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자정, 계약을 이행할 시간2021.12.06.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어디 다치진 않으셨어요?”
“……그래.”
테리투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훽 돌아앉았다. 그러곤 내 눈을 바라보지도 않고, 땅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음부턴 절대로 이 모습으로 오지 않으마.”
이번에야말로 나한테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이러다가 능력을 알려주지도 않고 떠난다면 곤란했다.
“테리투스 님, 제가 잘못했어요. 화 풀어요.”
“누가 화가 났다는 게냐! 난 화가 난 적이 없다!”
“그, 그렇죠, 자비로우신 테리투스 님께서 화가 났을 리가 없죠.”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하며 한껏 테리투스를 달래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은근히 효과가 좋다는 점이랄까.
“흐, 흐흥, 쓸데없이 말은 잘하는구나.”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기분이 좋은지 얼핏 보이는 수염이 씰룩거렸다. 마침내 테리투스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나를 보고 앉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아직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으셨어요.”
“아아, 그랬었지. 음…… 요즘 이상한 현상을 겪고 있는 것 같던데, 맞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긍정을 표했다. 무얼 말하는 건지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일이니까.
“결론부터 말하마. 그건 축복을 내리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란다.”
“네? 그게 무슨…….”
테리투스가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건가 싶었으나 제법 진지했다.
“네 능력은 내가 샤키르의 꽃의 본질을 증폭시켜 변형한 게지.”
내 능력이 샤키르의 꽃과 관련되어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왜 축복을 내리지 않는다고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죠?”
만약 내 능력이 샤키르의 꽃 효과가 있다고 해도 안정제 같은 효과만 나타났어야 했다. 하지만 안정제치고는 반응이 과했다.
“샤키르의 꽃은 적당량 섭취했을 때 안정을 주지만 과할 시에는 오히려 흥분제와 비슷한 효과가 있지.”
“흥분제……?”
“다시 말해 사랑의 묘약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사랑의 묘약……?”
어떤 식으로 말해봤자, 모두 충격적인 말뿐이었다.
“그래, 각성한 뒤로 축복을 한 번도 안 내린 탓에 접촉만으로도 그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지.”
예상치 못한 효과에 눈앞이 아찔거렸다.
“……그걸 왜 이제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오늘 그 아이와 함께 잔다는 계약을 맺지 않았느냐? 나름 알게 되자마자 알려주러 온 거다만.”
“그러니까 미리 알려주셨어야죠!”
그럼 협상은커녕 라크하가 내건 조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텐데!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테리투스는 태연하게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네가 하루 만에 허락할 줄은 몰랐단다. 생각이라도 해 본다고 하지 그랬느냐.”
“제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어요. 미리 알려주셨다면 아예 이런 일 따윈 없었을 거고요!”
“만약 네게 일어나는 현상을 없애고 싶다면 축복을 내리면 된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억.”
이를 꽉 깨문 나는 테리투스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기어코 내 화를 불러일으키는구나.
“방금 하신 말 다시 한번 해 보시죠?”
“……놔, 놔라! 이건 신성 모독이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원래 운명대로 살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던 건 다 거짓말이었나요?”
“거, 거짓말이라니! 난 그런 걸 하지 않는다. 그저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거늘!”
“다른 방법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다만…….”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는 테리투스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얼른, 말해요.”
“……말하면 내려줄 게냐?”
“물론이죠.”
“알겠다. 말할 테니 이만 내려다오…….”
방금 직접 거짓말은 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그대로 도망치진 않겠지. 나는 그제야 테리투스를 땅에 내려주었다. 땅을 밟은 테리투스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 기운이 담긴 성물이라면, 네 능력을 조금 차단할 수 있을 게다. 그럼 접촉을 해도 이제 안정제 효과만 날 테지.”
“성물이요?”
“그, 그래.”
그다지 날이 선 말투로 되묻지도 않았는데. 잔뜩 기가 죽은 테리투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지금 딱 부탁을 하면 들어줄 것 같은데?’
한줄기 희망을 본 나는 능청스레 물었다.
"아, 그걸 저를 위해 가져와 주시겠다고요?"
“그럴 순 없단다. 그런 용도로 만든 성물이 아니……지만, 늦게 말한 내 책임도 있으니 가져다주마.”
단호하게 말하던 테리투스가 순식간에 살벌해진 내 눈빛에 말을 바꿨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들어주기는 싫었던 건지 조건을 붙였다.
“대신 지니고 있는 동안 성물이 필요한 때가 온다면, 네가 날 도와다오.”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 내가 성물이 필요한 기간은 고작 4개월. 성물을 사용할 정도라면 큰일이 일어난다는 건데, 원작에선 그렇다고 할 만한 큰 사건은 없었다.
‘내가 세상의 흐름을 흔들어놨다는 게 걸리긴 하지만…….’
나에겐 지금 당장 성물이 필요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꼭 가져오셔야 해요.”
“물론이지. 금방 구해올 수 있을 게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느냐?”
“잠시만요.”
“……왜 그러느냐.”
테리투스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내게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접촉해서 능력이 써진다고 제 몸에 지장이 가는 건 아니죠?”
“그래, 축복처럼 능력을 건네줘야 네가 우려하는 문제가 생기는 거란다.”
내가 짐작했던 게 맞았구나.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능력에 대해 의문스러운 점이 남아 있었다. 사제, 아이샤, 그리고 라크하와 달리 델카인에게는 내 능력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혹시 제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요?”
“평범한 인간은 아무렇지 않을 게다. 샤키르의 꽃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효력을 발휘하니까. 이를테면, 신력, 신성력, 마력을 지닌 자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득 머릿속에 아이샤의 외침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흑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게 힘만 더럽게 세!
