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언니라고 불러도 돼? (10/136)

10. 언니라고 불러도 돼?2021.12.03.

라크하나 아이샤나, 어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 억울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1654869577594.jpg‘참자, 참아. 애를 상대로 화를 내봤자 뭐 하겠어…….’

나는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자아냈다.

1654869577594.jpg"무슨 짓을 했냐니? 어떤 짓도……."

16548695775958.jpg"거짓말 치지 마! 했잖아!"

아이샤는 자못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1654869577594.jpg'말을 해 줘야 알지.'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보다 못한 델카인이 아이샤를 붙잡았다.

1654869577597.jpg"왜 그래, 아이샤?"

16548695775958.jpg"저, 저 사제가 나한테 이상한 술수를 썼어!"

1654869577597.jpg"어떤 술수?"

16548695775958.jpg"막, 힘이 빠지고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면서……."

아이샤는 불안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제 얼굴을 가렸다. 차마 가려지지 않는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16548695775958.jpg"좋은 냄새 나고,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고!"

1654869577594.jpg"아."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내 목에 얼굴을 박은 채 연신 숨을 들이마시던 라크하. 두 사람의 반응은 비슷했다. 설마…… 이번에도 능력이 써진 건가? 나는 아이샤를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1654869577594.jpg"아이샤, 다시 한번만 나랑 손잡아 볼래?"

16548695775958.jpg"시, 싫어!"

아이샤가 빽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진정될 때까지 똥고집을 부릴 게 분명했다.

1654869577594.jpg‘그나저나 델카인은 괜찮아 보이는데…….’

어째서 아이샤와 라크하에게만 능력이 써지는 거지? 나는 나와 손을 맞잡고 있는 델카인을 향해 물었다.

1654869577594.jpg"델카인은 아이샤처럼 그렇지 않고?"

1654869577597.jpg"형수님은 지금 아이샤 말을 믿는 거야?"

1654869577594.jpg"응?"

이건 또 뭔 소리람.

1654869577597.jpg"누가 봐도 지금 형수님한테 점수 따려고 저러는 거잖아."

델카인이 경계심으로 가득 들어찬 눈으로 아이샤를 쏘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두고 아이샤와 경쟁을 한 탓인 듯했다. 이러다 나 때문에 둘 사이가 더 나빠지는 거 아니야?

1654869577594.jpg"음…… 델카인, 잠시 가까이 와 볼래?"

내 부탁에 델카인이 반발 없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몸을 숙여 델카인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1654869577594.jpg"내가 볼 땐, 아이샤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거든."

1654869577597.jpg"어딜 봐서?"

라크하를 생각해 봤을 때?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간 오히려 델카인의 반감만 살 터. 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되겠다. 나는 몸을 숙여 델카인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1654869577594.jpg"아이샤가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니지?”

아이샤는 솔직한 편이었다. 방금 전만 해도 자기가 느꼈던 걸 직설적으로 얘기할 정도니까. 경계로 들어차 있던 델카인의 눈빛이 살짝 거둬졌다.

1654869577597.jpg“그렇긴 한데…….”

1654869577594.jpg“그럼 가서, 아이샤 좀 달래줄래?”

16548695775958.jpg“나 빼고 둘이서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차마 가까이 오지는 못 하고 멀리서 아이샤가 소리쳤다. 그 광경에 델카인이 눈가를 좁혔다.

1654869577597.jpg“저 성질 좀 봐. 달래줘도 아이샤는 분위기만 망칠 거야.”

1654869577594.jpg“하지만 아이샤도 즐겁게 저택을 구경시켜 주고 싶은 마음은 같지 않을까?”

1654869577597.jpg“…….”

델카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1654869577597.jpg“형수님은 아이샤랑 함께 돌아다니고 싶어?”

1654869577594.jpg“음, 델카인이랑만 돌아다녀도 좋지만, 어디든 함께할수록 더 즐거운 법이라는 말도 있잖아.”

1654869577597.jpg“……알았어. 형수님 말 들을게.”

나름 내 대답이 괜찮았던 걸까, 델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1654869577594.jpg“착하다.”

나는 손을 뻗어 델카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델카인이 눈을 살며시 감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1654869577594.jpg‘……너무 귀엽잖아.’

더 쓰다듬어주고 싶었으나,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이샤가 우리를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1654869577594.jpg"자, 다녀와."

1654869577597.jpg“응.”

델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총총걸음으로 아이샤에게 다가갔다. 아이샤의 앞에 선 델카인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654869577597.jpg“아이샤, 형수님이 좋을 땐 그렇게 표현하는 거 아니야.”

