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흔들리는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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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흔들리는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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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흔들리는 결심
2022.08.01.
“실례하겠습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졌다.
누구지? 나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있는 큰 흉터, 그리고 무엇보다 어깨에 달린 늑대 문양의 견장.
남자의 외양과 인상착의를 확인한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미 몇 번 스치듯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아, 소개가 늦었군요. 황제 폐하의 보좌관, 비에고 세르비아라고 합니다.”
그의 소개를 듣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황제의 보좌관이 홀로 신전에 올 일은 만무했다.
결국, 신전에 키네스가 왔다는 거겠지. 하지만 키네스를 만나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우산을 씌워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나는 비에고에게 인사를 한 뒤 바로 돌아가려고 했다. 갑자기 나타난 키네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기도의 날이 되기도 전에 그대를 만날 줄은 몰랐군.”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키네스가 은발의 남자와 함께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숨긴 채 허리를 숙였다.
‘키네스가 왜 벌써 신전에 와 있는 거냐고!’
예기치 못한 키네스와의 만남이 당황스러웠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상대였다.
어쩜 상황이 이렇게 꼬이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뚜벅뚜벅. 내게 걸어오는 키네스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시야에 새하얀 정복이 들어왔다.
“신전에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춰서 인사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대신관.”
“하하, 두 분이 친분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대신관?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은발의 남자가 대신관이었어?
이제 서른쯤 되었을까. 내가 생각했던 대신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대신관이라면 신전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자일 테니, 당연히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대신관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얼핏 봐도 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한 달 만인가요.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키레타는 아직 만나지 못한 겁니까? 분명 그 아이에게 메이아 님의 안내를 부탁했는데 말입니다.”
그 순간, 나를 은근히 비꼬던 키레타가 떠올랐다. 무어라 말을 할까 싶었지만 일단 꾹 참았다.
신전에 며칠간 더 머물러야 하는데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 네. 대신관님의 배려 덕분에 헤매지 않고 방을 찾을 수 있었어요. 방금도 신전 안내를 해주신다고 했는데, 보다시피 비가 와서 혼자 구경 중이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대신관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행히 대신관은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근 한 달 동안 메이아 님께 많은 변화가 있으셨나 봅니다. 조금 달라지신 것 같네요.”
“예? 예…….”
대체 메이아는 신전에서 어떻게 생활한 거야. 키레타도, 대신관의 반응도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신전에서 나를 아니꼽게 보는 게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고 있는데, 키네스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비에고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산을.”
아니, 안 돼. 주지 마!
“네, 여기 있습니다.”
내 마음도 모르고 비에고는 들고 있던 우산을 키네스에게 순순히 건네주었다.
“마침 비가 오니 데려다주지.”
얼결에 한 우산 아래 키네스와 함께 있게 된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어찌 성녀인 그대가 비를 맞도록 둘 수 있겠나. 테리투스 님께 신벌을 받을까 두렵군.”
신전이라고 테리투스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런 나를 보며 키네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더니 대신관을 향해 말했다.
“메이아 양과 함께 돌아가 보도록 하지. 기도의 날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어떤가?”
“예, 얼마든지요. 말씀드렸던 것도 천천히 생각하시고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이봐요, 대신관님 이대로 키네스를 보내시려고요? 간절한 눈빛으로 대신관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자상한 얼굴로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유일하게 키네스를 데려가 줄 수 있는 사람까지 떠나자 나는 떨리는 눈으로 키네스를 올려다보았다.
키네스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대가 머무는 방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지?”
***
우산을 함께 쓰고 있는 탓에 나와 키네스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다. 팔꿈치가 키네스와 스칠 때마다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고 신경이 쓰였다.
차라리 비를 맞는 게 낫겠다 싶어서, 몸을 바깥쪽으로 빼면 키네스가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탓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걸음이라도 빠르게 옮기고 싶었지만 키네스가 우산을 들고 있는 탓에 이 역시 불가능했다.
“이쪽으로 가는 게 맞나?”
“네, 저기 큰 등나무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돼요.”
그나마 다행인 건 데려다준다고 나섰던 키네스가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는다는 걸까.