델카인은 흑마법사가 아니어서 통하지 않았었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델카인까지 능력이 통한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다. 그때, 연신 내 눈치를 보던 테리투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가 봐도 되겠느냐.”
“네, 가보셔요.”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테리투스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꼬리 빠지게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 테리투스가 나가고 혼자 남은 방.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나는 멍하니 고풍스러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장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접촉만으로 능력이 써진다니…….”
그것도 흥분제나 사랑의 묘약 같은 능력이라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여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차이려나.’
레이나는 그저 잠만 재우는 능력이던데. 심지어 스스로 조절도 가능하고. 그에 비해 나는 조절도 불가능했다.
“하아.”
그저 한숨만 흘러나왔다. 6000케르크를 벌 생각에 행복한 꿈에 부푼 것도 잠시였다. 나에겐 여유를 느낄 시간 따위 없었다.
“……피곤해.”
몸보단 정신적으로. 조금만 편해지려고 하면,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누가 계속해서 뒤에서 채찍질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죽기 직전 <샤키르의 꽃>을 읽고 있었던 것부터? 그럼 발을 헛디딜 일도, 빌어먹을 소설 속으로 빙의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나는 한없이 우울해지려는 감정을 겨우 끄집어냈다.
“어차피 지금 후회한다고 해서 바뀔 건 없어.”
이미 메이아로 빙의한 몸. 내게 처한 상황을 부정하기보단 적응하고 이겨내야 하는 게 맞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바뀌는 건 없으니까.’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았던가.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래,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든 4개월 동안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렇게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빠르게 대처 방안을 떠올려야 해.’
내일부터 라크하와 함께 잠을 자야 할 테니까.
***
"시터님, 시터님?"
흔들흔들. 누가 내 몸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 고민하다 잠들어버렸네.’
나는 입가에 묻은 침을 쓱 닦으며 눈을 느릿하게 떴다. 눈앞에 낯선 얼굴이 보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누, 누구세요?"
누가 말도 없이 내 방에 들어온 거야.
“아, 저는 동쪽 별관에서 일하고 있는 리타라고 해요.”
"동쪽 별관……?"
"시터님께서 계시는 곳이 동쪽 별관이에요."
"아아. 그런데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내게 볼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계약서 내용이 효력을 발휘하는 날짜는 내일부터였으니까. 즉, 오늘만큼은 쌍둥이들도, 라크하도. 그 누구도 나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공작님께서 시터님을 부르셨어요."
그래, 분명 없어야 하는데…….
"누가, 누구를 찾는다고요?"
"공작님께서 시터님을요."
"네?"
라크하가 날 왜 찾아? 의문도 잠시, 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지금 몇 시죠?"
"방금 막 자정이 좀 넘었어요.”
“허…….”
입술 사이를 비집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지금 자정이 넘어 다음 날이 됐으니 계약 내용을 이행하라는 거야?
'악덕 사장! 악덕 업주! 악덕 공작!'
라크하의 철저한 시간 계산에 나는 속으로 그를 욕하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저…… 자고 있다고 해주면 안 될까요?"
제발. 나는 리타를 향해 애절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유한 얼굴과 달리 굉장히 단호한 사람이었다.
"안 돼요, 공작님의 명이 우선이에요."
"아아……."
탄식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다. 아인티아 공작가에선 내 편은 없었다. 이곳의 주인인 다들 라크하의 명을 우선으로 하겠지.
‘정면 돌파를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반쯤 체념한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
"……안내해 주세요."
그대로 터덜터덜 방을 나가려고 했다. 리타가 나를 다시 부르지만 않았더라도.
"어디 가세요, 시터님!"
"얼른 가야죠. 부르신다면서요."
"이대로 가신다고요?"
리타가 기겁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럼?
“옷은 갈아입고 가셔야죠.”
“옷이요……?”
“네.”
리타가 활짝 웃으며 줄곧 팔목에 걸치고 있던 걸 내게 내밀었다.
“제가 시터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요.”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이, 이걸 입으라고?'
얇은 소재로 된 하늘하늘한 슬립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굉장히 야시시한.
"잠시, 잠시만요."
이건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왜 그러세요?”
“그게 그러니까…… 공작님께서 그러려고 부르신 게 아니에요.”
“시터님, 제 앞에서는 부끄러워하지도, 숨기지도 않으셔도 된답니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정말이에요.”
“후후, 제가 공작님께 들은 게 있는걸요.”
리타가 수줍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미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구나.’
리타의 오해를 무마시킬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했다. 후, 이 방법까지 쓰고 싶진 않았는데…….
“리타 씨.”
“네?”
“공작님께서 제게 씻고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알아듣겠지?
“맞아요, 공작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죠. 굳이 씻겨 보낼 필요는 없다. 잠을 자는 데 지장은 없을 테니까.”
“네, 공작님께서 리타 씨에게도 그리 말씀하셨네요.”
다행이다. 드디어 오해가 풀리겠구나! 하지만 그저 내 바람일 뿐, 현실은 달랐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죠. 긴장을 많이 하고 있을 테니, 특별히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그 말씀들을 듣고 저는 깨달았어요.”
“네? 무엇을요?”
“제게 아인티아 공작가의 하녀로서 막중한 임무가 내려졌다는 사실을요.”
그 순간 나도 함께 깨닫고 말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리타의 오해를 풀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 다행히 슬립은 내 방에 있던 욕실 가운으로 가릴 수 있었다. 그렇게 리타의 손에 이끌려 온 라크하의 침실 앞. 리타의 노크와 함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왔군."
막 씻은 듯, 물기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자수정처럼 우아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라크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