저기 델카인…… 달래러 간 거 맞지? 델카인만의 독특한 방법이겠거니, 하고 일단 지켜보았다. 아이샤가 전보다 붉은 기운이 가신 얼굴로 미간을 왈각 찡그렸다.

16548695775958.jpg“하지만 정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단 말이야!”

1654869577597.jpg“만약 형수님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더라도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

16548695775958.jpg"……그렇네. 오히려 좋았어."

설득을 하려고 할 줄이야. 내가 익히 아는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확실히 아인티아의 핏줄이긴 하구나. 델카인은 계속해서 아이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1654869577597.jpg"그치? 그런데도 네가 계속 형수님한테 그런 식으로 굴면, 정말 형과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

16548695775958.jpg“아아! 싫어! 절대 안 돼.”

아이샤가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고개를 세게 저었다.

1654869577597.jpg"자, 가자. 넌 형수님 안 뺏기게 해야지."

델카인이 아이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델카인의 손을 잡고 다가온 아이샤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16548695775958.jpg"흠흠, 생각해 보니 내가 예민했었네. 사제는 나한테 좋은 술수를 쓴 거였는데."

신발코로 툭툭 땅을 건드리며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부끄러운 게 분명했다.

1654869577594.jpg'뭐야, 아이샤한테 이런 면도 있었어?'

뜻밖의 모습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1654869577594.jpg"그래서, 아이샤. 저택 구경은 언제 시켜줄 거야?"

16548695775958.jpg"응?"

내가 무어라 하지도 않고, 화제를 돌릴 줄은 몰랐는지 아이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능청스레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1654869577594.jpg"얼른 아이샤가 구경시켜줬으면 좋겠는데. 다리 아프려고 해."

16548695775958.jpg"아…… 그래! 사제, 다리 아프면 안 되지."

1654869577594.jpg“그럼 갈까? 여기로 가면 돼?”

아무 방향이나 가리킨 채 묻자, 델카인이 덥석 내 손을 잡았다.

1654869577597.jpg“형수님, 이쪽 먼저. 그쪽에 갔다간 우리 잡혀가.”

역시 난 불운의 아이콘이라니까. 가리켜도 어쩜 아이들이 곤란한 방향인지. 머쓱해서 어색하게 웃는데, 내 곁에서 머뭇거리는 아이샤가 눈에 띄었다.

1654869577594.jpg“아이샤, 왜 그래?”

16548695775958.jpg“……손잡아도 돼?”

나와 손잡기 싫다고 소리치던 일 때문에 망설여졌나 보다. 하지만 섣불리 손을 잡아도 된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1654869577594.jpg‘델카인이랑 다르게 아이샤한테는 내 능력이 통하는 것 같은데.’

똑같은 현상이 또 일어날 게 뻔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아이샤가 흘깃 내 눈치를 보았다.

16548695775958.jpg“손가락만이라도 잡게 해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나는 마지못해 아이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샤가 활짝 웃더니 내 검지를 작은 손으로 잡았다.

1654869577594.jpg'이번엔 어떠려나.'

접촉으로 능력이 써지는 것 같긴 한데. 나는 긴장하며 아이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것도 잠시, 아이샤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16548695775958.jpg"……아까보단 괜찮네."

후, 다행이다. 혹시 접촉 부위가 적으면 능력의 효과가 덜한 건가, 추측해보고 있던 그때. 아이샤가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16548695775958.jpg"그런데, 사제. 언니라고 불러도 돼?"

16548695846774.jpg

  ……효과가 덜한 게 아닌가? *** 저택을 구경하는 길은 제법 험난했다. 쌍둥이들이 땡땡이친 걸 걸리지 않을 길로만 다녀야 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저택을 지키던 기사에게 걸려버렸다.  

16548695775958.jpg-언니! 꼭 나중에 다시 구경시켜 줄게!

1654869577597.jpg-형수님! 다음에 봐!!

  쌍둥이들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침대에 누웠다.

1654869577594.jpg"으으, 피곤해."

저택이 어찌나 넓은지 방으로 돌아오는 길도 참 멀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쌍둥이들을 돌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1654869577594.jpg'일단 델카인이 내 말을 잘 들어줘서 다행이었지.'

아이샤는 하지도 않을 결혼을 막겠다는 똥고집으로 넘어와 줬고. 조금 정신없긴 하다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1654869577594.jpg'나름 꿀 직장인데?'

게다가 1500케르크다! 신전으로 내쫓길 걱정도 줄었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한가득 지어졌다.

1654869577594.jpg'그러면 몇 달 뒤에 사직서를 내면 되지?'

