 얼굴도 보고,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면 키레타의 경계심도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애석하게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인 것 같지만.

키레타가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고위 사제들과 대신관님, 황제 폐하까지 모이는 귀중한 자리입니다. 그곳에 어째서 그런 불순한 여자를 끼우시는 건지 저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주도한 식사 자리에 불만을 가지는 게냐?”

“…….”

키레타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신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황제의 명을 함부로 거역할 수는 없었다.

대신관은 여전히 분해 보이는 키레타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타일렀다.


“키레타, 그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식사자리란다.”

물론, 황제가 보낸 쪽지에 따르면 식사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일단 말을 아꼈다. 황제가 은밀히 남긴 전언이었으니까.
 


[내일 성녀와 고위 사제들을 불러 점심 식사나 하도록 하지. 부디 성녀와 신전이 화합할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하는군.]

 
성녀와 신전이 화합할 수 있는 자리. 대신관은 황제가 남긴 쪽지에 담긴 속뜻을 금세 읽어냈다.

성녀와 화합할 수 있길 바란다는 건 결국, 성녀를 신전에 붙잡아 두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녀는 신전에서 도망친 상태며 앞으로 신전이 아닌 아인티아 공작의 곁에 머물 사람이었다.

그런 성녀를 붙잡아 둘 명분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축복의 의식. 그 얘기를 들먹여서 성녀를 붙잡아 두라는 것이다.

게다가 고위 사제들까지 부르라는 건 성녀에게 압박을 넣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러니 큰 의미를 두지 말고, 꼭 참석하여라.”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요?”

키레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키레타에게 대신관은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존경하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테리투스 님에 대한 믿음도 강할뿐더러 가장 강한 신성력을 지닌 사람이니까.

지금까지 대신관의 판단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고 따라왔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 여자를 위해 고위 사제인 자신이 길 안내를 하는 것도 불쾌했다. 하지만 대신관이 부탁한 것이기에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황제와 대신관, 그리고 고위 사제들끼리 모이는 중요하고 고귀한 식사 자리에그 여자를 끼워 넣는다니.

키레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신전과 신을 배반한 여자를 계속해서 감싸고 도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보나마나 그 여자의 비위나 맞추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럴 바엔 테리투스 님께 기도를 드리러 가는 게 낫지요. 기도 의식 때문에 빠진다고 하면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키레타.”

꺾일 줄 모르는 키레타의 고집에 대신관은 이마를 짚었다. 키레타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키레타는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키레타가 빠진다면 나머지 고위 사제 둘도 동요해서 그녀를 따를 게 뻔했다.


“축복의 의식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자리가 된다고 해도 참석하지 않을 게냐?”

결국, 대신관은 다음 날 있을 점심 식사 자리의 본 목적을 알렸다.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등을 돌렸던 키레타가 멈칫했다.


“……그날 도망쳤던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겁니까?”

“그럴 게다.”

그제야 키레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

이른 새벽부터 주변을 둘러보고 온 리타가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


“저쪽은 민간인의 출입을 꼼꼼하게 통제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신전에 외부인이 꽤 있는 게 다른 출입구가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어제 나와 리타가 들어왔던 곳은 마차를 타고 오는 귀족들이 다니는 구역인 듯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만약 누가 어딜 가냐고 물으면 그냥 간단한 생필품을 사러 나간다고 둘러대는 게 좋을 거예요.”

“네, 걱정 마세요. 누가 뒤를 밟진 않는지 잘 살피면서 다녀올게요.”

리타는 자기만 믿으라며 의지에 찬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리타는 이른 아침부터 내가 준 편지를 들고 신전을 나갔다.


‘아무런 일도 없겠지?’

괜히 뒤에서 일을 꾸미려고 하니 조마조마했다.

방 안에만 있으려니 더 초조해져서 마음을 추스를 겸 가볍게 산책을 하러 나가려던 때였다.

문 앞에서 새하얀 장옷을 입은 사제가 서 있었다.


“아, 메이아 님.”

“네? 어쩐 일이시죠?”

“메이아 님을 데리러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아래로 내려앉았다.

혹시 내가 레이나를 부르려고 하는 게 들켰나? 아니면, 리타가 나가려다가 붙잡혔나?

머릿속에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괜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까스로 불안한 감정을 눌러내며 대답했다.


“……저를요?”

내 물음에 사제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대신관님께서 메이아 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셨으니까요. 혹시 어제 전달받지 못하셨습니까?”

어제 내 방을 찾아온 사람은 리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얘기도 전달받지 못했어요.”

“이런, 다른 사제가 전달을 깜빡했나 봅니다.”

그것보단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제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거겠지.

이제는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어제 키레타의 행동과 사제들의 시선 때문에 이미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했으니까.

사제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까?”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해버릴까. 일부러 내게 점심 식사 약속을 알려주지 않은 사제가 괘씸해서 반항심이 불쑥 들었다.


‘아니야, 참자. 긁어 부스럼 만들어서 뭐 하려고.’

욱해서 감정적으로 굴었다가 앞으로 신전 생활이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그리고 대신관과 가까워질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물론 키네스도 함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어쩌면 내가 얻어갈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식사를 끝낸 뒤 키네스 몰래 대신관에게 은근슬쩍 따로 대화하자는 운을 뗀다든가.


“아뇨, 지금 가면 되죠? 어디로 가면 되나요?”

내가 안 된다고 할까 봐 걱정했던 건지 사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이군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대신관이 나를 초대한 이유는 뭘까? 그냥 형식적인 자리이려나?

사제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갑작스러운 초대에 이런저런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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