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 그대를 사랑하니까 (76/136)


76. 그대를 사랑하니까
2022.07.22.



 
곳곳에 있는 작은 등불마저도 새카만 어둠에 삼켜진 밤.

메이아를 끌어안은 라크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한가득 들이마시자 불안하던 감정이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공작님?”

얼떨결에 라크하의 품에 안긴 메이아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라크하는 어떠한 대답도 없이 그저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 아무 말도 없이 떠났을 리가 없지.’

그런데 왜 쌍둥이들밖에 없는 침대를 보는 순간 그녀가 순간 떠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지.

라크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 밤중에 왜 여기에 있어.”

라크하는 책망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듯한 모습에 메이아는 라크하의 널찍한 등을 토닥였다.


“잠이 안 와서요. 그런데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있으니까 괜찮아.”

메이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제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은 라크하가 늘 습관처럼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마침 신전에 가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그 말을 듣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몸이 맞닿아 있는 탓에 메이아의 변화를 금세 눈치챈 라크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메이아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설마…… 나를 떠날 생각을 했어?”

“아뇨, 제가 공작님을 떠날 생각을 왜 하겠어요.”

메이아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제 허리를 감고 있는 라크하의 팔을 살포시 잡아 내렸다.

라크하는 순순히 메이아를 놓아주었다.

사실 제 품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더 세게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녀가 원치 않는데 붙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크하의 마음속 불안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혹시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건 없나?”

“어…… 음.”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메이아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신전을 가겠다는 말은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이야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얘기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물쩍 넘기고 나중에 얘기를 꺼냈다간 오히려 라크하가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사실,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뭐지?”

함께 가자는 말을 할까도 싶었지만, 메이아는 생각을 바꾸었다.

신전에서 도망친 나를 향해 신관들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몰랐다.

심지어 흑마법과 신성력은 상성인 힘이었다. 흑마법을 쓰는 라크하를 반길 일은 더더욱 없었다.


“저 신전에 다녀올까 싶어요. 혼자서요.”

“…….”

차가운 밤바람이 매섭게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전…….”

라크하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초조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전에 다녀오겠다는 말인데 마치 자신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라크하는 그렇다고 메이아를 붙잡기도 망설여졌다. 메이아를 존중하기로 마음먹기도 했고, 더구나 그녀에게 미움을 사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라크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거긴 갑자기 왜?”

오랫동안 생각한 것에 비해 라크하가 내뱉은 말은 무척 단순했다.

메이아는 차분히 질문하는 라크하를 보며 조금 긴장을 풀었다.


“전설에 따르면 녹스를 테리투스의 힘으로 봉인했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어쩌면 녹스를 없앨 방법이 신전에 있을지도 몰라요.”

메이아는 거기까지 말하고 라크하의 눈치를 살폈다. 더 말해 보라는 듯한 눈짓에 메이아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마침 황제도 제가 희생하면서까지 축복을 내려주길 바라지는 않으니, 신전에 들려서 도움이 될 법한 정보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저도 도움이 되고 싶기도 하고요.”

그럴듯한 이유였다. 하지만 라크하는 메이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늘 낮에 창문을 통해 봤던 메이아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테리투스를 부르던데.”

“……네?”

메이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대가 있던 곳이 내 집무실 근처여서 우연히 들었어.”

“그렇……군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린 메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자꾸 입을 뗐다가도 다시 닫는 그녀의 모습에 라크하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믿고 마음에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제게 털어놓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제 욕심이겠지. 라크하는 그 마음을 억누르며 인내심을 발휘해 그녀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제가 테리투스를 불렀던 건…….”

말끝을 흐린 메이아의 얼굴 위로 무거운 고민이 들어앉았다. 훤히 보이는 그 모습에 라크하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됐어. 얘기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메이아가 알려주기를 꺼린다면, 캐물어서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이 정도 반응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가니까.

어쩌면 메이아는 신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아는 신의 딸이지 않은가.

생각해 볼수록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하루나 이틀 정도로 생각하고 있긴 한데…….”

더 길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군.”

라크하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늘 손에 잡힐 듯하면 사라지는 것 같던 느낌은 기우가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제 앞에 있는 메이아를 훑었다.

푸른 눈동자를 머금은 채 날갯짓을 하는 속눈썹, 새카만 밤에도 반짝거리는 백금색의 머리카락.

그 아래로 언뜻 보이는 얇고 새하얀 목덜미까지.

항상 라크하는 그녀의 모든 걸 갖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리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갖고 싶다는 마음이라기보다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온전히 자신만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녀가 잠시만 제 곁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로 사라진 것은 아닌지 불안함이 일었고 집착도 점점 커져만 갔다.

