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포기할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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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포기할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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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포기할 수는 없어
2022.07.18.
“테리투스 님!”
반가운 마음에 테리투스의 이름을 크게 외친 나는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안도하며 후다닥 익숙한 고양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 노랗고 통통한 몸뚱이는 예전에 테리투스가 현신해서 내 방을 찾아온 그 고양이가 분명했다.
“마침 잘 왔어요.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하지만 테리투스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왜 아는 척도 안 해? 나는 약간의 불만을 담아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빵빵한 식빵 같은 엉덩이를 쿡 찔러보려는데, 테리투스가 휙 고개를 돌려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나를 쏘아보았다.
저 거만하고 고고한 눈빛은 분명 테리투스가 맞는데…….
오늘따라 테리투스가 유독 날이 잔뜩 서 있는 것 같아 괜히 위축되었다.
‘좋아, 오늘은 부탁할 게 있으니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갈까?’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테리투스를 불렀다.
“테리투스 니이이임, 왜 그러세요오.”
이제는 대답해주겠지? 그런데 답은커녕 테리투스는 수염을 실룩거렸다. 너무 오버를 한 건가 싶어 머쓱하던 순간이었다.
“언니다!”
“형수님! 거기서 뭐 해?”
위에서 들려오는 아이샤와 델카인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쌍둥이들이 창문가에 몸을 반쯤 빼놓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러다 떨어지진 않을까, 가슴이 선득해졌다.
“얘들아, 위험…… 어?”
쌍둥이들을 말리려고 벌떡 일어난 그때였다.
캬오옹!
내 행동에 놀랐는지 고양이가 높게 뛰어오르더니 털을 바짝 세운 채 사납게 울었다.
그러고는 짧은 다리를 움직여 통통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
나는 놀라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뭐야…… 평범한 고양이었어?”
***
창문가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을 겨우 들여보내고, 나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테리투스를 불러보았다.
애석하게도 결과는 허탕이었다. 분수대에 걸터앉은 나는 긴 한숨을 뱉어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는 거야…….’
불러도 반응이 없고, 이전에 현신했던 동물의 몸에도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위험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과 달리 세상은 평화롭고, 한적했다.
“앞으로도 쭉 이러기만 하면 좋으련만.”
이러고 있으니 녹스를 봤던 일은 잠깐 꾼 악몽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테리투스를 찾는 게 먼저였다.
한시라도 빨리 테리투스를 찾아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시터님?”
“아, 리타 씨.”
빨래라도 하고 오는 걸까, 리타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리타 씨는 빨래를 널고 오신 거예요?”
바구니를 흘긋대며 묻자, 리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이제 이것만 가져다 놓으면 오늘 할 일은 끝이에요. 고민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들어드릴까요?”
리타와 함께 지내며 종종 쌍둥이들과 관련된 고민 상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의 고민은 리타에게 하소연하기엔 곤란했다.
아니, 리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었다.
‘어떻게 하면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는지를 물을 수는 없잖아.’
게다가 그걸 리타가 알고 있을 리도 없었다.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절로 기분이 울적해졌다.
내 어두운 표정을 보았는지 리타가 내 옆자리에 슬쩍 앉았다.
“혹시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속을 썩이신 건가요?”
“아뇨, 요즘은 안 그래요. 그리고 이제는 속을 썩여도 그러려니 하는걸요.”
이제는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오히려 애들이 얌전하면 더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말썽꾸러기 같은 쌍둥이들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그래도 힘드시면 언제든 저한테 말씀하셔요. 제가 도와줄 수 있다면 전부 도와드릴게요.”
리타가 자신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리며 믿음직하게 어깨를 쭉 폈다. 저 의욕 넘치는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니까.
리타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항상 제 일처럼 반응해주는 덕분에 많은 위안을 얻은 일도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요. 리타 씨.”
“별말씀을요.”
내 감사 인사에 리타가 부드럽게 웃더니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벌써 노을이 졌네요. 하루가 참 빨라요.”
“그러게요. 시간이 순식간에 흐르는 기분이에요.”
“그러고 보니 시터님께서 이제 공작가에 오신 지 한 달 정도 되었나요?”
공작가를 들어온 지 이제 일주일쯤 된 것 같은데. 새삼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간 것 같았다.
“음…… 네, 그렇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아, 그러고 보니 축제 이후로 며칠간 휴가를 내어주곤 하는데, 시터님은 휴가 때 계획이 있으신가요?”
“휴가요?”
“네, 다들 여행을 가기도 하고 고향을 가기도 하죠.”
여행, 고향. 이곳에 와서 처음 생각해 본 것들이었다.
여행은 아직 이 세계 지리를 알지 못해서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호기심이 들기보다는 두려움이 크기도 했고.
고향이라고 하면, 메이아의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데다가 신전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잠깐, 신전?’
그 순간, 엄청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왜 그걸 생각을 못 했지?
신전이라면 테리투스를 만날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문득 얻은 큰 깨달음에 나는 벌떡 분수대에서 일어나 리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마워요! 리타 씨!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어요!”