보자. 목표 금액은 6000케르크였으니까. 4달 정도려나. 날짜를 계산하고 있는데, 침대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1654869577594.jpg"음?"

몸을 일으켜 바닥을 바라보았다.

1654869577594.jpg"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누우려던 그때. 스스슥. 이번엔 정확히 들었다. 나는 침대 끝을 잡고 고개를 숙여 침대 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1654869577594.jpg"으…… 으아악!"

나는 기겁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16548695860994.jpg"조용히 하여라!"

왜 테리투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의아하던 그때.

16548695860999.jpg"시터 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누가 나를 부르며 문을 벌컥 열었다. 첫날부터 내 방 주변의 복도를 순찰하던 기사, 미스틱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테리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8695860994.jpg"잘 둘러대거라."

1654869577594.jpg"하하……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거든요."

16548695860999.jpg"아…… 그렇군요. 조심하십시오."

미스틱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더니 인사를 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다시 침대 밑을 내려다보았다.

1654869577594.jpg“……흑돼지?”

16548695860994.jpg“너구리이니라!”

아, 너구리구나. 그런데 너구리치고 덩치가 꽤 큰 것 같다.

1654869577594.jpg“거기서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16548695860994.jpg“침대 밑이 은근히 아늑하고 좋더구나.”

1654869577594.jpg“그래서 계속 거기 계실 거예요?”

눈을 가늘게 뜬 채 묻자, 테리투스가 헛기침을 하며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제야 테리투스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덥수룩한 줄무늬 꼬리와 둥근 귀. 뾰족한 주둥이와 달리 무척 통통한 볼. 땅에 닿을 듯 출렁이는 뱃살.

1654869577594.jpg“정말 너구리네…….”

대신 조금 뚱뚱한.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1654869577594.jpg"왜 그런 모습으로 온 거예요?"

16548695860994.jpg"나름 여기서 가장 귀여운 놈을 골라 온 건데, 귀엽지 않느냐."

테리투스가 앞발을 얼굴 가까이로 가져다 대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1654869577594.jpg“귀엽긴 한데…… 좀 꼬질꼬질하네요.”

테리투스가 다닌 곳마다 흙투성이였다.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16548695860994.jpg“그래서 싫으냐?”

1654869577594.jpg“기왕이면 깨끗한 게 좋죠.”

16548695860994.jpg“아쉽구나.”

뭐가 아쉬워. 나한테 잘 보이고 싶기라도 한 거야?

16548695860994.jpg“워낙 귀엽게 생겨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부드러운 털과 통통한 볼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구나.”

1654869577594.jpg“더러운 건 더러운 거죠.”

16548695860994.jpg“한 번 만져 보아라. 그럼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테니.”

테리투스가 팔을 내밀자 시큼한 냄새가 훅 풍겼다. 윽. 나는 작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4869577594.jpg"그 전에 병 먼저 걸릴 것 같은데요."

단호한 내 대답에 테리투스가 축 두 팔을 떨구었다. 불쌍해 보이려고 한 행동인 것 같았다.

1654869577594.jpg'그런다고 넘어가면, 진작에 혹했겠지.'

나는 단호한 얼굴로 창문을 가리켰다.

1654869577594.jpg"다음부턴 차라리 새로 현신해서 날아와요.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창문 열어줄게요."

16548695860994.jpg"……한 번 고려는 해보마."

제발 새의 모습으로 왔으면 좋겠다.

1654869577594.jpg"그나저나 어쩐 일이에요?"

16548695860994.jpg"네 능력에 대해 알려주러 왔단다."

1654869577594.jpg"아."

그래, 내가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사실 메이아의 능력에 대한 모든 열쇠는 테리투스에게 있었다.

1654869577594.jpg"잘 왔어요. 얼른 알려줘요!"

나는 침대에 엎드려 테리투스의 얘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테리투스가 사뭇 진지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16548695860994.jpg"자, 이제 중요한 얘기를 할 거니 잘 듣거라."

1654869577594.jpg"네."

16548695860994.jpg"그런데, 바닥이 딱딱하니 침대에 올라가서 얘기를……."

1654869577594.jpg"안 돼요!"

그 몸으로 어딜 올라오는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잡아당겼다. 쿵. 매달려 올라오던 테리투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1654869577594.jpg"헉, 괜찮아요?"

놀란 나는 황급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맥없이 툭, 떨어질 줄은 몰랐다.

1654869577594.jpg"……."

상처를 받은 듯 조그만 얼굴에 달린 입이 벌어졌다.

16548695919462.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