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건드려서는 안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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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건드려서는 안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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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건드려서는 안 될
2022.12.05.
영숙은 이내 초조한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너 이 엄마 얼마나 도와줄 수 있니? 채 회장님한테는 말 안 했지?”
문 앞에서 아들을 보자마자 급히 액수부터 묻는 영숙을 보며 도하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제 어미를 쏘아보았다.
“비키세요. 도현이 잘 있는지 당장 확인하는 게 우선이에요.”
아들이 위압적으로 나오자 영숙은 하는 수 없이 길을 터 주었다.
“얘는……. 설마 내가 내 손자한테 뭘 어찌하기라도 했을 거 같니?”
저벅저벅 들어선 도하는 크지 않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내부는 정돈되지 않아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때 영숙이 어느 한 방의 문을 열었다. 긴장한 도하의 시야 속에 열린 문틈이 들어왔다. 누워 있는 작은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도하는 빠르게 방으로 다가갔다. 도현이 잠든 강아지 옆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도하는 몸을 낮춰 앉으며 아이를 살폈다.
“도현아!”
“잠든 거야. 놀라지 마라. 강아지랑 놀다가 같이 잠들었다.”
“후…….”
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민할 것도 없이 도하는 손을 뻗었다.
잠든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 일어서는 도하를 보며 영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하야. 그럼 도, 돈은?”
품속에서 잠든 도현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서 있던 도하는 어미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대답했다.
“네. 이제부터 치러야죠. 내 새끼 몸값,”
아들의 말에 조금 안심한 영숙은 민망한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고, 고맙다. 도하야. 역시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적지 않은 돈이지만 너한테 그 정도도 없지는 않잖니, 응?”
쾅쾅-
그때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숙은 움찔 놀라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영숙 씨!”
이 집에 사는 주인 남자가 아닌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다.
“누, 누구지?”
“도현이 몸값 때문에 온 분들이에요. 열어주세요.”
“아아, 그래!”
영숙은 재빨리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열린 문으로 남자들의 모습을 본 순간 영숙은 잔뜩 굳은 표정을 했다.
도하의 비서나 변호사인 줄로만 알고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런 차림새가 아니었다. 동시에 도하가 냉정한 말투로 내뱉었다.
“몸값은 제가 아니라 어머니가 치르셔야 할 거예요.”
“……뭐야?”
“내 새끼 함부로 납치하셨으니, 죗값을 치르셔야죠, 어머니. 물론 어떠한 벌의 무게도 감히 내 아이의 몸값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요.”
영숙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집에 찾아온 그들은 싸늘한 얼굴로 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한영숙 씨 되십니까?”
“……예?”
“신고받고 왔습니다.”
비로소 영숙은 그들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아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도, 도하야! 이게 뭐니?”
설마 정말 아들이 나를? 손주 좀 잠깐 데려왔다고 나를?
믿을 수 없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영숙은 도하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도하는 남보다도 더 먼 사람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조용히 하세요. 도현이 깨요. 이 상황을 보면 아이가 겁먹지 않겠어요? 이대로 편히 자면서 아이 엄마한테 돌아갈 수 있게 조용히 좀 해주세요. 어머니는 거기 그분들 따라가시면 돼요.”
“야! 너 지금 네 어미를 납치범으로 붙잡혀 가게 하려는 거야?”
영숙은 삽시간에 울상이 되어 악을 썼다.
“가셔서 겸허하게 반성하시면서 진술하세요. 그게 그나마 어머니가 도현이의 몸값을 덜 비싸게 지불하실 방법이니까요.”
“도하야!”
“그러게, 건드려서는 안 될 걸 왜 건드리셨어요.”
아들이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또 있을까. 안 그래도 어려웠던 아들이었지만 이번에는 남만도 못한 눈길로 어미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
현서는 집 안 거실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도하가 시키는 대로 경찰에 신고도 했는데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우선은 집에서 도현의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 경찰서로 갈 준비를 마쳐놓고서.
도현의 시터 역시 죄인처럼 죽을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집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침묵을 깨고 현서의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도하였다.
현서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찾았어, 도현이.
“아아! 감사합니다…….”
현서는 그제야 온몸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경찰이랑 만났어. 도현이는 잘 있어. 놀라지도 않았고.
“하아……. 다행이에요, 정말.”
현서는 두근대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안도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
유치장에 갇힌 영숙은 훌쩍훌쩍 울다가 혼자서 화를 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들 도하가 드디어 그녀를 찾아왔다. 갇힌 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 아들이 보이자 그녀는 안도하며 반색을 띠었다.
“도하야!”
도하는 면회실 철창과 투명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어미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
“그래, 우리 아들이 역시 엄마를 도와주러 왔구나. 엄마 언제 나갈 수 있대?”
그녀는 여전히 아들에게 일말의 기대감을 부여잡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도하는 그 기대를 박살 냈다.