“네, 네……? 휴가 고민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나는 리타의 손을 놓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내가 신전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키네스도 내가 축복을 내리고 희생하는 건 내키지 않는 눈치였으니까.
레이나보다 내 능력을 원하는 게 조금 수상쩍긴 했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신전에 가면 테리투스와 만날 수 있을 거야.’
신관들이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곳이 가장 신과 가깝고, 소통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
게다가 쌍둥이들의 수업도 모두 취소되었으니 신전에 다녀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들뜬 마음에 머릿속으로 바삐 신전에 갈 계획을 세우던 것도 잠시, 떠오른 생각에 나는 우뚝 발걸음을 세웠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내게 과한 집착을 보이는 라크하와 쌍둥이들이었다.
***
신의 딸, 성녀 메이아. 축복을 내려주고 ‘영원한 잠’에 들어 신의 품으로 돌아갈 여인.
오늘이 되어서야 라크하가 알게 된 진실이다.
라크하는 이따금 메이아가 어디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래서 불안했던 거였나.”
메이아가 제 운명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진작 신의 품으로 돌아갈 존재였으니까.
짧게 한숨을 내뱉은 라크하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메이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메이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창문 밖에서 얼핏 들려온 메이아의 외침에 라크하는 눈가를 좁혔다.
“테리투스……라고?”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메이아가 테리투스, 라고 외친 게 확실했다. 그 이후로 라크하는 계속해서 메이아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메이아의 행동은 산책보다는 오히려 무언가를 찾고 있는 느낌에 가까웠다. 믿기지는 않지만, 정황상 테리투스를 찾고 있는 듯했다.
라크하가 의아하게 창밖을 내려다보던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이른 새벽부터 파트라슈와 함께 나갔던 시롬이 집무실로 복귀했다.
“공작님.”
“보고해.”
라크하는 여전히 창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하지만 시롬은 익숙한 듯 조사해 온 정보들을 차분하게 알렸다.
“빌렌이라는 하녀 말입니다. 아직 황실에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5년 전의 일에 대해 정확히 모르기도 하고요.”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저택에 남아 있지도 않았겠지.”
그날 선대 공작 부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라크하의 최측근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억을 지웠으니까.
만에 하나 빌렌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대 공작의 행실과 데미안에 대한 정보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 두 가지를 알고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거슬리긴 하지만 이미 황궁으로 그녀의 거취가 넘어간 이상, 손 쓸 도리는 없었다.
지금처럼 황실에서 얼마나 정보를 캐냈는지 정도만 알아낼 수 있을 뿐이지.
“아, 그리고 실종 사건이 일어난 위치가 산발적이긴 하나, 최근에 실종 사건이 일어난 위치가 비스퇴르가라고 합니다.”
뒤이은 시롬의 보고에 라크하는 멈칫 몸을 굳혔다. 라크하도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무분별한 실종 사건의 주범이 녹스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마지막 위치가 비스퇴르가라니. 저택과 거리가 가까운 곳이기에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녹스가 메이아를 노린다는 걸 알게 된 이상은 더더욱.
“저택의 경비를 늘리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사용인들이 외부로 나가는 일도 최대한 뒤로 미루라고 하고.”
하지만 이것만으로 될까.
녹스의 존재와 황제의 이상행동까지.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린 라크하는 약간 불안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지키면 될 일이었다. 이제는 제 사람이 된 그녀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
쌍둥이들이 곤히 잠든 밤.
나는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심스레 테라스로 나왔다.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났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풋풋한 풀내음이 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이네.’
잠이 오지도 않는데 쌍둥이들이 깰까 봐 조마조마하며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고문이었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가만히 별이 박힌 까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테리투스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오늘 하루 내내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봐요, 테리투스 님…… 한번쯤은 나타나 줄 수 있잖아요.”
응? 내가 이렇게나 간절하게 부르잖아요. 나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잔뜩 책망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으니 테리투스가 스스로 나타나는 건 포기해야 할 듯했다.
“역시 신전을 가는 게 답인가…….”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걸리는 점이 꽤 있었다. 신전을 도망쳐 나온 상황에서 이제 와 돌아온 나를 신관들이 환영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신전에 간다고 해서 테리투스를 어디서 불러야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고, 곧바로 얘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테리투스와 연락할 방법에 관한 단서는 신전에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라크하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녹스가 테리투스와 관련되어 있기에 신전에 갈 변명은 충분히 만들 수 있지만, 라크하의 반응이 조금 두려웠다.
그렇다고 말도 없이 나갔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게 뻔했다.
일단 라크하한테는 내일 얘기를 꺼내 봐야겠다.
오늘은 저녁도 거르고, 아직 방에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바빠 보이니까.
“이만 들어가야지.”
대충 생각을 정리했고, 충분히 바람도 쐤으니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아직 문고리를 잡지도 않았는데, 커튼이 걷히더니 테라스 문이 열렸다.
이윽고 밤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며 달칵 문이 닫힌 그 순간,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