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대가 필요해2021.12.10.
나는 로봇처럼 삐그덕대며 라크하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쩌지?’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으나, 내게는 또 다른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테리투스를 통해 오늘 알게 된 내 괴상망측한 능력.
‘테리투스가 성물을 가져다주기 전까지 최대한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건데…….’
과연 가능한 일일까? 라크하가 방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뇨.”
“그럼 이제 가운을 벗고 눕지 그래.”
그건 좀 곤란한데.
"……제 가운은 왜요?”
"답답하지 않나?"
"안 답답해요."
"나이트가운도 아니고, 그런 두터운 욕실 가운이 안 답답하다고?"
"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출이 심하다 못해 프릴까지 달린 슬립을 보여주는 것보단 나았다.
‘낮 내내 손 이외엔 다른 스킨십은 안 된다고 해놓곤, 기대하고 온 사람처럼 보일 거 아니야.’
라크하와 보내는 첫날밤을. 즉, 가운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자 혹시 모를 일을 위한 방어수단이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격한 긍정을 보인 탓일까. 라크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 가운을 주시했다.
"혹시 가운 속에 숨기고 있는 거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라크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가 흑막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것도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의 기세에 움츠러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제가 왜 뭘 숨기고 왔겠어요.”
“그대가 지금껏 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을 법하지 않나?”
“제가 뭘 했…….”
별안간 파란만장했던 내 전적들이 떠올랐다. 머리채를 잡고 기절시키기. 프라이팬으로 머리 내리찍기…… 등등.
“그, 그렇긴 한데! 이젠 아시잖아요. 상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고, 모두 실수였는걸요.”
“그래, 신의 딸이라고 불리는 이가 악의를 갖고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겠지.”
덤덤한 말투였지만, 은근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조금은 억울하긴 하나 할 말이 없다. 그래봤자, 내가 했던 행동이 없던 일이 되진 않으니까.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 무슨 이유로 신전을 뛰쳐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내가 그대와 같은 상황이었어도 최대한 숨기려고 했을 테니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생각도 못 했다. 라크하가 나를 이해해줄 거라곤. 어쩌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그 멍청한 표정을 뭐지? 기분 나쁘군.”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
“멍청한 표정 지은 적 없거든요.”
내 반응에 라크하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좀 긴장이 풀렸나 보군.”
“아…….”
이 정도쯤 되니 헷갈렸다. 소설과 달리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 건지. 하지만 그는 언제 부드럽게 웃었냐는 듯 미소를 거두었다.
“빳빳한 나무 같은 사람과 자는 건 불편해서 말이지.”
“제 입장은 어떻겠어요?”
“그대가 불편한 건 당연할 테고, 그나마 나라도 편해야 하지 않겠나?”
라크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대가 내게서 얻는 게 있듯이, 나 역시 얻어 가려는 것뿐이지. 그대도 나도 서로가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네, 그렇긴 하죠.”
“그럼 이만 누울까?”
아차, 라크하의 화술에 넘어갈 뻔했다. 최대한 접촉은 미루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었어야 했는데. 나는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혹시…… 오늘 꼭 함께 자야 하는 걸까요?”
“…….”
심기가 불편한 듯 라크하의 눈썹이 꿈틀댔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잔뜩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내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이상,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잠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라크하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지?”
“이틀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뭐?”
아무리 못 해도 이틀이면 성물을 가져오겠지. 만약 못 가져온다면…….
‘그 생각은 나중에 하자.’
일단은 지금 당장 라크하와 동침을 미루는 게 중요했다.
“이틀만 주신다면 그땐 꼭 계약대로 함께 잠을 잘게요.”
“지금 그대가 하는 부탁이 계약 위반이라는 건 모르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전 받은 봉급이 없잖아요.”
내가 계약서를 위반할 시, 걸린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을은 본 계약을 위반할 시 갑이 을에게 지급한 금액의 3배액을 배상하여야 한다.] 처음에는 위반 조항을 보고 경악했다만, 오히려 나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줄이야.