“합의는 없을 거예요.”
“……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영숙은 투명한 칸막이에 얼굴을 붙일 듯 가까이 다가와 되물었다.
“현서도 합의를 원치 않고, 물론 저랑 채 회장님도 현서의 의견을 지지하고요.”
“지지? 자, 잠깐만, 그러면…….”
“우리는 어머니를 엄벌에 처하도록 최대한 도울 거란 이야기예요.”
영숙의 안색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갔다. 그 말을 하는 아들의 얼굴은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더한 이야기가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영숙은 미리부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입술을 떨며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의 죄목이 더해질 거예요.”
영숙의 두 눈이 더욱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무슨, 무슨 죄목?”
“그건 어머니 본인이 잘 아시잖아요.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제 입으로 또 해야 하나요?”
아들은 얼음장보다도 더 싸늘한 눈빛으로 제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가 친어미를 대하고 있단 것도 모를 정도로 분노와 경멸에 찬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아들은 분명 제 딸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겁에 질린 영숙은 파들파들 몸을 떨며 도하를 보았다.
“서하 일…… 말하는 거니?”
도하는 침묵으로 긍정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현서가 그거까지 신고했대? 도하야! 그건 사고였어! 왜 이제 와서 다 지나간 그 일까지 문제를 삼니!”
영숙은 돌아가는 상황이 전부 이해되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아들이 여기서 저를 빼내 주려 온 건 아닌 게 확실했다.
궁지에 몰렸다는 확신이 들자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도하는 어미의 눈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아마 사기죄도 더해질 테니 죄목은 최소 세 가지가 넘으시겠네요.”
“사기죄라니, 그건 그 사람들이 기다려주기로 한 거 아니니?”
“이제 그 사람들이 전부 다 어머니를 기다려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왜? 어째서?”
밖에서 무슨 일이 또 일어난 걸까? 심장이 튀어 나갈 듯이 뛰어댔다.
“방금 기사가 터졌어요.”
“기사라고? 무슨 기사?”
도하는 그저 담담한 어조로 사실을 일러주었다.
“아버지가 방금 언론에 터뜨리셨거든요.”
영숙은 벌어진 입술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별했다는 사실이랑……. 서하의…… 일까지…….”
도하는 뒷말에서는 끝내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아연실색한 영숙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그러니까 그게…… 기사로 나갔다고?”
도하는 잠깐 동안 어렵게 진정한 후 다시 고개를 들고 침착하게 어머니를 보았다.
“한마디로 진성 오너가에서 어머니를 버렸다는 걸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이제 투자자들 중에도 어머니를 고소할 사람이 생길 거예요.”
“도, 도하야!”
영숙은 울부짖으며 아들의 이름을 외쳤다. 이 모든 게 너무도 최악이어서 닥친 일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너 엄마 놀리는 거지?”
이 한영숙이 완전히 망한 거야?
이 모든 게 어미가 제 아들 도현을 데려간 게 괘씸해서 그냥 저를 겁주려고 해본 말이었으면 좋겠다.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금방 아시게 될 거고요.”
벼랑 끝에 몰린 영숙은 끝내 엉엉 울며 도하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거니?”
“그건 재판을 받아 보시면 알겠죠. 중요한 건, 이제 다시는 도현이랑 현서 근처에 가실 수 없도록 조치 될 거란 사실이에요. 여러 죄목들에 대한 실형은 얼마나 받으실지 모르겠지만, 진성의 변호인단과 싸우셔야 할 겁니다.”
“뭐? 지, 진성의 변호사들이랑?”
“지금부터는 저랑 채 회장님이 어머니의 적이 되었다는 이야기예요. 어머니가 가장 큰 벌을 받도록 싸우겠다는 의미죠.”
“도하야! 그러지 마! 지금의 너를 있게 해준 이 엄마한테,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도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숙이 스스로를 ‘이 엄마’라고 지칭하는 것도 듣기 싫었다.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제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인데, 그게 하필 핏줄이었으니 이 무슨 지독한 악연인가.
“어머니…….”
도하는 고통스러운 탄식을 뱉어내듯 그 호칭을 불렀다.
영숙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가만히 아들의 말을 기다렸다.
아들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본 아들의 얼굴 중에 가장 괴로운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숙은 이내 더욱 놀라고 말았다.
아들의 눈가에 서서히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괴롭고 슬프게 젖은 눈이 그의 어미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런 분이신데…….”
놀라고 있는 영숙에게 도하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현서랑 내 아들 얼굴을 봐요.”
자포자기한 듯 망연해 보이는 아들을 보며 영숙은 함께 울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시던 돈, 제가 어떻게 하는지 거기서 똑똑히 지켜보세요.”
슬픔에 젖어서도 아들의 말은 너무도 확고했다.
“그리고 오늘 이후부터 당신에게 저는 아들이 아닐 겁니다.”