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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어두운 그림자 (78/136)


78. 어두운 그림자
2022.07.29.


테리투스 신전의 회의실, 대신관과 고위 사제들이 한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보라색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트린 고위 사제, 키레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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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 파렴치한 여자를 신전으로 불러야 합니까?”

키레타가 잔뜩 불만이 서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찻잔을 들었다가 놓는 손길 역시 거칠어서 그녀가 얼마나 심기가 불편한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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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을 조심하시지요, 키레타.”

건너편에 앉아 있던 다른 고위 사제가 키레타를 타박했다.

하지만 키레타는 콧방귀를 뀌며 나머지 고위 사제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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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이 틀렸습니까? 테리투스 님의 뜻을 거절하고 도망쳤는데도 아직 신벌을 받지 않은 게 용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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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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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투스 님께서 그 여자를 반길 것 같습니까? 제 딸이라고 칭하고 능력을 주었더니 도망이라니. 어떻게 이런 불순한 행동을 할 수가 있는지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른 두 명의 고위 사제 역시 신실한 테리투스의 신자이기에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신탁을 따르지 않고 신전에서 도망친 신의 딸.

심지어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흑마법을 쓰는 아인티아 공작과 약혼까지 했다고 한다.

테리투스를 믿는 그들에게는 메이아의 행태가 눈엣가시였다.

결국, 다른 고위 사제도 하나둘씩 본심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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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이상한 여자이긴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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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하게 품어주려고 했는데 그걸 거부하고 결국 신전에서 소외된 것도 그 여자의 선택이기도 했고요.”

고위 사제들은 메이아가 처음 신전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리베르탄에서 태어난 푸른 눈의 아이를 신의 딸이라고 부르겠다는 신탁에 따라 메이아를 신전에 데려오긴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메이아는 조금의 신성력도 없을뿐더러 소심하며 잔병치레가 많은 아이였다.

게다가 다가오는 사람마다 거부감을 보이며 툭하면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신의 딸보다는 그야말로 평범한 아이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신전에서도 메이아가 신의 딸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점차 커졌다.

결국, 대신관은 다른 사제들의 우려에 따라 어렵사리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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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아의 능력이 각성하고 나서 신탁에 대해 알리도록 하지.

 
대신관의 결정에 따라 신전에서는 메이아의 존재를 그녀가 능력이 각성할 때까지 숨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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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기도의 날에 그 여자가 얼굴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테리투스 님께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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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메이아를 신전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분위기를 유도하는 키레타를 중재한 건, 대신관이었다.

이미 키레타의 말에 동요하는 고위 사제들을 보며 대신관이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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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아 님께서는 황제 폐하의 초대로 오는 것이니 우선 다들 자중하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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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관님!”

키레타가 주먹을 꽉 쥐며 목청을 높였으나 대신관은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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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하나 테리투스 님을 배반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벌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네.”

대신관은 제 은색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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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기도 시간이니 다들 일어납시다.”

대신관이 먼저 자리를 뜨자, 키레타가 다급히 그 뒤를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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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관님,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여자를 신전으로 불러들인다면 저희가 테리투스 님께 벌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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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타.”

대신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멈춰 섰다. 여태껏 키레타를 딸처럼 곁에 두고 애지중지 키웠다.

신에 대한 믿음이 신실한 아이지만, 한 번씩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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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날보다 며칠 일찍 방문하신다고 했지만, 오래 머물러 봤자 일주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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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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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테리투스 님께서 메이아를 거부한다면 신의 뜻에 따라 원치 않아도 신전에서 나가게 될 테니, 이치대로 두어라.”

대신관은 부드러운 어조로 키레타를 달랜 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다시 걸음을 뗐다.

복도에 홀로 남은 키레타의 눈이 복잡한 감정으로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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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아마 리타가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꽤 지루했을지도 몰랐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가 우리의 신분을 확인했다.

곧바로 통과를 시켜줄 거라고 생각했으나 신전의 출입은 은근히 까다로웠다.

마차의 앞을 막아선 경비가 양해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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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결국, 나와 리타는 마차에서 내린 뒤 조금 더 걸어야 했다. 그런데 어쩐지 걸어가는 길 내내 뒤통수가 따가웠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웅장한 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높은 계단 위로 세워진 상앗빛의 거대한 기둥과 아치형의 거대한 건물을 보고 있자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곁에 있던 리타가 입을 쩍 벌리며 신전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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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는 신전에 처음 와 봐요. 여기가 시터님께서 지내셨던 곳이군요. 특히 이 계단 위에 있는 신전은 더 멋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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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죠……?”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 멋있는 신전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뻔했지.