‘이참에 기간을 조금 더 늘릴까?’
테리투스가 이틀 만에 못 올 확률도 꽤 높으니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사제.”
라크하가 내 이름을 부르며 위협적으로 성큼 다가왔다.
‘닿으면 절대 안 돼.’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럴수록 라크하는 물러나기는커녕 나를 따라붙었다. 곧 등에 서늘한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대는 언제나 미꾸라지처럼 어디론가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군.”
“……그렇지 않아요.”
“내가 한시라도 빨리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래도 이틀을 달라고 할 건가?”
“…….”
내가 한시라도 빨리 필요하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까이서 본 라크하의 얼굴은 멀리서 볼 때와 달랐다. 눈밑이 거무칙칙하고 안색이 창백했다. 어쩐지 피곤에 절어 보였다. 마치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대답해.”
내 대답이 늦어지자, 라크하가 나를 채근했다. 라크하의 안색이 신경이 쓰이긴 하나, 내 능력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대답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내린 선택은 라크하와 나, 모두를 위한 거니까.
“……네, 그럴 거예요.”
라크하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분노로 들끓는 눈동자가 나를 샅샅이 훑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망설이는 거지? 그저 이렇게-.”
라크하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아, 안 돼요!”
곧장 손을 빼려고 했으나 강한 힘이 옥죄었다.
“손만 잡겠…….”
라크하가 말끝을 흐렸다. 그와 동시에 사납게 치켜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자, 별안간 라크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어 웃었다.
“메이아.”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저, 저리 가요!"
나는 더 후회할 일이 생기기 전에 그를 거칠게 밀쳐냈다. 방심하고 있었던 건지 그는 쉽게 밀려났다.
"윽."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뻔한 대참사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행히 라크하는 과격했던 내 행동을 두고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냥 한참을 넋 나간 얼굴로,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 나는 놀란 마음을 달랜 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것 때문에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던 거예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공작님?”
내가 재차 부르고 나서야 라크하의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손등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내게서 물러났다.
"미쳤군."
라크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 접촉만으로도 이성을 잃는다고?”
혹시 라크하도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는 건가?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라크하에게 물었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뒤 입술을 달싹였다.
"접촉 부위가 많을수록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더군. 그래도 손만 잡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
접촉을 많이 할수록 능력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이샤가 나와 손가락만 잡았을 때, 한 말이 있었다.
-아까보단 괜찮네.
그래서 라크하가 계약서에다가 '손만 잡은 채'라는 말을 기입했었구나. 이것저것 정황을 따져보고 있을 때였다. 라크하가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발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이만 가봐."
"네?"
진심이야? 믿기지 않았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나를 붙잡으려 굴던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자, 라크하가 험악하게 읊조렸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네, 네! 알겠어요!”
후다닥 문으로 달려간 나는 완전히 나가기 전 그를 흘겨보았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래, 이틀 뒤든 뭐든 다음에 다시 부르겠다."
인사를 하고 문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쿵. 문은 그대로 미련 없이 닫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다.
‘어째서 나와 자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듯이 구는 거지?’
라크하도 황제 키네스처럼 샤키르의 꽃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걸까? 나는 라크하에 대해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원작 속에서 라크하가 나올 때마다 답답한 나머지 제대로 읽지 않고 넘겼으니까. 그 외에도, ‘라크하 외전’, 등 그와 관련된 것들이라곤 모두 읽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원작을 꼼꼼하게 읽을걸.’
문득 과거에 고구마 전개를 극도로 혐오했던 내가 후회스러웠다. *** 방에 혼자 남은 라크하는 쓰러지듯 침대에 앉아 머리를 짚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작 손바닥이 몸에 접촉한 걸로, 순식간에 이성을 잃을 줄이야.’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느낀 게 있었다. 메이아를 향해 들끓어 오르는 감정은 분명, '욕망'이었다. 점점 더 제어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잠을 자지 못한 탓이 클 터. 기절한 이후, 잠을 한숨도 제대로 못 잤으니 쇠약해질 만도 했다.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라크하는 문을 돌아보았다.
