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숨기고 싶은 아내2022.03.28.
괴한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으슥하고 복잡한 골목. 그곳을 얼마나 누비고 다녔을까. 다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즈음, 앞서 걸어가던 라크하가 멈춰 섰다.
“이곳이다.”
라크하의 확신 어린 말에도 나는 잠시 그를 의심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가게는 부서질 것 같은 폐가 같은 곳이었으니까,
“정말…… 여기가 마법 포션 상점이라고요?”
“그래.”
나는 짐짓 당황한 얼굴로 가게를 살펴보았다. 이끼인지 곰팡이인지 모를 것들이 잔뜩 끼여 있는 문. 습기를 가득 먹어 그로 인해 썩어버린 것 같은 창틀. 개중 내 눈을 가장 사로잡는 건 문 위쪽에 작게 걸려 있는 간판이었다. <개 조심> 아니, 간판이 아니라 경고문인가? 라크하가 가게에 개가 있다고 했었으니까.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나요?”
“그러면 좋을 텐데 그냥 열어주는 놈은 아니라서.”
“아…… 그렇군요.”
무슨 비밀 신호라든가, 따로 특별한 방법을 써야 문을 열어주는 듯했다.
‘이런 구석진 곳에 있는 것도 모두 보안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려나.’
나는 라크하에게 맡길 심산으로 살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땐 그냥 부수면 돼.”
뭐? 내가 라크하를 말릴 틈은 없었다. 라크하는 부순다는 말을 하자마자 발을 들어 올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갈색 머리를 꽁지처럼 묶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야! 미쳤어?! 뭐? 문을 부순다고?”
“아, 그냥 열려버렸군.”
라크하는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발을 내려놓았다.
“벌써 차서 구멍 낸 건 아니지?”
갈색 머리 남자는 혹시나 흠집이 났나 싶은지 연신 문을 살폈다. 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왜 매번 멀쩡한 암호를 두고 문을 부수려고 드냐.”
“암호가 마음에 안 들어.”
“열려라 참깨만 외치면 되는 것을…… 미안. 조용히 할게.”
남자는 라크하의 매서운 눈빛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열려라 참깨라니, 일순 그 암호를 외치는 라크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너무 웃기잖아. 웃음을 참아보려고 했으나 입술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풋.”
“어라?”
내 웃음소리에 갈색 머리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내가 있다는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반가워. 아름다운 아가씨. 난 펠리르 미키아라고 해. 라크하의 오래된 친구야!”
펠리르 미키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물론 라크하의 외전도, 본편도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라크하와 친하더라도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반가워요, 저는-.”
펠리르의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하려고 했다. 라크하가 나와 펠리르 사이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름은 기억할 필요 없어. 그냥 개라고 생각해.”
“개……라고요?”
어딜 봐서? 성격이 개 같다는 건가? 뜻 모를 말에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는데 라크하가 펠리르를 툭 건드렸다.
“헉.”
그러자마자 펠리르에게 일어난 변화에 깜짝 놀란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불과 몇 초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펠리르의 머리 위로 귀가 쫑긋 솟아났다. 놀란 나를 보며 펠리르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내가 수인이라서.”
“…….”
라크하가 말한 개가 진짜 개가 아니라 개사람이었어? 나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멍하니 펠리르를 바라보았다. 부들부들해 보이는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귀가 앙증맞았다. 내가 멀거니 지켜보고 있자 펠리르의 귀가 시무룩하게 아래로 접혔다.
“역시 인간들 눈에는 무섭고 징그럽긴 하지?”
“……귀여워.”
문득 어릴 때 본 만화의 추억이 떠오른 나는 눈을 반짝이며 펠리르에게 다가갔다.
“딱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내 물음에 펠리르는 당황하던 것도 잠시 활짝 웃으며 머리를 내게 내밀었다.
“물론이지! 아가씨가 만지는 거라면 영광, 억.”
“어디서 개수작질을 하려고 해.”
라크하가 험악하게 중얼거리며 펠리르의 목을 팔로 둘러 뒤로 당겼다. 펠리르는 억울한 듯 버럭 외쳤다.
“개수작질이라니! 저 아가씨가 먼저 나보고 귀엽다고 하면서 만져보겠다고 했잖아!”