적어도 기도의 날보다 왜 일찍 신전에 온 거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그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로 앞만 보다가 내가 곁눈질을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눈을 마주할 뿐이었다.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니까.’
여전히 내 능력을 원하는 것 같긴 한데……. 할 수만 있다면 키네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투둑투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길동무 삼아 걷다 보니 어느새 내가 지낼 건물이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키네스의 옆에서 물러나 건물과 이어진 회랑으로 쏙 들어갔다.
“여기에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바로 옆 건물이었군.”
내가 어디 머무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키네스는 뻔뻔하게 정말 몰랐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차라도 마시는 게 어떻겠나? 마침 비가 와서 시간도 많을 터인데.”
키네스가 물기가 묻은 우산을 털어내며 내게 은근슬쩍 물었다.
설마 이게 목적이었나? 나는 둘러댈 만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를 오래 타 멀미에 너무 시달려서요. 혹시 다음을 기약해도 될까요?”
다음을 기약한다는 말은 일부러 꺼낸 말이었다.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기회는 많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니까.
나름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는데, 키네스는 어딘가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그는 무어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휴식이 필요하다니 쉬는 게 좋겠지. 그럼 내일을 기약하지.”
“네, 시간이 되면 함께하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확답하지 않고 약간의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키네스는 그런 내 속을 눈치 빠르게 읽어냈다.
“대신관을 통해 듣자 하니, 기도의 날이 되기 전에 방문하겠다는 언질을 주었다고 하던데. 다른 일정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신전에 보냈던 편지 내용이었다. 애초에 키네스가 신전에 일찍 방문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에 그걸 짚을 줄은 몰랐다.
“……없습니다.”
“다행이군. 이만 편히 쉬고 내일 보도록 하지.”
멀어지는 키네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기도의 날까지 남은 기간은 4일.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기도 한 기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키네스를 만나지 않으려고 피해 봤자, 신전 안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신전에서 기도의 날 때문에 나를 부르긴 했지만,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곳에 내 편은 없어.’
나와 함께 온 리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키네스의 눈과 귀가 되어줄 사람들뿐이었다.
이대로 키네스에게 휘둘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루빨리 테리투스를 만날 방법을 찾고, 남은 4일을 무사히 넘길 방법이 필요했다.
***
메이아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키네스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대신관에게 메이아가 일찍 신전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리하게 업무를 처리한 뒤 부랴부랴 달려왔다.
덕분에 오늘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일의 티 타임 약속까지 얻어냈고.
하지만 키네스는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제게 보이는 메이아의 경계심이 여전한 탓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키네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짜증나는군.”
메이아가 아인티아 공작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일찍 신전에 방문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틈을 노릴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정말 기도를 위해 일찍 신전에 방문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녀가 신실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신전에 자주 방문했을 테니까.
‘내일 티 타임 때 추궁을 해 보는 게…….’
거기까지 생각한 키네스는 멈칫했다. 그녀가 일찍 신전에 방문한 이유가 중요하던가?
“……4일.”
고작 4일밖에 남지 않았다. 메이아에게 접근하는 걸 방해할 공작도 없으니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심지어 샤키르의 꽃 포션도 얼마 남지 않았으며 며칠 동안 조금도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몸은 피로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 예민해지고 초조해졌다.
그리고 방금 메이아를 살펴보니 그녀의 경계를 풀어 자연스럽게 황궁으로 데려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일까. 메이아와 만나기 전, 대신관과 나눴던 대화가 유독 잊히지 않았다.
-폐하, 축복의 의식을 받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까?
-성녀가 원치 않는데 어찌 의식을 받겠나.
-예, 성녀의 의사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폐하, 계속 미루시다간 정말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대신관을 포함해서 신전에 있는 사제들은 메이아가 축복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점을 이용해서 메이아가 황궁으로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키네스는 펜을 들어 종이에 대신관에게 전달할 메세지를 적은 뒤 침대 옆에 있는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대신관에게 전달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이 방법이라면, 메이아는 어쩔 수 없이 황궁으로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도 안 된다면?
키네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낮은 서랍 위에 있는 샤키르의 꽃 포션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포션은 단 두 개였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불면증을 고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점차 극한으로 향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키네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