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 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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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 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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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 볼 생각이야
2022.04.01.
폭탄과도 같은 발언을 던져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라크하와 달리.
나와 펠리르의 입이 하마처럼 떡 벌어졌다. 나는 내 턱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얼굴을 더듬었다.
‘다행히 그건 아닌 것……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다간 펠리르가 오해를 할지도 몰랐다.
경악한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냥 아인티아 공작저에서 시터로 일하고 있어요.”
“공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사적으로는 달라.”
“사적으로도 남남-.”
“-인 것 같지만, 약혼 서약서도 썼으니 예비부부라고도 할 수 있지.”
부정하려는 내 말을 완벽하게 가로챈 라크하가 제멋대로 문장을 완성시켰다.
그것도 내가 어떻게 반박할 수 없게끔 말이다.
나를 신전으로 데려가려는 키네스를 막으려던 약혼 서약서가 내 입을 막을 줄이야.
내가 입을 벙긋거리며 아무런 말도 못하는 사이에 정신을 차린 펠리르가 라크하를 덥석 잡아챘다.
“자, 잠시만. 라크하, 우리 따로 얘기 좀 하자.”
라크하를 이끌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펠리르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 앞날이 평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
라크하 아인티아와 알고 지낸 지 어연 몇십 년째.
펠리르 미키아, 그는 인생 최고의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방문을 쾅 닫은 펠리르는 라크하를 보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야, 결혼? 네가 결혼이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그새 더 멍청해지기라도 했나?”
“……차라리 내가 멍청한 거였으면 좋겠다.”
펠리르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크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예전부터 크게 감정 변화에 기복이 없는 친구이긴 했지만 태연한 모습을 보니 펠리르는 제 속이 다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 볼 생각이야.”
“아니, 대체 왜?”
“계속 곁에 두고 싶으니까.”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폭탄 발언을 던지는 라크하를 보며 펠리르가 제 뒷목을 잡았다.
펠리르가 아는 라크하는 곁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억지로 잡아두거나 협박을 하면 했지.
“정말 그 이유뿐인 거 맞아?”
“그럼?”
“너, 그 아가씨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라크하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펠리르는 보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건 아니냐는 질문에 잠시 흠칫하던 라크하를.
펠리르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다행인데, 어쨌든 조심해. 만약 정말 그런 감정이 들어도 샤키르의 꽃의 부작용 때문일 거니까.”
그때 라크하의 머릿속에 메이아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공작님은 제 능력 때문에 착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 불과 며칠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메이아가 제 등을 껴안았을 때. 그리고 메이아를 안아 들었을 때.
라크하는 전과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욕구가 들끓고 이성을 잃지 않았으니까.
손끝, 손가락, 손. 점점 접촉 부위가 넓어지는 것 같더니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그딴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부른 거면 그만하지.”
“쓸데없는 소리라니! 진심으로 충고해주는 거라고. 솔직히 네가 누굴 사랑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오죽하면 아인티아 공작이 고자라는 말까지 있겠냐.”
줄줄 말을 뱉어내다가 무심코 하면 안 될 말까지 해 버린 펠리르는 뒤늦게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에 내뱉은 말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라크하의 기세가 전보다 더욱 흉흉해졌다.
“……네가 봤나?”
“미안하지만…… 안 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이만 가보겠다. 메이아가 기다려.”
“잠깐, 잠깐! 아직 얘기가 안 끝났다고.”
문 앞을 막아선 펠리르는 라크하의 입에서 더 심한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그 아가씨 얘기는 아니야.”
“그럼 무슨 얘기지? 빨리 말해. 시간 낭비야.”
“성격도 급하긴.”
펠리르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량이 떨어져서 북쪽 숲에 샤키르의 꽃 포션을 못 보내고 있어.”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굴던 라크하의 행동이 일순 굳었다.
“못 보낸 지 얼마나 됐지?”
“한 이틀 정도?”
라크하의 부탁에 따라 북쪽 숲에 위치한 한 별장에 샤키르의 꽃 포션을 보내고 있긴 했다.
그러나 이유는 라크하가 알려주질 않아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라크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입을 뗐다.
“비상용으로 따로 빼놨던 게 있지?”
“그런데 그건 라크하, 네 거잖아.”