“맞아요, 제가 먼저 만져보고 싶다고 했는걸요.”
내 말에 라크하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개가 그렇게나 좋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제도 개를 좋아하냐고 묻더니. 나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켁.”
대답과 동시에 라크하의 팔에 목을 붙잡혀 있던 펠리르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어쩐지 라크하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 라크하는 펠리르를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상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렇게 상점 밖에 혼자 남은 나는 슬쩍 상점 안쪽을 흘겨보았다. 상점 내부는 중간 중간에 있는 양초 불을 통해 겨우 안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둑했다.
“안 보이네…….”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들어가도 되는 거겠지?
“실례하겠습니다.”
상점 안으로 발을 내딛은 나는 양초 불을 이정표로 삼아 걸었다. 점점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가게 내부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뭐야?’
괴상하게 생긴 뱀 모형에, 뭐가 담겼는지 구분하기 힘든 항아리들이 늘비해 있었다. 심지어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해골 모형도 있었다.
“이거…… 진짜인가?”
호기심에 만져보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내 팔목을 잡았다.
“아, 그건 만지지 마. 아가씨. 건들면 독을 뿜어내거든.”
이렇게 위험한 물건이었다고?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했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해골과 거리를 뒀다.
“고마워요.”
“뭐 이런 걸로 고마워할 것까지야.”
감사 인사를 건네던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목소리인데……. 뒤를 돌자 나를 보며 장난스레 웃고 있는 펠리르가 보였다.
‘펠리르가 왜 여기 있지?’
분명히 라크하랑 먼저 들어가지 않았나? 하지만 펠리르의 주변에는 라크하가 없었다.
“공작님은요?”
“내 조수한테 맡겼지. 어차피 샤키르의 꽃을 가져온 것도 아니더라고.”
“공작님께서 샤키르의 꽃을 여기로 가져오나요?”
“응, 이 근방에 꽃을 포션 형태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황궁에 한 놈, 그리고 나뿐이거든.”
펠리르가 해골 모형 옆에 있던 무늬가 복잡한 모빌을 치우면서 내 질문에 대답했다. 본능적으로 위험한 물건이라는 걸 직감한 나는 슬쩍 몸을 피했다.
“그것도 위험한 거죠?”
“응? 맞아. 그냥 되도록 전부 다 안 만지는 게 좋아.”
말이 좋아 마법 포션 상점이지 어쩌면 죽음의 상점이 아닐까. 나는 혹시나 뭘 잘못 건드리지 않을까, 차분히 두 손을 모았다. 여기서 펠리르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지는 듯했다.
“저는 그냥 공작님 곁에 있을게요. 공작님께 안내해 주세요.”
그게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펠리르는 안내하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며 눈부시도록 밝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펠리르 씨?”
“잠시 나랑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어? 라크하가 오기 전까지만.”
“어떤…… 대화요?”
처음 만난 사이인데 딱히 나눌 대화가 있나?
“음, 이것저것 전부 다? 특히…….”
뒷짐을 진 펠리르가 내게 몸을 살짝 숙이더니 킁킁거렸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려 그의 눈을 피했다. 강아지 귀를 달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귀가 사라진 지금의 펠리르는 부담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펠리르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보통, 제 입으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진짜 이상한 사람이던데. 의심을 잔뜩 담은 시선에 펠리르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다.
“밖에서는 라크하 때문에 몰랐는데 이제 보니 아가씨가 보통 사람이랑 다른 것 같더라고.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야.”
“……어떤 것을요?”
“아가씨한테서 샤키르의 꽃 향기가 진동을 하거든.”
펠리르가 내 머리카락 끝을 부드럽게 거머쥐더니 녹색 눈동자를 살풋 접어 웃었다.
“향기 좋은 꽃에는 날파리가 많이 꼬이는 법이잖아. 희귀하면 더 꼬일 테고. 그치?”
속내를 알 수 없는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입이 바짝 말랐다. 그러자 펠리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여상한 웃음을 지으면서 검지를 들어올렸다.
“내가 도움이 되는 날파리라고 생각하고 머리카락 한 올만 주면 안 될까?”