'설마, 다시 온 건가?'
이쯤이면 메이아가 자신이 잠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터. 걱정되는 마음에 다시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꿈틀거렸다.
"들어와."
하지만 그의 예상을 깨고 들어온 사람은 베개를 안고 있는 아이샤였다.
"오빠……."
"아이샤?"
아이샤는 라크하의 부름에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잘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오늘 유독 잠을 못 자겠어. 계속 눈을 감고 자려고 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아이샤가 라크하의 품에 안긴 채 칭얼거렸다.
"델카인은 잠들었고?"
"응, 나만 못 자고 있어. 델카인은 오늘 눕자마자 잠들었어."
“자려고는 해 봤나?”
“당연하지. 양을 1000마리까지 셌는걸.”
라크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마, 최근에 흑마법을 쓴 탓이겠지.’
라크하는 흑마법으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정도는 약과였다. 이 정도는 며칠 쉬면 해결되는 거니까.
'점점 강한 마법을 쓸수록 심각해질 텐데.'
몸이 쇠약해질 때마다 검은 기운이 덮칠 듯이 일렁일 테고. 자연스레 불안과 두려움은 커지게 될 거였다.
“그래서 흑마법은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한 거다, 아이샤.”
“생각은 해볼게.”
“고집도 참 세지.”
“누굴 닮았겠어? 오빠를 닮은 거겠지, 뭐.”
아이샤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라크하는 아이샤를 따라 웃지 못했다. 그는 진심으로 아이샤가 흑마법을 쓰지도, 배우지도 않았으면 했다.
‘흑마법으로 고통받는 건 나로 끝내고 싶으니까.’
그리고, 어떻게든 쌍둥이들이 불행한 길로 걸어가는 걸 막고 싶었다. 쌍둥이들에게까지 이어진 잔혹한 선대 아인티아 공작부부의 교육방식을 막지 못한 죄책감이 컸다.
-자, 네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죽여 보거라.
-아인티아는 그 누구에게도 약점을 보이면 안 된다.
-흑마법은 오롯이 아인티아만 지닐 수 있는 고유의 능력이야. 델카인, 너는 아인티아로서 자격 박탈이다.
-그 힘을 위해선 고통은 당연한 거야!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 금기의 흑마법으로 선대 아인티아 공작 부부를 내쫓긴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조금만 더 빨리 힘을 키웠다면. 조금만 더 빨리 금기의 흑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아이샤와 델카인에게 어린 시절의 고통을 주지 않았을 텐데.’
그때였다. 아이샤가 라크하의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오빠? 왜 그렇게 심각해? 내가 오빠 닮았다고 하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빠?”
라크하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슬쩍 웃었다.
“네 고집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아니야, 시롬이 맨날 나보고 고집 하나는 공작님을 닮았다고 했어.”
“시롬이……?”
아이샤는 노렸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시롬 좀 혼내 줘.”
“그만 장난치고.”
“정말이라니까!”
“그래, 알겠으니 이만 눕자. 시간이 많이 늦었다.”
라크하는 아이샤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러곤 옆에 따라 누워 일정한 박자로 아이샤를 토닥여주었다.
“눈도 감아.”
“쳇, 알았어.”
아이샤는 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드는가 했더니 아이샤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갑자기 머리가 하나도 안 아파. 보통 아침까지 아픈데.”
“다행이군. 다시 아프기 전에 얼른 자는 게 좋을 거야.”
라크하의 충고에도 아이샤는 여전히 할 말이 많은지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왜 오빠 방에서 좋은 향이 나는 것 같지?"
"좋은 향……?"
"응. 어디서 맡아 봤는데.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끝을 흐린 아이샤가 눈을 번쩍 떴다.
“오빠, 설마 언니랑 같이 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