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덜 아쉬워하라고 (77/136)


77. 덜 아쉬워하라고
2022.07.25.



“샤키르의 꽃으로 만든 포션이 세 병 남았습니다.”

키네스는 황실 제약사를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이후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세 병이라…….”

키네스가 한숨을 내쉬고서 원탁 테이블 앞의 소파에 앉았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가 누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인생의 삼 할 정도는 수면으로 보낸다.

모두 잠든 시각, 홀로 깨어 매일매일 해가 뜨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보는 삶은 공허하고 무력하기 그지없다.

잠을 자지 못하는 건 인간의 정신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상태였다.

키네스는 착잡한 마음에 미간을 꾹 누르며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한숨 소리에 곁에 있던 비에고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샤키르의 꽃이 개화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사단을 보냈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어차피 기대는 하지 않아. 개화했다면, 진작 신전에서 서신을 넣었을 테니까.”

“네…….”

비에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입을 다물며 뒤로 물러났다.

창밖으로 따사로운 햇살과 따듯한 바람이 들어오는데, 집무실의 공기는 서늘하고 어둡기 그지없었다.

물끄러미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를 바라보던 비에고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폐하, 곧 다가오는 기도의 날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아, 벌써 그렇게 되었나?”

키네스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최근에 수도가 흉흉하여 정신이 없다 보니 기도의 날이 다가온다는 걸 잊고 있었다.

기도의 날, 1년에 한 번 있는 기념일로 테리투스가 마음을 나눴던 상대에게 신력의 일부를 주었던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 일로 테리투스의 신력이 제르디아의 황가에 몇천 년 동안 대대손손 대물림되었다.

하지만 점점 황가의 피가 옅어지며 내려오던 신력이 약화되었는지, 비록 키네스가 지독한 불면증을 겪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나마 샤키르의 꽃이 해결책이었다.

어쨌든, 기도의 날은 역사적인 날이므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매년 3일에 걸쳐 큰 행사를 진행해 왔었다.

하지만 이번 해에는 신경 쓰이는 점들이 많았다.


“큰 행사를 열기에는 조금 무리일 것 같군. 괜히 사고라도 생기면 민심이 더욱 악화될 테니 말이야.”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제국을 휩쓸고 다니는 중이었다.

만에 하나 기도의 날에 행사를 열었을 때, 인명 피해가 생긴다면 신벌이라든지, 제국의 몰락이 다가온다든지 하는 추문이 돌 게 뻔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군.’

키네스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신의 딸, 메이아. 그녀가 신전에서 도망친 이후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샤키르의 꽃도 개화하지 않고, 아인티아 공작은 성녀와의 약혼으로 입지를 키우고 있는데다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와중에 메이아 역시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키네스는 더 초조해졌다. 그래서 더 그녀를 쟁취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옆에 서 있던 비에고는 험악해진 키네스의 얼굴을 보곤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기도의 날의 행사를 취소되면 그날 일정이 비게 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료하게 보낼 바엔 바쁘게 지내는 게 낫겠지. 일이라도 해야겠다.”

키네스는 신력의 부작용으로 불면증이 생긴 이후로 자신의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고 있었다.

미간을 좁히는 키네스를 지켜보던 비에고가 그 말에 수첩에 적힌 그의 일정을 조율했다.


“이후, 진행할 신전 방문은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그래도 역사적인 날인데 관례는 치러야겠지. 하지만, 행사가 취소된 마당에 사흘 동안 있을 필요는 없겠지. 하루 정도면…….”

거기까지 말한 키네스가 멈칫대면서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흐음…….”

키네스는 목을 울리며 제 턱을 매만졌다.

신전이라고 하니, 자꾸 제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는 여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메이아,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신전에서 지냈다고 들었다. 거기에 성녀라고 칭송받았고 신전의 상징과도 같지 않나.

신전의 입장에서는 축복의 의식을 치르지 않고 도망친 메이아가 꺼림칙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신을 믿고 있는 백성들에게 메이아의 존재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테니 기도의 날을 맞아 신전에서도 먼저 메이아에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기자, 키네스는 아까보다 꽤 기분이 나아졌다.


“아무리 행사가 취소된다고 한들, 그런 역사적인 날에 성녀가 부재하면 이상하지 않겠나.”

“……예?”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게 되는 건 비에고의 몫이었지만. 하지만 비에고는 금세 키네스의 속을 파악하고 대답했다.


“아, 네. 만약 메이아님이 방문하신다면 신전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뻐할 겁니다. 다만, 신전에서 도망치신 분이라 그날 오실 거라는 확신이…….”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키네스가 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메이아에게는 이미 자신이 축복의 의식을 강행할 생각이 없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건 더는 그녀가 신전을 겁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신전이 메이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을 취한다면, 그녀도 자신이 도망친 후 신전이 곤란해진 상황을 생각해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일을 활용하면 분명 메이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먼저 신전에 압박을 넣어야겠지.


“신전의 상징과도 같은 성녀다. 적어도 이런 행사에 자신의 의무는 다해야 하지 않겠나.”

비에고는 제 주군의 말에 담긴 속뜻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성녀에게 신전 방문에 대한 의사를 묻는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비에고가 펜을 들어 일정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있던 키네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대신관을 통해서 성녀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해.”

“그럼 대신관님께 먼저 연락을 하겠습니다.”

“기도의 날이니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성녀를 초대해야 하지 않겠냐는 걸 꼭 강조하는 게 좋을 거다. 성녀가 참석할 수밖에 없도록 압박을 넣으라고도 하고.”

“네, 알겠습니다.”

어떤 의도로 명령을 내리는 건지 눈치 챈 비에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전에 며칠간 갈 수 있도록 일정을 비워두도록.”