엄마, 얘 진짜 이상해. 기겁한 나는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펠리르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제 머리카락으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물품들, 물약들 모두 수상한데 말이다. 내 질문에 펠리르는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한테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맹세하지. 한 번 믿어봐. 내가 나름 마법 포션 제작 분야에서 최고라고.”
라크하가 옆에 둘 정도면, 믿어도 되는 사람일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냥 아무런 의심도 없이 넘겨주기엔 또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아가씨, 이런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고.”
펠리르 미키아, 이 사람에게서 약장수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의심이 점점 커져갔다.
“최고라면서 왜 숨어 지내는 거예요?”
“으음…….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실수도 많이 하는 법이잖아? 이젠 그런 일 없을 테니 딱 한 올이면 돼!”
그거 혹시 범법행위에 속할 만한 일을 저질렀다는 말 아니야? 여전히 미심쩍었으나 나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모습은 진심처럼 보였다. 게다가 라크하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도 나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내게 섣불리 해를 끼치려고 하진 않을 것이었다.
“알겠어요. 드릴게요.”
나는 내 머리카락 한 올을 뽑은 뒤 펠리르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고마워! 꼭 좋은 곳에 쓰도록 할게!”
펠리르가 흥얼거리며 빈 유리병에다가 내 머리카락을 넣었다. 그때 펠리르의 뒤로 저벅저벅 걸어온 라크하가 그 유리병을 낚아챘다.
“이번엔 또 무슨 개수작질을 하려고?”
“조, 조사할 게 있어서 그래!”
“저주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이미 재미없어서 때려쳤거든! 샤키르의 꽃의 부재를 내가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해결할 수 있다고?”
유리병을 잡고 있는 손을 위로 뻗고 있던 라크하가 눈썹을 들썩였다. 펠리르의 말에 동요한 건 라크하뿐만이 아니었다. 이는 나에게도 희소식이었다. 라크하가 온전히 내 능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으니까.
“펠리르 씨에게 맡겨보죠. 더 드릴까요?”
말만 해.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샤키르의 꽃이 영원히 개화하지 않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4개월 뒤 도망칠 때 라크하가 내게 집착하지 않으려면 샤키르의 꽃이 필요했다. 내가 머리를 한 움큼 뽑아줄 기세를 보이자 펠리르가 눈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그럼 나야 너무 좋, 억!”
눈살을 찌푸린 라크하가 들고 있던 유리병을 마구잡이로 펠리르의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차마 친구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어마무시한 기세로 나와 펠리르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단 하나로 뭘 해보고 나서 더 요청해.”
“그, 그래.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펠리르가 멋쩍게 웃으며 물러나더니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치유 포션은 전부 받은 거야?”
“몇 개를 제외하곤 나머지는 저택으로 보내라고 했어.”
그래도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뒷말을 작게 중얼거린 펠리르가 뒤를 흘겨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조수처럼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보였다.
“펠리르 님…….”
라크하에게 시달린 건지 조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펠리르가 경악하며 다시 라크하를 돌아보았다.
“너, 너! 우리 조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빨리 안 내놓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진심인 게 보이는 라크하의 싸늘한 미소에 내가 다 소름이 돋았다.
“으음…… 그,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펠리르 역시 그러했는지 언제 책망하려고 했냐는 듯 말을 바꾸었다. 라크하는 그런 펠리르를 무신경하게 흘겨본 뒤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짓을 하려고 쥐새끼처럼 빠져나간 거지?”
“에이, 네가 여자를 데려온 건 처음이니까 궁금해서 그랬지.”
이미 충분히 라크하의 큰 덩치에 내가 가려졌을 텐데. 이걸로도 부족하다는 듯 라크하는 더욱 나를 제 뒤로 숨겼다.
“네놈 따위가 함부로 말 섞을 사람이 아니야.”
“야, 너무하네. 인사도 안 시켜주고. 응? 누가 보면 숨기고 싶은 아내라도 되는 줄 알겠어.”
말도 안 되는 농담에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는데, 이어지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맞아.”
“뭐……?”
잠깐,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잘못 듣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또 한 번 라크하의 목소리가 상점 안에 울려펴졌다.
“조만간 결혼할 사이니까 정중히 모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