나는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하나의 마을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변에 세워진 상앗빛의 작은 건물들과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포장된 바닥. 그리고 곳곳에 심어진 정갈한 나무들.

분명 내가 빙의하기 전에 메이아는 여기서 지냈을 텐데, 모든 게 낯설었다.

심지어 나는 축복의 의식이 이루어지던 날 무작정 도망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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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에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새삼 묘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서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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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이에요, 메이아 님.”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금색의 수가 놓인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덩달아 여자를 바라본 리타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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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고귀하신 사제님 같은데, 아시는 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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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의 메이아는 알겠지만, 나는 모른단 말이지.

다행히 먼저 말을 건 여자가 리타의 말을 들었는지 자신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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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키레타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메이아 님을 뵙는군요. 머물 곳을 안내해드리려고 왔어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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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감사합니다.”

키레타, 키레타. 나는 잊지 않게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뇐 뒤 키레타를 따라갔다.

키레타와 함께 지나갈 때마다 사제들의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처음에는 키레타를 바라보는 건 줄 알았으나,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만 향했다.

벌써 나를 알아본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시선들이 무척 노골적이고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었다. 물론 나를 반기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쳐다볼 법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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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티를 내는 거 아니야?’

리타 역시 사제들의 시선을 느낀 건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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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님께서 신의 딸이셔서 그런 걸까요? 다들 시터님만 바라보시네요.”

음, 글쎄 과연 그래서일까.

하지만 키레타도 옆에 있고 보는 눈이 많은 탓에 리타에게 저게 마냥 고운 시선은 아닐 거라며 설명해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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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가 봐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순간이었다.

풉. 바로 코앞에서 비웃는 듯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저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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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메이아 님께서 며칠간 거처하실 곳입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키레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꺼림칙한 기분이 나를 옭아맸다.

***

내가 머물 방을 확인한 나는 곧장 신전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역시나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따갑게 따라붙었지만, 나는 과감히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오로지 테리투스였으니까.

테리투스와 대화만 하고 나면 기도의 날이 되었을 때, 얼굴만 비추고 바로 신전에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라크하에게도 어떻게든 기도의 날에는 돌아오겠다고 말해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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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 오래 있어봤자 좋은 점이 없기도 하고.’

기도의 날에는 키네스도 올 게 뻔했다. 키네스와 최대한 얼굴을 덜 맞대려면 그 전에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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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답이 없어…….”

이 망할 신아! 하필 날씨도 우중충해서 더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넓은 신전을 돌아다니며 테리투스를 불러보았으나 반응이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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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곳은 저곳뿐인데…….”

까마득한 계단 위로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신전. 바로 키네스에게 축복의 의식을 치를 뻔했던 곳이었다.

어쩐지 올라가기 꺼려지긴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니까…….

그래, 괜찮을 거야. 가까스로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계단에 발을 디딘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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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기도의 날이나 특별한 의식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출입 금지된 곳입니다만.”

뒤에서 들려온 날 선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뒤돌았다.

보라색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트린 여자가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낮에 봤던 키레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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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대신관님과 황제 폐하만 출입이 가능한 신성한 곳이죠. 잠시 잊으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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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요. 그랬었죠. 오랜만에 왔더니 잠시 헷갈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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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메이아 님은 늘 신전의 일에 관심이 없으셨으니 모르실 법도 하죠. 이해해요.”

왜 키레타의 말투에 조금 날이 서 있는 것 같지? 하지만 나는 애써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찜찜한 기분을 떨쳐냈다.

어쨌든, 평소에 출입을 금할 정도로 신성한 곳이라면 저곳에서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을 확률이 높을 텐데…….

문제는 키레타의 말에 따르면 저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도의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일찍 온 보람이 없잖아!

끙, 침음을 흘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키레타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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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마침 시간이 비어서 메이아 님과 신전을 둘러보려고 했는데, 날씨가 흐려서 아쉽네요. 돌아다니다가 비라도 오면 곤란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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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죠.”

나는 슬그머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흐렸던 날씨가 정말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해져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키레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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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흐린 날이 없었는데, 이상하죠. 메이아 님께서 방문하시니 하필 날이 이토록 흐려지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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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거 비꼬는 거 맞지? 나는 눈썹을 치켜들며 키레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키레타는 상냥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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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유독 날이 흐린 게 이상하다고요.”

키레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휙 돌아섰다.

방금 키레타가 보인 행동으로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신전에 있는 동안 키레타랑은 최대한 피하는 걸로 하자.

멀어지는 키레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짐하고 있는데, 뺨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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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차가워.”

어둑하던 하늘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더 내리쏟기 전에 얼른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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