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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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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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운명적 만남
2022.04.04.
그 시각, 아인티아 공작가의 다이닝룸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심각한 분위기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쌍둥이들 때문이었다.
마구잡이로 스테이크를 썰며 입에 집어넣던 아이샤가 쾅 소리 나게 칼을 내려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델카인은 한결같이 평온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런 델카인이 못마땅한지 아이샤는 눈을 매섭게 뜬 채 델카인을 쏘아보았다.
"넌 밥이 넘어가?"
"밥부터 먹고 얘기해도 충분해."
"뭐라는 거야! 언니가 나가기 전에 빨리 계획을 세워야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델카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평소의 아이샤는 계획은커녕 들이닥친 일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메이아와 관련된 일에는 태도를 싹 바꾼 모습이 황당했다.
“평소에 계획은 필요 없는 거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네가 계획을 짜자고 했던 일은 늘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이번 일도 생각해 둔 게 있을 거 아니야, 말해 봐.”
“지금?”
"물론이지! 언니 생각에 밥이 안 넘어간단 말이야!"
그렇다기엔 이미 아이샤의 스테이크 접시는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델카인의 시선이 빈 접시로 향해 있다는 걸 눈치챈 아이샤가 쓱 밀치며 버럭 외쳤다.
“아니, 빨리 얘기해 보라니까!”
아이샤의 독촉에 델카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알겠어.”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한 델카인이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종이 위에는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로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선 여기에 대충 몇 가지 계획을 적어두긴 했어.”
“에잇!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네! 왜 이렇게 작게 적었어? 이리 줘 봐!”
종이를 흘겨보던 아이샤가 그대로 델카인이 들고 있던 종이를 휙 채갔다. 제대로 읽어보긴 하려나?
아이샤는 평소에도 책과 글이라면 질색하며 읽지도 않으니 델카인은 크게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떤 내용이나면…….”
“조용히 해, 읽고 있잖아.”
아이샤의 눈이 종이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드물게 집중하며 내용을 정독하는 모습에 델카인은 내심 놀랐다.
메이아를 향한 아이샤의 집착이 강한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의 변화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한참을 읽고 또 읽던 아이샤가 잠시 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좋아, 완벽해. 참고로 난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
아이샤가 종이를 들어 올리더니 가운데에 적힌 글씨를 가리켰다.
“위험에 빠진 언니를 오빠가 구하게 하기! 이른바, 백마 탄 왕자님!”
보통 마음에 든 게 아닌지 아이샤는 그 부분을 반복해서 짚어댔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아이샤를 보며 델카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밌어 보여서 고른 건 아니지?”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데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아이샤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의지와 열의에 가득 찬 눈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반대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위험에 빠진 오빠를 언니가 구하게 하기! 이른바, 백마 탄 공주님! 우리 그걸로 하면 안 돼?”
이미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돌린 후인지 아이샤가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변하지 않은 자신의 쌍둥이를 바라보며 델카인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지한 면이라곤 아주 잠시일 뿐, 결국은 한결같았다.
델카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아이샤의 말에 반박했다.
"형이 위험에 빠질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
아이샤가 델카인의 말에 눈가를 좁히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라크하라면 어떤 위험에 빠트리든지 간에 귀신같이 빠져나올 게 뻔했다.
끄응, 종이를 붙잡고 침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던 아이샤가 결국은 델카인에게 결정을 떠넘겼다.
“그냥 네가 정해. 일단 언니만 있으면 나는 다 괜찮아.”
“음, 그럼…….”
델카인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더니 종이에 적혀 있는 마지막 항목을 가리켰다.
"이거 먼저 해보고, 그다음에 네가 선택한 걸 하자."
조그만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항목은, [햇살 좋은 날, 산책 중 돌발 상황 발생! 그리고 운명적 만남]이었다.
***
라크하를 끌고 겨우 상점 밖으로 나온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을 한 탓에 식은땀으로 손이 축축했다.
‘후, 큰일날 뻔했네.’
가게와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라크하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완전히 손이 떨어지기 전에 라크하가 다시 내 손을 움켜쥐었다.
“공작님……?”
내 부름에도 그는 눈가를 좁힌 채 제 손을 얽었다. 하나하나 제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나는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왜, 왜 그러시는 거예요?”
“펠리르, 그 자식이 그대를 손을 만진 게 기분이 나빠.”
그것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게 왜 기분이 나쁜 거지?
“그냥 악수를 한 것뿐인걸요.”
“음험한 눈으로 만지작거리는 게 언제부터 악수가 되었지?”