그냥 제 옆에서 보호만 받으며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갈수록 그의 마음속에서 면적을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그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메이아가 원하지 않으니까.

더구나, 녹스의 약점이 신력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파훼법을 알아내거나 그와 비슷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은 신전임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의 딸로 불리는 그녀와 달리 흑마법사인 자신이 따라갈 명분도 없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녀와.”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네?”

메이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크하가 단번에 다녀오라고 말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잠깐 제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어요?”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는데도 머뭇거리는 메이아를 보며 라크하는 한숨처럼 웃었다.


“어차피 잠시 다녀온다면서.”

“그래도 제가 없으면 며칠간 주무시지도 못할 텐데.”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라크하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머뭇거리는 메이아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자신을 버릴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까.


“……정말 금방 다녀올게요.”

“그래.”

라크하의 대답은 마지막까지 담담했다.

찌륵, 찌륵. 풀벌레 소리가 유독 애처롭게 들려왔다.

메이아는 물끄러미 무덤덤해 보이는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바라던 신전으로 갈 수 있게 됐는데, 이상하게도 메이아는 마냥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쉽고, 심기가 뒤틀렸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던 그때였다.


“쌍둥이들에게도 잘 말하고 가야겠어. 애들이 쉽게 보내주진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메이아는 왜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알아챘다.

라크하가 자신을 쉽게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보내주었다.

그 모습이 라크하가 마치 자신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크하가 좀 더 자신을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신전에 가지 않을 것도 아니면서.

메이아는 청개구리 같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밤공기가 차니 이만 들어가지.”

얘기는 이걸로 됐다는 듯 라크하가 등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메이아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라크하의 등을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팔이 라크하의 몸을 세게 옭아맸다.


“……!”

예상치 못한 메이아의 행동에 라크하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메이아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왜…… 공작님은 왜 이렇게 저를 쉽게 보내주는 거예요?”

메이아는 그 말을 뱉고도 자신이 듣고 싶었던 답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그저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려 그 말이 들리자마자 서운함이 물밀듯 밀려오더니, 이제는 너무 쉽게 허락하는 건 아닌지 초조하기까지 했다.

시원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손이 나아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를 껴안으니까 이제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메이아는 라크하가 자신을 잡아주길 바랐고, 네가 없는 동안 나는 어쩌냐며 투정했으면 했다.


“그럼 내가 붙잡길 원해?”

라크하가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며 물었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괜히…….”

메이아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대변할 수 있는 단어를 골라 어렵게 대답했다.


“괜히…… 불안해서요.”

“뭐가 불안한데?”

곧장 치고 들어온 라크하의 물음에 메이아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당황한 메이아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너무 쉽게 다녀오라고 하니까 저를 포기하는 것 같고, 저한테 관심이 없어졌나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뒤로 갈수록 메이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으나 라크하는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메이아의 불안도, 자신의 불안도 어디서부터 생긴 것인지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서로의 마음을 둘러 말하기만 했었지,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라크하는 그새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난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럴 일은 없으니 괜한 걱정하지 마.”

라크하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곱게 휘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그대를 몰아세웠던 내가 태도를 바꾸니 당황스럽긴 하겠지만, 이젠 자제하려고.”

라크하는 손을 뻗어 메이아의 뺨을 가볍게 감쌌다.

청량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저 본능적으로 끌렸던 기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기운이 없어도 그녀에게 끌리고, 그녀를 원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대를 사랑하니까.”

달빛이 내리깔린 공간 위에 나지막하고 담백한 고백이 울렸다.


“……!”

메이아는 일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말투와 행동, 그리고 눈빛으로 라크하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귀로 듣는 건 달랐다.


“메이아, 그대도 나와 같을까.”

라크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이번에는 꼭 그녀가 대답해주길 바라면서.

메이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라크하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확신해왔던 감정이라는 것처럼.

그 눈과 마주하자 메이아 역시 제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를 원한다고. 그에게 조금 더 마음을 담아서 말해주고 싶었다.


“저도…… 사랑해요.”

어차피 숨긴다고 해서 감춰질 감정이 아니니까.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메이아는 그를 한가득 끌어안으며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라크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침범한 그는 여린 살을 훑으며 빨아들였다.

그걸로도 부족했다. 라크하는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그녀의 숨까지 삼켰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며 묻어 나오는 축축한 소리가 야릇하게 울렸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메이아는 숨을 할딱이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걷잡을 수 없는 물살에 떠밀려갈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그의 본능을 건드렸다.

단단하고 굵직한 손가락이 메이아의 굴곡진 허리선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갔다.


“아……!”

메이아의 입에서 얕은 흥분에 휩싸인 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그는 더욱 깊게 입을 맞추었다.

미약한 별빛 아래 둘은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