“일단 그거라도 보내. 그리고 충분히 지원을 해줄 테니 샤키르의 꽃을 대체할 수 있는 연구도 최우선으로 하고.”
대체 그곳에 누가 있길래? 펠리르는 궁금한 나머지 북쪽 숲에 직접 가보기도 했었다. 심지어 최근에도.
늘 그랬듯 그곳에는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누구에게 샤키르의 꽃 포션을 전달해 주는지 확인은 못 했다.
대신 펠리르는 그곳에서 신기한 생명체를 발견했다.
‘북쪽 숲에서 발견한 걸 잡아 왔다고 말해도 되려나?’
펠리르는 빠르게 그 생각을 치워냈다. 몰래 북쪽 숲을 조사했다는 걸 들켰다간 그대로 라크하에게 목을 썰릴지도 몰랐다.
“알겠어.”
펠리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 얘기를 하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펠리르의 조수라던 사람은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비척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결과, 나는 또다시 기괴한 가게에 혼자 남게 되었다.
“언제 오는 거야…….”
잘못 움직였다가 무언가를 잘못 건드려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니 불안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초조하게 눈만 굴리고 있었을까.
삐그덕 삐그덕,
별안간 멀리서 정체 모를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은 그 순간 가게에 배치되어 있던 촛불이 꺼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어둠에 잠겼다.
“헉.”
눈앞이 순식간에 캄캄해지자, 공포가 엄습했다.
일순간 떠오르는 무시무시한 괴담들을 무시하려 애쓰면서 나는 간신히 펠리르를 불렀다.
“저기요, 펠리르 씨. 가게 불이 꺼졌어요.”
방 안에 있는 펠리르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담겨 있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공작님?”
불안한 마음에 라크하까지 부르던 그때였다.
스스슥, 무언가 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약지에서 찌릿함이 올라왔다.
따끔거리면서도 찌릿한 이 느낌. 분명 어제도 느꼈던 감각이었다.
성물에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눈살을 찡그리며 성물을 끼고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멀쩡해 보이는데…….”
괜히 성물을 손가락으로 콕콕 가볍게 두드려보던 찰나였다.
“비, 비켜 주세요!”
멀리서 들려오는 급박한 외침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점점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손을 더듬자 양옆에 테이블이 만져졌다. 옆으로 몸을 비킬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어디로 비켜야 하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는데, 한 인영이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곳으로 몸을 던졌다.
“……!”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바닥을 굴렀다.
깜짝 놀란 나는 바닥을 구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자 대충 얼굴이 보였다.
몇 분 전 스치듯 봤던 펠리르의 조수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뚜껑, 뚜껑이……!”
하지만 조수는 정신없이 뚜껑을 찾기 바빴다.
웬 뚜껑? 의아한 것도 잠시, 나는 조수의 품에 사람 머리 크기만 한 항아리가 있는 걸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도 꿀렁이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저게 뭐지?’
위험한 거라도 되는 걸까. 조수는 필사적으로 양팔로 입구를 막았다.
어쩐지 급박해 보이는 몸짓에 나는 서둘러 옆 테이블을 더듬어 위에 있던 책을 잡아 건네주었다.
“일단 이걸로 막아요!”
조수는 허둥지둥거리며 뚜껑을 찾더니 급한 대로 항아리 구멍을 책으로 덮었다.
구멍이 완전히 막힌 걸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엷게 웃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사실 도와준 거라곤 책을 건네준 일밖에 없기에 감사 인사를 받기에도 민망했다.
조수는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요. 원래 가만히 움직이지도 않던 게 갑자기 난동을 부리지 뭐예요."
"그게 뭔데요?"
얼핏 보기엔 형체도 알 수 없는 검은 슬라임 같아 보였었다.
"아, 이게 이번에 북쪽…… 헉, 누가 오려나 봐요."
조수는 말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더니 벌떡 일어났다.
라크하나 펠리르인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사람의 인영은커녕 캄캄한 어둠만 보였다.
"제가 얘를 잠시 놓쳤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들키면 크게 혼이 나서요!"
펠리르의 조수는 후다닥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엄청 빠르네.
사람답지 않은 몸놀림에 입을 벌리며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챘다.
누구지? 고개를 들자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공작님?"