키네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커피 테이블에 있는 찻잔을 들었다.

메이아, 그녀와 가까워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

때마침,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신전에서 초대장이 도착했다. 초대장을 빙자한 협박에 가까운 제안이었지만.

기도의 날을 기념해서 신전에 들러달라는 내용에 실소가 나왔지만, 어차피 갈 거였으니 모른 척 알겠다는 답을 보냈다.

하지만 국가기념일이다 보니 보는 눈이 많아 테리투스와 얘기를 나누는 것에 제약이 걸릴 위험이 있었다.

결국, 내가 생각한 방법은 답장을 보낼 때 조금 일찍 방문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전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와! 엄청 맛있어!”

두 볼이 빵빵할 정도로 고기를 입에 집어넣은 아이샤가 두 다리를 강아지 꼬리처럼 붕붕 흔들었다.

델카인은 그런 아이샤가 정신 사나운지 눈을 가늘게 뜬 채 쏘아보았다.


“얌전히 먹어.”

“오히려 맛있는 거 앞에서 얌전히 먹는 게 예의가 없는 거지.”

아이샤는 혀를 삐죽 내밀곤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형수님! 아이샤가 방금 얄밉게 구는 거 봤어?”

“어머,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이번엔 나도 못 본 것 같아.”

나는 오랜만에 아이샤의 편을 들어주었다. 잠시 떨어져 있을 텐데 최대한 아이들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그치? 못 봤다잖아!”

아이샤는 세상 전부를 얻은 것처럼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반면, 델카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델카인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델카인은 내가 일부러 아이샤의 편을 들어줬다는 걸 빠르게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끌벅적한 식사시간이 끝날 때 즈음.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아이샤와 델카인은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라크하에게 말할 때보다 더 긴장되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얘기를 꺼냈다.


“잠시 신전에 다녀올까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이닝룸은 찬물이라도 뒤엎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딸그락.

심지어 지나가던 하녀들도 놀란 듯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트렸다.

숨 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것 같은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델카인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형수님?”

델카인을 기점으로 아이샤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언니, 왜 그런 기분 나쁜 곳에 가는 거야. 내가 거짓말을 해서 그런 거야? 나 거짓말 안 할게. 방금 델카인한테 얄밉게 메롱했어. 델카인한테 사과할게. 응?”

예상했던 반응이긴 했다만, 직접 겪으니 역시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내 다리에 달라붙은 아이샤의 머리카락을 곱게 쓸어 넘겨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볼일이 있어서 정말 짧게 다녀오는 거야. 아이샤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아이샤가 울먹이며 내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런 아이샤를 다독여주며 델카인에게도 손을 뻗었다.

그러자 델카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내게 안겼다.


“……정말 돌아올 거지?”

“응, 물론이지.”

나는 쌍둥이들이 진정될 때까지 금방 올 거라고 타일러 주었다.


 

***

그리고 결국 신전에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고 말았다.

나를 배웅하겠다고 일찍 일어난 쌍둥이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언니…… 매일매일 내 생각해야 해.”

“형수님, 기다리고 있을게.”

누가 보면 영원히 안 돌아오는 줄 알겠어. 나는 한숨처럼 웃으며 쌍둥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응, 얘들아. 금방 다녀올게.”

그렇게 쌍둥이들과 인사를 마무리했을 때였다. 곁에 있던 라크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라크하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소소한 대화를 건넸다.


“저 없이도 잘 지내실 수 있죠?”

“누굴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건지.”

“그냥 제가 걱정돼서 한 말이에요.”

라크하는 나를 비스듬히 쳐다보며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걱정되면 얼른 돌아올 생각만 해.”

투정 부리듯 말하는 말투가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신전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기 전부터 하고 있었던 생각이거든요.”

비록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나 역시 부루퉁했지만.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나와 라크하는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했다.

나는 멈춰 서서 라크하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를 향한 다정한 보라색 눈동자, 반듯한 이마 위로 바람에 고요하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잘생긴 콧날과 입술.

이렇게 잘난 사람이 나랑 떨어지기 싫어한다는 게 신기했다. 한참을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짧게 다녀오는 것뿐인데 말이다.


‘그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나쁘지 않은 기분에 설핏 웃자니, 성큼 앞으로 다가온 라크하가 내 이마 위로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 순간, 주변에 있는 사용인들이 술렁였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런 행동을 보일 줄 몰랐던 나는 눈을 치켜뜬 채 라크하의 가슴팍을 가볍게 때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자제하라니까요.”

“그래서 싫어?”

“좋긴 좋은데…….”

주변에서 더 놀란 반응들을 보이니까 민망하단 말이지.

라크하가 슬쩍 웃더니 몸을 숙여 내 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쉽지만 나머지는 돌아오면 하는 걸로.”

이 남자가 그날 이후로 못 하는 말이 없어. 매번 그에게 휘말리는 듯한 기분에 문득 오기가 생긴 나는 그대로 라크하의 뺨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입맞춤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지금까지 내가 먼저 입을 맞춘 적은 없었던 탓이었다.

놀란 라크하의 얼굴을 보며 나는 살포시 웃으며 속삭였다.


“그동안 덜 아쉬워하라고요.”

그러고는 혹여나 그가 잡을세라 후다닥 마차에 올라탔다.

오기가 생겨서 홧김에 한 행동이었기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나는 창문 밖으로 라크하와 난동을 부리는 아이샤, 그런 아이샤를 막는 델카인을 바라보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곳에 머물고 싶어서 떠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곳이 좋아졌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추억을 지닌 내 보금자리니까.

나는 멀어지는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테리투스를 만날 방법을 찾아야겠어.’

화창한 공작가의 하늘과는 다르게 신전으로 향하는 하늘은 유달리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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