오히려 내가 더 라크하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어딜 봐서 음험한 눈으로 만지작거렸다고 하는 거냐고.
하지만 그렇게 물을 배짱은 없었다. 여전히 라크하의 주변에 흐르는 공기가 서늘하고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면 펠리르와 친구 관계가 아니라 앙숙 관계인 거 아니야?'
미운 정이 들어서 아직까지 같이 지내는 거지.
라크하와 펠리르의 사이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던 때였다.
라크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우측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응?”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사적으로 나 역시 덩달아 우측을 바라보았다.
펄럭. 검은 로브가 흩날리더니 다른 골목으로 순식간에 인영이 사라졌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뭔가 이상한 기운이라도 감지한 걸까. 자못 굳은 얼굴의 라크하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기세였다.
“어, 어딜 가시려고요?”
“확인만 하고 올 거다.”
“저 혼자 여기 있으라고요?”
이런 으슥하고 후미진 골목에 혼자 있기는 불안했다.
차라리 나도 데리고 가라. 응? 나는 라크하를 꼭 붙잡은 채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라크하가 짧게 한숨을 내뱉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은 내 머리 위였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딱 5분만 세고 있어.”
“…….”
"그럼 다녀오지."
내가 넋이 나간 사이에 라크하는 사라진 인영을 따라갔다.
라크하가 떠나간 이후에도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마음속에 살랑이는 것 같은 느낌.
나도 모르게 라크하가 만졌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내가 어린 애도 아니고.”
누가 동생을 둔 사람 아니랄까 봐. 아이샤나 델카인에게 할 법한 행동이었다.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벽에 등을 기댔다.
‘5분이라고 했었나.’
하긴 라크하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5분 만에 해결 가능하겠지.
이 세계에서 라크하와 대적할 만한 사람은 황제, 키네스밖에 없을 테니까.
‘할 것도 없는데 시간이나 세 볼까?’
1,2,3…… 나는 속으로 시간을 세었다. 그리고 한 10초쯤 되었을까.
어디선가 새가 포르르 날아오더니 내 머리 위에 앉았다.
“뭐, 뭐야!”
내 머리 둥지 아니야! 화들짝 놀란 나는 머리 위로 마구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다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듯이 들려왔다.
“뭐 하는 게냐!”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새치고는 건방지고 위엄 넘치는 저 눈빛. 분명 테리투스였다.
"테리투스 님……?"
"이제야 나를 알아보는구나."
내 손을 피해 공중에서 날고 있던 테리투스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난데없는 테리투스의 등장에 얼떨떨했다.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그 인간 때문이다.”
테리투스가 날개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크하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라크하요?”
“아니, 그놈이 쫓아간 인간 말이다.”
라크하를 놈이라고 부를 줄이야. 며칠 전에 내 방에서 라크하와 부딪혔던 일 때문에 심기가 상한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어째서 라크하도, 테리투스도 로브를 쓴 사람을 쫓으려 하는 건지 의아했다.
“그 사람한테 뭐 특별한 게 있는 건가요?”
"금기의 흑마법에 당한 인간이야."
줄곧 내 곁에 있었던 라크하가 다른 사람에게 금기의 흑마법을 사용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라크하 말고도 금기의 흑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군요."
"그래, 내가 잠들기 전까지 이 세계에서 금기의 흑마법을 쓰는 일만은 없게끔 어떻게든 막아왔거늘.”
테리투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혀를 끌끌 찼다.
“쯧, 이 세계를 포르투나에게 맡긴 게 불안하긴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만들어놨구나.”
"포르투나가 누구죠?"
"마음 약하고 어벙한 신인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테리투스가 하소연하듯이 말을 늘어놓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끝까지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테리투스 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주의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혹시 몰라 그 아이를 부르긴 했다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누구요?”
곧바로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테리투스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숨길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때였다.
테리투스가 말을 하다 말고 별안간 고개를 번쩍 세웠다.
"이런, 한 명이 아니었구나."
테리투스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불현듯 발끝부터 타고 오르는 싸한 느낌에 벽에 기대 있던 나는 황급히 등을 떼어냈다.
그때였다. 골목길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
남자의 손에 반짝이는 단도가 보이는 순간 나는 서둘러 몸을 뒤로 물려 피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한 탓에 날카로운 단도 끝이 내 뺨을 얇게 베어냈다.
"윽."
"메이아야!"
놀란 테리투스가 내 이름을 외쳤다. 그 음성에 당황할 법도 한데 로브를 쓴 사람은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닦아내며 돌연 나를 덮쳤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브 아래로 보이는 눈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초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