나는 라크하의 모습을 보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라크하의 검은 앞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놀라서 급하게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위험한 물건에 당하진 않았고?"
"네? 네네, 아무렇지 않아요."
괜찮다는 대답에도 라크하는 샅샅이 내 몸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멀쩡하다는 걸 직접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놓아주었다.
"다행이군, 큰 소리가 나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야! 그렇게 무작정 혼자 나가냐!"
그때 펠리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이어 달려왔다.
라크하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펠리르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하지만 펠리르는 라크하의 무시가 익숙한 건지 개의치 않아 하며 나를 향해 물었다.
"아가씨, 큰 소리가 나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조수님께서 이상한 검은 생명체를 잡으려다가 넘어지셨어요, 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잠시 고민했다.
도망친 걸 보니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펠리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무래도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들키면 혼난다며 비밀로 해달라고 했던 조수의 모습이 생생했다.
"……조수님께서 지나가다 넘어지시면서 포션을 떨어트리셨거든요."
나는 펠리르에게 그럴싸한 변명을 했다. 마침 포션 제작을 맡겼다고 하기도 했으니까.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다행히 펠리르는 내 말에 한 치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런저런 실수가 잦은 조수였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가 관심을 보인 쪽은 어둑해진 가게였다.
"어라? 그나저나 촛불은 왜 꺼진 거람?"
"아, 갑자기 꺼지더라고요.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었나 봐요."
어둠 속에 혼자 남아 있던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금 오싹했다.
하지만 펠리르는 이상하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꺼질 리가 없는데……."
꺼질 리가 없다고? 예상치 못한 말에 펠리르를 빤히 쳐다보는데, 커다란 손이 내 앞을 가렸다.
"저런 놈 보지 마. 그대 눈만 상해."
"뭐? 내가 어때서! 아가씨는 내가 귀엽다고 해 줬거든?"
“귀도 상하겠군. 어차피 볼일도 끝났으니 이만 가지.”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라크하가 나를 이끌었으나 나는 몸에 힘을 주어 버텼다.
"잠시만요."
아무래도 불이 꺼질 리가 없다고 중얼거렸던 펠리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때마침 성물을 끼고 있던 손가락에 아릿함이 느껴졌던 것도.
내가 움직이지 않자 라크하가 눈썹을 들썩였다.
"왜 그러지?"
"펠리르 씨에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아가씨? 나한테 궁금한 게 뭐야?"
내 물음에 펠리르가 폴짝거리며 뛰어와 눈을 반짝였다.
나는 내가 신경 쓰이던 걸 말했다.
"그…… 촛불이 꺼질 리가 없다고 하셔서요."
"아, 마력석으로 만든 거라 그럴 리가 없긴 한데, 뭐 한 번씩 흑마력이랑 충돌하면 꺼지기도 해. 아마 라크하가 와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나 봐."
흑마력이라……. 나는 곰곰이 내가 처음으로 찌릿함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금기의 흑마법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라크하가 이성을 잃었던 날. 그때도, 라크하가 흑마법을 사용했었지.
‘흑마법에 반응을 보이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성물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등줄기가 선득해져서 라크하를 살펴보았다.
라크하의 보라색 눈동자가 짙은 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펠리르랑 친한 거 아니었어? 아니면 둘이서 방에 들어간 다음에 싸우기라도 한 건가?’
어쩐지 점점 펠리르에 대한 경계가 심해지는 것 같다.
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펠리르를 향해 인사를 했다.
"펠리르 씨,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아가씨, 오늘 만나서 너무 즐거웠어."
내 인사에 펠리르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다음에는 따로 만나자. 가게 지하에 신기한 게 많거든? 포션 만드는 방법도 보여줄게."
“네네.”
나는 펠리르의 말을 듣는 척을 하며 눈으로는 라크하를 쫓았다.
그때 라크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일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탓에 으르렁대는 듯한 음성은 정확히 내 귀에 꽂혔다.
하지만 펠리르는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해맑았다.
얼른 가게를 벗어나야 한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라크하를 이끌고 도망치듯 가게를 뛰쳐나갔다.
“그, 그러면 저희는 이만 다음 일정이 있어서 얼른 가볼게요!”
나, 신의 딸 메이아, 오늘도 사람 한 명 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